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펜던시아 섹션3: 「불안의 빛」

「불안의 빛」 상영작 리뷰와 아트포스터

by 모퉁이극장

「불안의 빛」에서는 삶에 존재하는 다양한 불안을 표현한 네 편의 단편영화를 연결한다. <평범한 사물들의 인내심>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안에서 요동치는 심리 사이의 미묘한 간극을 사물을 통해 바라본다. <시발, 영화>는 욕이 절로 나오는 각박한 현실 속에서도 놓을 수 없는 영화라는 꿈의 시발점을 돌아보는 다큐멘터리다. 앞선 두 영화가 개인의 불안을 다루었다면, <네번째 여름>은 누군가의 죽음으로 발생한 여러 인물의 죄책감이 맞닿는 지점에 주목한다. 마지막으로 <보담>은 인간의 이기심이 초래한 불안 속에서 자연과 공생을 도모하는 중년 남성의 삶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네 명의 감독이 각자의 방식으로 그려낸 불안 속에는 그들이 갈망하고 염원하는 다양한 색깔의 빛이 희미하게 자리하고 있다.

아트포스터 by 디펜더스 디자인팀 신가영

<평범한 사물들의 인내심> : 어느 기묘한 하루


이유빈 감독의 <평범한 사물들의 인내심>은 독립서점에서 알바생으로 일하는 양희의 기묘한 하루를 따라간다. 미디엄 롱 샷보다 더 멀어지지 않는 카메라 속 등장인물들의 표정과 행동과 말에 집중한다. 영화는 음악을 들으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양희의 모습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남자친구의 등장과 함께 카메라는 서서히 양희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나란히 앉아 햄버거를 먹지만 버거에 뭔가 묻었다고 하며 뭔가 혼란스러워진 표정의 양희와 프레임 밖에서 막내작가가 야채만 뺀 버거를 촬영팀에게 나눠주고 사라졌다는 남자친구의 생뚱맞은 이야기까지. 그녀의 하루는 점점 기이한 흐름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양희는 셔터가 닫힌 가게 앞에 서 있는 행인을 별다른 이유 없이 잠시 쳐다보고 서점에서 청소와 손님맞이를 한다. 카메라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하루 일과를 핸드-헬드 기법으로 담아내며 어딘가 불안정해 보이는 양희의 내적 감정을 극대화한다. 남자친구, 서점 사장님, 미국 시인 팻 슈나이더의 시집을 찾는 손님, 그리고 서점에서 주체하는 ‘문학의 밤’ 멤버들이 흔들리는 카메라 앞에 순차적으로 등장한다. 이미 타인을 다 알고 있다는 식의 눈빛, 타인의 말을 무시하고 자신의 이야기만 하기 바쁜 입들, 정확한 목적을 알리지 않은 채 서성이는 존재 사이 양희는 자신을 드러내려 애쓰지 않는 듯하다. 반면 영화 속 모든 교류의 시작은 어떠한 사물의 존재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비롯된다. 양희가 좋아하는 인테리어용 병, 심부름으로 가져온 인쇄된 책, 시집, 혹은 포장지처럼 인간의 삶에서 부차적인 ‘소품’들을 중심으로 관계들이 움직인다. 다소 이질적으로 다가올 수 있는 장면들의 연속에서 양희가 느끼는 일상의 미묘한 불협화음만은 확실히 전달된다. 그러다 카메라의 떨림은 잠시 멈춘다. 고정된 카메라의 중앙에 위치한 양희는 자신에게 속삭이듯 슈나이더의 <평범한 사물들의 인내심>이라는 시를 읊어본다.


슈나이더는 찻잔, 의자, 바닥, 신발, 옷장 등 사람의 안식처를 채우는 흔한 물체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사랑을 깨닫는다. 그는 글에서 사랑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묵묵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일상의 사물들을 향한 슈나이더의 깊은 통찰력처럼 양희는 눈에 띄지 않았던, 혹은 크게 생각하지 않았던 사소한 인간관계의 부조화를 직관한다. 양희는 다양한 사물과 사람이 공존하는 공간 안에서 자기주체성에 대한 임계점에 다다른 듯 이 시가 적힌 페이지만 책에서 찢고 사라진다.


(디펜더스 리뷰단 류다연)




<보담: 더 나은 삶을 살아라> : 도심 속 경계를 무너뜨리는 작은 빛


오늘도 도심 어딘가에서 낡은 건물을 허물고 새로운 건물을 짓는 행위가 반복되고 있다. <보담 : 더 나은 삶을 살아라>는 재개발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은 고양이와 중년 남성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다. 고양이를 돌보는 그는 재개발로 인해 가족과 흩어져 홀로 지내고 있다. 남자는 양손 가득 먹이를 들고 과거가 조각나버린 공간으로 발길을 향한다. 도심 속 드넓은 공사장은 천막으로 둘러싸여 보잘것없는 모습을 감추고 있다. 구기현 감독은 ‘개발’이라는 글자 뒤에 숨은 파괴와 와해의 이면을 드러낸다.


