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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퉁이극장 Oct 28. 2022

파란 슬리퍼와 슬픔의 색채

영화 <중경삼림>을 보고 작성한 에세이 입니다.

서하나

울고 있는 방을 상상한 적이 있다. 슬픔이 수돗물처럼 콸콸 발목을 적시고 흥건해진 타일 바닥 위로 떠나간 옛 연인의 파란 슬리퍼가 쇼파 밑에서 밀려 나오는 광경. 이만하면 잊을 준비가 되지 않았냐는 질문. 그 질문의 색깔은 낡고 파랗고 싸구려다. 습한 홍콩의 여름처럼. 청킹맨션의 일부처럼. 663은 사랑하던 연인과 함께하던 공동의 공간에서 홀로 남아 조개껍데기 속 상처마냥 진주로 영글어 간다. 상처는 방을 돌볼 줄 모른다. 같이 상처받은 줄 아니까. 찢어진 수건과 뿌옇게 변한 수조와 홀쭉해져 가는 비누. 기분을 반영하는 거울처럼 공간은 슬픔을 가두고 있다. 그 공간을 찢고 들어가는 사람. 페이. 경찰관의 집을 무단 침입하는 이 대담한 범죄자의 얼굴은 캘리포니아의 그것처럼 맑고 부시다. 파란 슬리퍼의 색채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 


내게도 이별 뒤에 남은 신경 쓰이는 물건이 하나 있다. 돌려주기 위해 마주치려는 수고를 감수할 용기도, 그냥 버릴 수도 없는 물건. 그때는 꽤나 비싼 기종의 캐논 카메라. 기억처럼 무거운 카메라 가방이다. 통째로 내게 남겨진 사물. 그걸 아직 가지고 있다. 헤어지기 전에 그는 이별을 미리 예감했던 것도 같은데 왜 나에게 이 묵직한 것을 남겼을까. 왜 나는 당장 돌려주지 못했을까. SD 메모리 카드에 남아 있는 우리의 기억 같은 것들이 두려워서 열어보지도 못한 채 카메라는 오롯이 시간의 더께를 뒤집어썼다. 가방을 열어보면 먼지 냄새가 난다. 우리가 함께했던 날들의 입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지금도 사진 찍는 걸 좋아한다. 기억을 영사하는 순간의 기분과 셔터음. 함께 느껴지는 현존감이 좋다. 너는 사진 찍는 걸 좋아했을까. 중경삼림을 볼 때마다 연속하는 필름카메라의 잔상을 느낀다. 번져나가는 색감과 빛들이 은의 입자처럼 부드럽다. 필름처럼 나오는 디지털카메라가 가지고 싶어. 사진을 아주 잘 찍고 싶어. 나의 대사는 독백처럼 무의미했는데 너에게는 특별했을까. 지금에 와서야 알게 되는 것들. 비참한 기분으로 울고 있는 방을 상상한다. 카메라가 가두어진 방. 끊임없이 우리가 영사되는 방. 


663이 사랑했던 스튜디어디스는 샐러드와 피쉬앤칩스 중 정말로 좋아한 게 있긴 했던 걸까. 카메라 가방을 정리하며 663의 사랑을 생각한다. 쓸쓸하고 도무지 갈피를 잡기 힘든 미소를 생각한다. 과밀한 도시인의 표정을 나도 짓고 있을까. 나는 너 대신 다른 사람을 선택하고 불행했다. 인생에 그보다 더한 불행은 없었으며 다시는 그따위 불행은 찾아오지 않기를 기도할 만큼 불행했다. 시차가 있는 곳에서 이제는 완연히 다른 생을 겪어내고 있을 너를 생각하며 카메라 가방의 지퍼를 채운다. 다시는 돌려줄 수 없는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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