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며 흐르는 것」 상영작 리뷰와 아트포스터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할 수 있을까? 「움직이며 흐르는 것」의 단편영화 4편은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시간의 흐름과 그 속에서 묻히고, 잊혀진 감정에 주목한다. 옛 사진을 들여다보며 과거를 현재로 불러오는 김아현 감독의 <기념사진>부터, 삶에 영원한 것은 없다고 하듯이 담담히 나아가는 일상을 보여주는 윤지혜 감독의 <목요일>, 군대의 정형화된 생활에서 민간 생활로 돌아오며 드는 미묘한 감정을 확장시킨 박재서 감독의 <전역>, 그리고 오로지 ‘지금’에 집중해보지만 엄습하는 ‘나중’의 불안을 표현한 이성욱 감독의 <아이스>까지, 관객은 시간의 비선형적인 흐름을 여러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평범해 보이는 우리의 일상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 풍경, 기억을 담아낸 결코 평범하지 않은 각 감독만의 실험적 연출방식이 돋보이는 섹션이다.
사진첩을 열어 과거에 멈춰 있는 이들을 한번 불러본다. 언제, 어디서 찍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한, 카메라를 바라보며 웃는 여러 얼굴들. 또 어렴풋이 떠오르는 그날의 감정. 누구나 한번 쯤은 옛 사진을 들여다보며 향수에 잠길 때가 있다. 김아현 감독의 <기념사진>은 오랜만에 추억을 되짚어 보려할 때의 뒤엉킨 기억을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사진의 일부분만 드러나는 정사각형 조각들은 감독의 시선 아래 늘려졌다, 확대되고, 반복되며 유려한 리듬을 취한다.
소리는 없지만 머릿속은 요란하다. 기억들이 어둠 속 번쩍이는 불빛과도 같이 불현 듯 떠올랐다 사라진다. 누구 한 명을 각인시킬 여유도 없이, 지난날 회상한 얼굴들은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에 흩어져버린다. 우리가 살면서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들 중, 우리 기억에 새겨진 이는 몇 명이나 될까? 2분도 채 안 되는 시간동안 빠른 속도로 흘러가는 영화는 사진의 주인에게만 전해질 특정한 추억을 흐릿하게 만든다. 마치 나의 추억을 투영할 수 있는 여백을 만들어주는 것처럼. 눈앞에 스쳐가는 타인의 추억에서, 나는 내 사진첩을 빠르게 넘겨보며 지난 시간에 멈춰있을 이들을 떠올려본다.
감독은 잠시 머문다. 망설이는 걸까? 확신이 가득하던 움직임은 어느 엄마 품에 안겨있는 어린아이의 사진에 멈춘다. 카메라를 넘어 관객을 응시하는 사진 속 두 사람은 오늘 어떤 모습일까 상상해보며 숨을 고른다. 나아가는 시간의 흐름 앞에 한결같은 인연이 있을까? 지난날을 기념하는 사진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때의 감성을 현재로 이끌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되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 전하는 아련함에 잠시 사무친다.
머무름도 잠깐, 지나온 세월의 파편들이 다시 눈앞에 어른거린다. 삶에 빨리 감기를 한 듯한 실험단편 <기념사진>은 과거, 현재, 미래를 일제히 넘나드는 시간의 잔물결을 담아낸다.
(디펜더스 리뷰단 류다연)
목요일은 좋지도 싫지도 않은 일주일의 중간 즈음이다. 주 중의 피로가 쌓여 있지만 다가올 주말이 기다려지는 그런 날. 주말이 지나면 목요일은 어김없이 반복된다. 영화의 초반부, 소정은 말한다. “매번 이렇게 헷갈리는 것들이 있다. 오늘도 까먹어버렸지만. 기억해야 한다.” 소정과 명호는 흘러가는 일상에 제동을 걸며 묻는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보조 강사 소정은 일자리를 잃고 방황한다. 그녀는 착잡한 마음을 뒤로하고 묵묵히 걷지만, 카메라는 그 목적지가 어디인지 보여주지 않는다. 명호는 형의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식당 문을 닫는다. 텅 빈 장례식장, 고독한 마음에 전화를 해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빚 독촉뿐이다. 직장을 잃은 소정과 가족을 잃은 명호. 일상을 지탱하는 것을 상실한 그들이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버려진 콘크리트 구조물이다. 자동차가 바쁘게 움직이는 도심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는 건물은 뒤섞인 감응을 불러일으킨다. 미완성된 건물은 반듯한 사각형의 골조가 반복된다. 비어 있는 내부는 찰나의 바람이 스쳐 지나갈 뿐 쓸쓸한 정념이 맴돈다. 두 남녀는 답답하면서도 공허한 자신의 일상과 닮은 건물에 자연스럽게 끌린다.
