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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이상스 Jul 21. 2021

이면이 필요한 우리

혼란에 유독 호들갑 떠는 세계

혼란에 유독 호들갑 떠는 세계, 이면이 필요한 우리


그렇다면 세계는 왜 언어 바깥의 혼란을 받아들이지 않을까. 세계의 실체는 언어로 지어진 집. 추상으로 기초 공사하여 관념으로 말뚝 박고 튼튼하게 성벽을 세웠으니 관념을 건드리는 일은 본진을 공격하는 것과 다름없는 법. 하여, 우리는 애써 만든 성벽을, 환상의 도피처를, 부수지 않는다. 우리는 개미가 될 수 없다. 단 하나의 소리 없이 그저 찰나의 향으로 단단한 왕국을 건설하는 개미가 될 수 없다. 우리에겐 빌어먹을 언어가 소통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하여, 우리는 끊임없이 추론할 수 있으며 안전하게 학문을 정돈할 수 있다. 지식을 축적할 수 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다. 문제는 세계가 아니라 우리, 인간이다.

우리는 만족을 모르는 동물이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어보았자 욕망의 티끌, 찰나의 착각일 뿐이다. 언어는 도구적 용도로 사물을 받아들인다. 어렸을 적 자신의 인생관과 개성이 물씬 풍겼던 책상은 ‘책상’ 외에 다른 이름을 가진 적이 없다. 언어는 차이를 지운다. 만약 책상을 ‘빌리’나 ‘용식’이로 부른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쫒겨날 것이 자명하다. (물론 ‘정신병원’이란 그곳도 또 다른 안전한 세상이다.) 

마주하고 있는 소나무는 서로 다른 소나무이며, 같은 ‘소나무’이다. 이 얼마나 편리한가.

무한하게 구르는 의미를 잡아다가 펄떡거리는 대가리를 칼로 척 내리치고 터벅거리는 꼬리까지 잘라내고, 소금, 얼음과 함께 박스에 차곡차곡. 

안녕, 통상적 상징.

우린 만난 적이 있고 앞으로도 만날 거야. 

네가 어려워할 때마다 나타나 정답이 되어 줄 거야.

혼란스러워 하지마. 배교자는 도태될 뿐이야.

자 잊어.


도구가 길들인 인간은 슬슬 부아가 치민다. ‘형용할 수 없는 것들’이 내면 저편에서 활개를 친다. 분명 감지되는 것이 있고, 꿈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생생하다. 방어기제는 기능에 한계를 느낀다. 우리는 서서히 병든다. 있는 걸 없다고 해야 하니까. 태생적인 억압이 한계치를 넘었으니까. 어떤 이는 예술가가 되어 ‘형용할 수 없는 것들’을 감각적으로 승화한다. 시를 써서 여기 ‘아이러니’와 ‘역설’이 존재하오! 소리친다. 흠집 하나 낼 수 없는 것들이다. 세계는 코웃음치며, “아름다운 그림과 시로구나.” 한다. 세계의 조각으로 ‘패치워크’된 우리들도 다를 바가 없다. 분명 울림이 있지만, 찰나일 뿐이고, 진실이 아니라 단지 ‘시’라서 그렇다고 믿는다. 결국 들끓는 우리의 욕망이 공든 탑을 무너뜨린다. 다 때려 부순다. 그리고 없었던 것처럼 잊는다. 우리의 과거는 수치였어. 누가 세상은 끝없이 발전한다고 했는가. 성장했다고 하는가. 우리는 안전을 도모한 만큼 ‘새로운 것’을 꿈꿔왔고, 감히 두려워서 가지 못했던 누군가의 희생이 강렬한 패러독스를 불러일으켰고 정설은 역설에게 깡그리 무너졌으며 변증법으로 태어난 새로운 공든 탑이 하나 둘 세워졌으며, 그렇게 늘 변화해온 것이 세계다. 발전이란 말은 그 시대에 입맛에 맞을 때야 비로소 ‘가장’ 발전한 시대, 라 명명할 수 있다. 


우리는 낯선 것들을 두려워했고, 그만큼 갈망해왔다.


우리는 왜 낯선 예술에 매료되는가. 정말 처음이라서일까. 낯선 곳에 여행을 가고, 낯선 사람들과 공동체 의식을 느끼고, 정말, 처음이라서일까.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을 모른다. 무의식 저편에서는 오랜만이야, 반갑다고 길길이 날뛰는데 우리는 처음이라서 그런 줄 안다. 우리는 ‘관념’으로 정돈되지 못했던 ‘감각’들을 마주했을 뿐이다. 우리가 늘 감지하고 있었지만 처박혀 있던 그것들이다. 세계는 단단하며 부술 수 없다는 억압 속에서 우리는 반란을 꿈꾼다. 모험을 꿈꾼다. 더 나아가 위험을 꿈꾼다. 욕망이 자꾸만 그곳으로 이끈다. 

불편한 일이지만, 우리는 자꾸만 관념에서 감각으로 흘러간다. 관념을 지우고 새롭게 감지하고 싶어 한다. 문학 속 암시적인 문구가 불편하지만 매력적이다. 전위예술은 불쾌하지만 아름답다. 이분법의 세계, 그 이전의 세상을 우리는 그리워하고 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는 펜 대신 돌도끼를 들고 있어야 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세계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과연, 누가 사회적 죽음을 불사할까. 불편하고 불쾌한 감정이 진짜라고 사회는 강요한다. 


“그래서 뭔 말이지? 한 줄로 요약해봐.”


다시 풀이해볼까.


“너는 사회적 약속을 어겼어. 언어는 정보이자 관념이야. 어서, 나에게 관념과 용어를 내놔. 나라를 잃은 슬픔, 비극적 사랑, 같은 말 말이야. 그게 말이야 방귀야? 그 냄새 불안하단 말이야. 왠지 알면 안 되는 걸 알 것만 같단 말이야.”


안녕, 걱정하지마. 너는 나를 알고 있어. 

늘 느끼고 있어. 다만 느끼는 걸 모를 뿐이야. 

모른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 아니야. 사실,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형용할 수 없는’ 것들은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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