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영
* 이 글은 영화 <중경삼림>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나는 1994년의 홍콩을 모른다.
내가 아는 그 시절의 홍콩은 오직 <중경삼림> 속의 모습이 다인데, 나는 왜 그 시절의 홍콩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밤거리의 네온사인, 어디든 빽빽한 빌딩 숲, 어둡고 낙후된 경관, 바글바글한 사람들 그 속의 고독한 홍콩 사람들. 찾고자 한다면 한국에서도 찾을 수 있는 모습들이다. 하지만 겉이 같다고 속이 같은 것은 아니니까.
우리는 가질 수 없는 것들을 소망한다. 그리고 가질 수 없기에 집착하게 된다. 왕가위 감독이 담은 <중경삼림> 속의 홍콩은 비단 시간이 지나서만이 아니라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이다. 그래서일까 나도 내가 이해하지 못할 만큼 집착스러운 경향을 보인다.
<중경삼림 리마스터링>이 개봉했을 때 내가 보지 못하는 시간대에 포스터를 증정하는 이벤트를 했다. 그래서 나는 동생에게 영화 보고 포스터를 받아오라는 부탁 같은 강요를 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중경삼림 오리지널 티켓을 증정하는 이벤트가 있었는데, 메가박스 부산대 지점까지 1 시간가량 걸려 도착했지만 소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사실 귀차니즘이 지배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움직이기 귀찮아하는 인간이라 평소 같았으면 ‘어쩔 수 없지, 못 가질 운명이었나 봐.’ 이런 식으로 포기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그 종이 쪼가리를 위해 나는 아직 그 증정품이 남아있다는 양산 메가박스까지 가서 기어코 두 장을 받아왔다. 영화를 보고 나오니 저녁이었고, 집으로 돌아오는 데만 거진 두 시간이 걸렸다.
나도 이해할 수 없는 나의 이 <중경삼림>을 향한 욕심. 무엇일까?
만약 여행이 자유로운 시기였다면 나는 아마 이 욕심을 홍콩 여행에 쏟아 부었을 것 같다. '왕가위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덕후 여행'이라는 테마로 아주 하고 싶은 대로 다녔을 터인데 그러지 못해서일까. 홍콩에 가지 못하는 그 마음을 물욕으로 채우고 있다는 생각이 요즘 자주 든다. 마침 오늘 지난달에 예약 주문한 왕가위 박스 세트가 출고됐다고 한다. 아마 이 박스 세트가 집에 도착한다고 해도 내가 이 영화들을 다 틀어보는 데는 몇 년의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리고 이미 나는 왕가위의 영화 블루레이를 몇 개 가지고 있기도 하다. OTT 서비스마다 왕가위의 작품이 없는 데가 없는데도 왜 나는 이런 물질적인 소유를 하려 하는 걸까.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약간 씁쓸하기도 하다.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먹어본 외국 음식은 런던에 가기 위해 몇 시간 경유했던 홍콩 공항에서의 맥도날드 햄버거이다. 사실 원해서 먹은 것도 아니고 동생이 워낙 햄버거를 좋아해서 끌려가듯 아무 생각 없이 먹었던 식사였는데, 이상하게도 그 식사의 기억이 선명하다. 억지로 끼워 맞춰보자면 홍콩이 그만큼 나에게 강렬한 기억을 남겨준 곳이라 얘기하고 싶다.
왕가위 감독들의 영화는 내러티브가 약하다는 소리를 종종 듣는다. 하지만 감독의 영화를 사랑하는 나는 내 상상력으로 그 내러티브를 완성해나간다. 그리하여 나에게 있어서는 왕가위 감독의 영화들은 내러티브가 꽤나 좋은 영화로 남게 된다.
<중경삼림> 역시 내러티브가 있다고 할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감정의 순간들이 혼재해 있는 영화이다. 영화는 두 에피소드로 구성되어있는데 연결고리가 영화 속에 심심찮게 나온다. 이런 점들 때문에 이 영화는 n차를 하는 매력이 있다. 정말 아는 만큼 또 보이거든. 나는 작년에 이 영화를 운 좋게 영화의 전당에서 야외 상영으로 볼 수 있었다. 무덥던 여름날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이 영화를 보고 영화의 엔딩곡인 '몽중인'을 흥얼거리며 영화 이야기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캘리포니아 드리밍을 들었던 기억이 또 생생하게 떠오른다.
결국 나는 이 영화를 놓지 못하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