구조물은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도피처라기보다는, 일상으로 다시 걸어가기 위한 휴식처다. 사방이 뚫린 풍경을 바라보며 그들은 지친 마음을 태워 버린다. 그리고 다시 일상의 흐름에 탑승하고자 한다. 물론 실패할 때도 있다. 늘 담담하게 걸어가던 소정은 시끄러운 기차 소리에 일순간 무너져 버리고, 명호는 어머니 몰래 참았던 눈물을 토해낸다. 야속하게도 기차는 탑승에 실패한 승객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에 소정은 “길을 잊어버려도 괜찮아요.”라고 말한다. 처음과 마지막 독백은 얼핏 상반되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일상은 흐르는 동시에 반복된다. 수요일이 지나면 목요일이 있고, 목요일은 다시 돌아온다.
따라서 우리는 흐르는 일상 속에서 잠깐 길을 잃어버려도 괜찮다. 소정과 명호는 다시 올 기차에 탑승하기 위한 준비를 한다. 황량한 건물에 올라 담배를 태우곤 현재의 좌표를 상기한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힘없이 묻는 평범한 말이지만 그 속에는 약간의 단단함이 느껴진다. 교차하며 엇갈리던 두 남녀는 영화 말미 콘크리트 구조물에서 마주하지만, 별다른 눈빛과 대화를 주고받지 않는다. 윤지혜 감독은 지극히 평범한 배경에, 지극히 평범한 남녀를 등장시켜 일상의 표면을 드러낸다. 감독은 지루한 일상의 흐름을 자조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오히려 반복되며 흐르기 때문에 내일을 살아갈 수 있는 일상의 희망을 발견한다. 제목과 달리 영화는 “수요일이요.”라는 대사로 끝난다. 이것이 당연하게 다가올 목요일이 기다려지는 이유이다.
(디펜더스 리뷰단 이지원)
박재서 감독의 <전역>은 군복과 전역모를 착용한 채 어딘가를 향해 뛰어가는 남자를 줄곧 보여준다. 남자는 불안한 표정을 하고서 힘겹게 길가를 달린다. 움직이는 그의 몸에 맞춰 덩달아 흔들리는 카메라와 영화 전반을 감싸는 의뭉스러운 색소폰 소리는 남자의 불안한 감정을 한결 깊숙이 전달한다. 하지만 영화가 노정하는 것이 불안이라는 감정 그 자체만은 아닌 듯하다. 박재서 감독은 불안이 생성되는 기원을 포착한다. 좀처럼 형용할 수 없지만 그것은 몸 구석구석을 휘몰아치는, 소생된 시간의 공격이다.
이는 <전역>이 기록된 방식, 즉 8mm 필름의 물질성에 의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거친 입자와 긁힌 질감이 잔뜩 느껴지는 필름 위에서 ‘현재’라는 시간의 고정된 주소는 희미하다. 남자의 굳게 닫힌 얼굴을 뚫고 나타나는 검은 잡티와 빛샘 현상은 마치 현재를 침범하는 과거와 미래의 흔적처럼 보이기도 한다. 필름의 거친 흔적이 불규칙적으로 반복되며 화면을 어지럽힐수록, 틈입한 시간은 빠르게 그의 몸을 떠돌고 남자의 표정은 어두워진다.
그러다 <전역>은 시간의 경계가 완전히 사라진 순간에 도달한다. 카메라는 달려가는 남자를 긴박하게 담아내다, 종국에 그의 흔들리는 얼굴을 클로즈업해서 정면으로 비춘다. 빠르게 움직이는 그의 얼굴이 오랫동안 화면을 꽉 채운다. 하지만 움직임이 뚝뚝 끊기는 8mm 필름의 한계 속에서 격렬히 요동치는 카메라의 운동 때문에 그의 얼굴은 점차 ‘흔들리는’ 것을 탈피하기 시작한다. 하나의 움직임이 찰나의 순간들로 쪼개지며, 지금의 얼굴은 곧 수많은 순간들 속 다양한 얼굴들로 변모한다. 그렇게 <전역>은 시간의 경계를 초월해 남자가 이미 겪었거나 앞으로 겪을 여러 순간들을 모두 현재로 호명한다. ‘전역’이라는 중요한 갈림길 앞에서 소환된 그 모든 시간이 동시에 그의 몸속을 침범한다.