공사판의 암흑에서 남자가 의지하는 것이라곤 희미한 헤드라이트 불빛 하나다. 관객은 빛을 상실한 공간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가늠할 수 없다. 이와 대조적으로 공사장 너머 우뚝 솟은 아파트 단지는 수많은 불빛을 내쏘고 있다. 환하게 빛나는 위 공기와 어두컴컴한 아래 공기. ‘개발’과 ‘재개발’은 한 끗 차이지만, 그 차이가 만들어낸 도심 속 경계는 너무도 선명하다. 헤드라이트의 옅은 불빛은 차가운 경계를 지우려는 듯 어둠 속을 이리저리 헤집는다. 이윽고 불안하게 움직이던 빛은 인간이 잊고 살아가는 생명의 존재를 따듯하게 비춘다. 공존을 위한 빛의 움직임을 따라가다 보면, 화면을 가로지르는 도심의 경계가 무색하게 여겨진다. 한참 동안 경계를 응시하던 카메라는 서서히 도시의 민낯을 벗겨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화면에 파괴와 와해의 흔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누군가의 삶과 기억이 부서지고 난 파편. 그 파편은 콘크리트, 돌덩이, 파이프, 쓰레기 등의 잔해로 처연하게 남아있다. 인간의 욕심과 이기심이 만들어낸 날카로운 조각은 고양이들에게 또 다른 상처를 남길 뿐이다.

도시 발전이라는 거대한 이유로 산산조각이 나버린 개개인의 삶을 보고 있으면 이런저런 의문이 든다. 개발은 누구를 위한 것이며, 그 속에서 희생당하는 존재들을 우리는 인식하고 있는가. 감독은 무분별한 재개발의 폭력성을 직접적으로 논하기보다는, 중년 남성과 고양이의 짧은 이야기를 통해 넌지시 드러낸다. 어쩌면 고양이도 정든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고 싶지 않은 건 아닐까. 영문도 모른 채 삶의 터전을 빼앗긴 것이 억울할지도 모른다. 똑같은 아픔을 겪었기에 남자는 상냥한 목소리로 천천히 고양이를 대피시킨다. 고양이를 안전한 곳으로 유인하고 황량한 공사장을 홀로 가로지르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그가 어둠 속에서 만들어낸 불빛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생각해본다. 여러 개의 작은 빛이 모인다면, 그 빛은 ‘더 나은 삶’을 향한 선명한 길잡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디펜더스 리뷰단 이지원)




<네 번째 여름> : 여름이 토해내는 케케묵은 감정


수경은 아들 진우가 죽고 네 번째 여름을 맞이한다. 진우의 친구 경오가 출소하기 하루 전, 형사 희원은 수경의 집을 찾아온다. <네 번째 여름>은 죽음을 둘러싼 여러 인물의 죄책감이 맞닿는 지점에 주목한다. 영화 속 인물을 짓누르는 복합적인 감정은 다양한 감각의 형태로 구현되어 나타난다.


영화의 배경은 매미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무더운 여름날이다. 바깥세상은 생명력을 뽐내는 기운찬 소리로 가득한데, 수경의 집은 적막만이 흐른다. 계절감을 상실한 그 집에는 죽음의 기운이 농후하게 맴돈다. 죽은 진우의 방은 시간의 흐름을 거부한 채 시린 겨울의 풍경을 하고 있다. 아들의 체취가 사라지는 것이 두려웠던 걸까, 아들이 더 이상 그 방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걸까. 외풍을 막기 위해 창문에 붙인 뽁뽁이는 제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외부의 소리와 공기가 차단된 진우의 방은 상실의 지점에 멈춰 있는 수경의 삶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관객은 수경과 형사의 짧은 대화로 진우의 죽음이 친구 경오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 정도만 파악할 수 있다. 영화는 플래시백으로 과거 회상 장면을 삽입하지 않는다. 그저 현재 남아있는 사람들의 숨 막히는 감정을 카메라에 묵묵히 담아낸다. 인물을 클로즈업한 화면을 보고 있으면, 죄책감과 원망이 얽히고설킨 감정의 무게감이 촉각적으로 다가온다. 수경은 지난날의 원망을 뒤로하고 출소하는 경오를 위해 하얀 두부를 만든다. 두부 틀에 압력을 가해 찌꺼기를 걸러내는 행위는 경오를 향한 얼룩진 감정을 깨끗하게 쥐어 짜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어서 수경은 진우의 방문을 열어 방안을 빽빽하게 메우던 죽음의 기운을 살포시 내보낸다. 열린 창문 사이로 깃든 매미 소리와 여름의 공기가 조금은 시원하게 느껴진다.

여름이 강렬한 햇빛과 시끄러운 매미 소리를 발산하듯 수경과 경오는 케케묵은 감정을 털어놓는다. 수경은 술에 취해 진우를 구타했던 과거를 실토하고, 묵묵히 두부를 먹던 경오는 별안간 정적을 깨며 자신을 짓누르던 죄책감을 기침으로 토해낸다. 몇 년 동안 나누지 못했던 진우를 향한 무수한 감정들은 네 번째 여름이 되어서야 세상 밖으로 고개를 내민다. “이제 뭐 할 거니?” 수경이 경오에게 던진 질문은 스스로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각자의 길을 걸어가며 교차하는 수경과 경오는 그들을 옥죄였던 아픈 기억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진 것 같다. 수경은 여전히 혼자 술을 마시고, 경오는 이따금 숨이 막혀 올 테지만, 그들의 무거운 발걸음은 다음 계절을 향하고 있다. 다가올 다섯 번째 여름에는 수경의 집에도 따가운 햇볕과 시끄러운 매미 소리가 가득했으면 좋겠다.


