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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뜐뜐 Sep 27. 2021

연애_01

취기를 빌려

늦은 아침 침대에서 눈을 떴다. 전날 마셨던 술 때문에 아직까지 머리가 지끈거리고 어지러웠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방문을 나와 부엌 정수기로 향했다. 찬물 버튼을 누르고 컵을 꾹 눌러 물을 따르다 문득 생각이 났다. 맞다. 세상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어제와 다른 건 딱 한 가지 사실이지만 나의 세상은 송두리째 바뀌어버렸다. 어젯밤, 그녀에게 나의 마음을 고백했고 그녀는 그 마음을 받아주었다. 이 사실이 믿기지 않았고, 지금 현실이 꿈이 아니길 간절하게 바라는 마음이 있을 정도로 아직까지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다. 핸드폰을 조심스럽게 들고 저장된 그녀의 이름을 발견했다. 잠시 고민하다가 편집 버튼을 눌러 그녀의 이름 뒤에 조그만 하트 이모티콘을 넣어 주었다. 나는 이 정도 자격은 있는 사람인 것 같았다. 그리고 통화 버튼을 눌러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봤다. 신호음이 잠시 이어지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직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그녀가 나를 반겨주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나니 이제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허허 웃었고, 그녀는 왜 바보처럼 웃기만 하냐고 물어봤다. 정말 행복해서 나오는 바보 웃음이었다.




어젯밤 그녀에게 수줍은 고백을 하고, 그녀의 집 근처 이자카야에 갔다. 간단한 안주를 시키고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했다. 한두 잔 마시다 보니 테이블 위에 술병은 쌓여갔고, 술기운이 올라오니 그녀가 더 예뻐 보였다. 그리고 그녀가 여자 친구라는 것이 아직 까지는 믿기지가 않았다.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를 했다. 번쩍 정신을 차려봐도 그녀가 내 여자 친구라는 것에 변함이 없었다. 기분이 정말 이상했다. 어떤 기분이었는지 약간의 비유를 하자면, 대학 합격과 군대 전역을 합친 것보다 기분이 좋았다.


정신을 놓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늦어졌다. 자리를 정리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녀를 집으로 보내기가 아쉬워서  주변을 하염없이 걷기 시작했다. 쌀쌀한 밤공기가 주는 떨림과 술기운이 만나 그녀의 손을 감싸고 싶어졌다. 취기를 빌려 그녀의 손을 슬쩍 잡아봤다. 놀란 그녀는 웃었고, 나도 웃었다. 손가락을 깍지 꼈다가 손바닥으로 잡았다가 괜히 손이 작다며  크기도 재봤다가 다시 손을 잡았다가 갑자기 손금도 봤다가. 하염없이 반복했는데도 그녀의 가녀린 손은 질리지 않았다. 앞으로  손을 평생 놓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그녀  주변을  바퀴 돌았는지 모르겠다. 다리가 아파왔다. 노란 가로등 아래 컴컴한 나무 벤치에 앉았다. 새벽 시간이라 주변에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갑자기 그녀는  어깨에 머리를 기댔고,  심장은 정말 터질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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