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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꽁치 Dec 03. 2020

10. 꿈에 그리던 것을 가졌는가

나의 구원자, 식기세척기

10. 꿈에 그리던 것을 가졌는가10. 꿈에 그리던 것을 가졌는가10

서로 다른 분야에 종사하는 열 명의 낯선 사람들이 101일동안 101가지의 질문에 답합니다. 노드를 연결하고 세계를 넓혀가는 과정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이 프로젝트는 제법 사적인 형태로 시작되었지만, 우리만 보기 아까워 1010개의 답변 가운데 일부만을 브런치에 연재해 보기로 결정했습니다. 모임의 마지막 날에는 잔치라도 열어야 할 것 같아요. 읽어주시는 분들도 우리의 즐거움을 느껴주시기 바라며.



나는 설거지가 정말 너무 싫다. 너무너무 싫다. 아무리 싫다고 말해도 부족함이 없을만큼 싫다. 


음식 찌꺼기의 불쾌한 질감, 싱크대 앞에 섰을 때 비틀리는 골반의 감각, 흠뻑 젖은 티셔츠가 배에 달라붙을 때의 소름끼치는 축축함, 설거지를 끝낼 때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지독한 습진까지. 설거지를 좋아하기 위해 나는 생각보다 많은 노력을 해왔다. 향긋한 에코두의 민트식초 세제를 구비해두고, 기후변화에 대한 죄책감을 애써 모른척하며 일회용 수세미를 쓰고, 좋아하는 팟캐스트를 설거지 중에만 듣는 규칙을 만들고. 그래도 설거지는 여간 좋아지지 않았다.


추천/비추천 합니다


설거지를 하기 싫어 배달음식을 시켜먹는 미련한 에피소드가 반복됐다. 가구며 가전을 죄다 들어내고 대청소를 하는 날에도 설거지만은 미뤘다. 지금 이 순간 설거지를 끝내면 정신까지 맑아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끝끝내 설거지가 싫었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자책했다. 생활인으로서, 이렇게나 설거지를 싫어하다니, 난 쓰레기야... 



식기세척기를 장바구니에 담아놓고 갈등하던 날의 카톡


몇년 간 계속된 고등학교 동창의 식기세척기 예찬에 넘어간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어느 날 새벽 갑자기, "내가 이렇게나 하기 싫은 일에 왜 강박을 가져야 하지?" 라는 생각이 들었고, "설거지가 죽기보다 싫다는 걸 인정하자"는 이상한 결단을 하게 된 것이다. 다음 날, 곧바로 무설치 식기세척기를 들였다. 상상한 것에 비해 이 요망한 물건은 굉장히 저렴했고, 설거지 한 번에 물을 단 5리터만 써도 충분했다(손설거지 한 번에 평균 100리터의 물이 사용된다). 


나의 식기세척기를 의인화한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지? (출처: shutterstock)


이 친구를 들인지 일주일만에 나는 깨달았다. 인간보다 훨씬 깨끗하게 그릇을 닦고, 살균소독에 건조까지 뚝딱뚝딱 해내는 이 말도 안되는 기계는 식기세척기가 아니라 임을! 기계의 모습으로 인간 세상에 내려온 신, 그러니까 식기세척기는, 흡사 내 주방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였다. 




나는 이제 배달음식을 거의 시키지 않고, 그릇을 더럽힐 걱정 없이 여유롭게 요리를 하고, 접시를 넉넉히 사용해서 테이블을 세팅하고, 무엇보다 언제나 가정식을 챙겨먹는다. 수전은 언제나 반짝반짝 빛난다. 무슨 연유인지 냉장고 안도 깔끔해졌다. 열풍건조된 뜨거운 접시를 꺼낼 때의 상쾌함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알 수 없을 것이다. 꿈의 가전, 식기세척기를 들이시라. 설거지를 싫어하는 것은 당신의 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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