(디펜더스 리뷰단 이지원)




<시발, 영화>: 대담하고도 사려 깊은 영화적 시도


극중 권혜린 감독은 자신의 첫 영화에 대해 “영화라고 만들었는데 영화가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 그가 당시 <시발, 영화>를 제작하고 있었음을 고려한다면, 이 나지막한 말은 곧 그가 <시발, 영화>를 ‘영화’로서 만들기 위해 쏟았던 고민을 상상하게 한다. 그리고 이 영화는 다름 아닌 그 고민과 노력이 깃든 결과일 것이다.


권혜린 감독은 자신의 삶에서 ‘영화’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자신과 가족, 영화 간의 관계를 찬찬히 돌아본다. 그러나 그 관계에는 뭐 하나 딱 떨어지는 것이 없다. 서로 기구하고도 단단히 얽혀있는 듯하다. 영화를 향한 감독의 열망은 그의 현실을 더 위태롭게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가 현실을 버티기 위해선 더더욱 영화가 필요하다. 감독이 처한 험난한 상황의 중심에는 굴절된 가부장이었던 아빠의 그늘이 깊게 서려있지만, 결정적으로 자신이 영화에 빠지게 된 계기의 중심에도 ‘아빠’가 자리 잡고 있다. 그의 첫 영화 <할머니 로>에서 할머니를 피해왔던 날들에 대한 상념은 <시발, 영화>에서 ‘가족’에 대한 것으로 확장되며 여전히 소용돌이친다.

그러나 감독은 이 복잡한 형태로 뒤엉킨 자신의 세계를 애써 풀어헤치려 하지 않는다. 대신 불안의 기억을 매듭지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 자신의 진솔한 마음을 고스란히 내어놓는다. 용기를 내 <할머니 로>를 할머니에게 보여준 후 같이 비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고, 아빠에게 안부를 묻고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함께 <베를린 천사의 시>를 틀어본다. 그리곤 이 만남을 생채기가 난 가족의 기억들, 영화를 향한 자신의 꼿꼿한 다짐들과 섬세하게 중첩시킨다. 꾹꾹 눌러놓았던 마음을 느리게 토해내면서, 담배를 피며 수도 없이 불안과 고민에 잠겼던 감독 자신의 모습을 반복하면서 <시발, 영화>는 진귀한 리듬을 형성하고 영화의 진정성은 빛을 발한다.


영화 말미 감독은 아빠와 함께 노래방을 향하고, 이 장면 속으로 <베를린 천사의 시>의 사운드를 투입한다. <베를린 천사의 시>는 자신을 영화의 길로 빠지게 만든 남다른 의미의 영화다. 이 소중한 영화와 자신의 삶에 붉은 솜을 피웠던 아빠의 이미지를 결합한 감독의 의도를 감히 추측할 수는 없지만, 이 장면은 분명 기묘하고도 숭고한 기운을 자아낸다. 노래방의 빨간 조명이 초라한 담배꽁초와 아빠의 흔들리는 얼굴 위로 끊임없이 일렁거릴 때, 불안과 위로의 붉은 빛 아래 부녀가 적당히 떨어진 채로 함께 노래를 부를 때, 이제는 결연해진 감독의 마음이 불쑥 다가온다. 바꿀 수 없는 자신의 역사를 포용하려는 그의 존엄한 태도가 문득 깊게 사무친다. 이 대담하고도 사려 깊은 영화적 시도에 마음이 떨린다. <시발, 영화>는 정말로 ‘영화’다.

(디펜더스 리뷰단 이준혁)


2020년 11월 3일 인디펜던시아2020 섹션 3 상영회 / BNK부산은행아트시네마 모퉁이극장



필진 소개

이지원 - "영화와 미술과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영화에 한 발짝 다가설 때, 영화도 저에게 한 발 짝 다가오는 그 느낌이 참 좋습니다."


이준혁 - "미디어를 전공하지만 어쩌다보니 영화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살고 있습니다. 영화를 온통 설명해버리는 말끔하고 선형적인 글보다, 영화의 다층적인 감각을 전하는 울퉁불퉁한 글을 쓰고 싶습니다.”


류다연 -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보아도 자신만의 세계관으로 영화를 해석하는 것처럼 굉장히 주관적일 수 있는 영화 리뷰를 많은 분들과 공유하며 함께 생각을 나눌 수 있는 기회에 감사합니다."




다가오는 목요일 (11/5) 오민욱 감독의 장편 <해협>이 인디펜던시아 섹션 4: 「혼령의 여정」에서 상영됩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모퉁이 극장 SNS (블로그,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에서 확인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