(디펜더스 리뷰단 이준혁)
붕 떠 있는 기분이 들었다. 흑백의 장면들 속 들려오는 파도소리와 전자음악, 그리고 승진과 태윤 사이를 오가는 행복과 사랑, 두려움을 표하는 말들. 어떠한 트랜스에 빠져 영화를 본 것 같다. 불안정한 쾌락 속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두 인물의 이야기를 그린 이성욱 감독의 단편영화 <아이스>는 적당함과 그 경계를 넘어설 때 드러나는 사랑과 행복을 묻는다.
아직 학생인 태윤은 이제 막 약물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승진은 오래된 마약중독자이다. 둘은 마약과 관계를 맺는 것 외에는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아니, 알 수 없다. 그렇게 해야만 언제 어디서든 엄습하는 억압의 그림자에서 자신과 서로를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승진은 휴게소에서 담배 피우는 남자를 경찰로 착각하고, 자신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아직도 좋은 거 하세요?"라며 아는 척 하는 직원에게서 도망치려 한다. 감독은 이 인물들을 한 배우로 통일해 약물에 의한 승진의 환각처럼 장면을 표현한다. 이로써 승진의 불안감을 극대화시키고 관객도 혼돈에 빠트린다. 승진에게서 구속과 쾌락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빛과 그림자가 되어 자신의 위태로운 삶을 매일매일 직면하게 만든다. 반면, 태윤은 마약이 주는 쾌감 앞에서는 죽음도 무섭지 않다. 삶에 대한 상반된 태도를 가진 둘 사이 유지되는 적당한 거리. 각자의 과거를 공유하지도, 함께 이뤄나갈 미래를 약속하지도 못하는 이 적당한 거리에서 그들은 스스럼없이 자신의 두려움을 드러내며 지금이 가져다주는 행복을 충분히 만끽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승진과 태윤은 나중의 불안을 뒤로 한 채 새벽 바다를 바라본다. 태윤은 피우던 담배꽁초를 모래에 꽂아 기도 한다, “오래, 오래 살게 해 달라고.” 영화에서 여운이 깊게 남는 장면이다. 승진과 태윤 같은 약물중독 게이 남성들은 에이즈 노출에 가장 취약하다. 감독은 한국 산업영화에서 흔히 다루지 않는 이 취약성을 파격적이면서도 진실된 일탈의 장면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두려움에 쫓겨도 헤어 나올 수 없는, 이들의 운명을 뒤덮는 수많은 위협과 순간순간의 낙관을 향해 감독은 응원의 메시지를 전한다. 중독과 불안, 그리고 그 사이, 사랑과 행복. 자신만의 진정한 행복과 사랑을 찾기 위해, 혹은 지키기 위해 살아가는 청춘들에게 태윤은 속삭인다, “최대한, 적당히, 오래.”
(디펜더스 리뷰단 류다연)
2020년 10월 26일 인디펜던시아2020 섹션 1 상영회 / BNK부산은행아트시네마 모퉁이극장
이지원 - "영화와 미술과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영화를 보면 늘 가슴이 벅찼습니다. 네모난 화면 속에 사랑과 우정, 꿈과 희망, 슬픔과 그리움이 담겨있다는 것이 참 아름답고 신비로웠다고 할까요."
이준혁 - "미디어를 전공하지만 어쩌다보니 영화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살고 있습니다. 영화를 온통 설명해버리는 말끔하고 선형적인 글보다, 영화의 다층적인 감각을 전하는 울퉁불퉁한 글을 쓰고 싶습니다.”
류다연 -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보아도 자신만의 세계관으로 영화를 해석하는 것처럼 굉장히 주관적일 수 있는 영화 리뷰를 많은 분들과 공유하며 함께 생각을 나눌 수 있는 기회에 감사합니다."
다가오는 목요일 (10/29) 김정근 감독의 장편 <언더그라운드>이 인디펜던시아 섹션 2: 「노동과 기계의 빛」에서 상영됩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모퉁이 극장 SNS (블로그,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에서 확인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