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타먼더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힘 himi Nov 08. 2020

"캔 아 키스 유?"-2

안 된다고 이놈아   [성교육과 피임-에이섹슈얼의 경우1]

*본문에 등장하는 Glen이라는 이름은 'Jingle Balls'라는 슬랭으로부터, '은별'은 저의 별명인 '작은 별'에서 따온 가명입니다.


17살 때였나. 기술가정 시간이면 유난히 촉촉해진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선생님이 있었다. 그 분은 피임의 중요성을 정말 열심히 피력하신 것에 비해 딱히 피임법을 알려주지는 않으셨다. 다만 한 가지, 사후피임약에 대해 스치듯 설명했었다. 외국에는 사후피임약이라는 게 있는데, 성관계 후 하루 안에 먹으면 거의 100% 피임이 되기 때문에 청소년의 원치 않는 임신을 막아준다고. 우리나라에서는 구하기가 쉽지 않아 안타깝다.... 고 했는데 여기 외국이잖아!


입고 있던 옷에 좀 더 두꺼운 옷을 대충 걸치며 제일 가까운 약국을 검색했다. Glen에게 보여줬던 '피임' 검색 기록을 그대로 보여줬다. 외국인이라서 안 준다거나 다른 절차를 요구할 까 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Please..."라고 했던 것도 같다. 약사는 이내 알아들으셨는지 약을 주었다. 그걸 받아 들고 숙소로 걸어가자니 그제서야 추위가 느껴졌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어어디 가암히 문란하게 외국인이랑 놀아난 주제에 눈물을 흘려~~??!!" 내 안의 유교걸이 그렇게 호통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약을 먹었다. 24시간 안에 복용하면 피임 성공률이 거의 100%라는데, 나는 이미 48시간이  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에 성공률은 85% 떨어져 버렸다. 나머지 15% 기도빨로 채워야겠다고 생각하며  손을 모으려니 Glen 다가왔다. . .


"나 입으로 한 번만 해주면 안 돼?"

"나 할 줄 몰라. 샤이 아시안 걸이잖아."


쟤는 심각한 공감 능력 결여 인간이었지만  심각한   정신머리였다.


"한 번만 해줘... 작은 Glen이 슬퍼하고 있어..."

"나 근데 진짜 할 줄 몰라... 어떻게 하는지 가르쳐주든가..."


Glen은 정말로 어떻게 하는지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머리채를 잡는 솜씨가 아주 인상적이었지! 덕분에 나는 섹스 당하는 법, 입으로 해주는 법, 그리고 '한 번만'은 진짜 한 번으로 끝나는 법이 없다는 것을 속성으로 배울 수 있었다.




나는 대한민국 교육과정이 바라는 이상적인 형태로 청소년기를 보냈다. 집중력 부족으로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 뿐이지만 하루 종일 공부를 하고, 걍 관심이 없었을 뿐이지만 동성 및 이성교제에 관해 무관심한 데다 무지했다. 그런 주제에 거절에도 소질이 없어 섹스를 대뜸 실전으로 접한 희귀한 케이스가 되었다! 아 물론 실제로 희귀한 케이스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직도 많은 으르신들이 "대한민국 정서에 맞지 않는 지나치게 적나라한 성교육은 조기성애화를 부추긴다"며 성교육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아니 그러면 성적 대상으로 바라보지나 말든가, 그건 또 아니어서 학생 개개인이 어디선가 쫌쫌따리로 획득한 올바른 지식이 쌓여 성인이 되면 뿅! 하고 성관계의 주체가 되길 바란다. 하지만 '적나라한' 성교육을 흐린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섹스한지 하루 이틀이 지나고서야 "헉, 잠깐 나 피임은...? 가임기가 언제...?"하고 손을 벌벌 떨며 자살할지 일단 산에서 한번 굴러볼지를 고민하는 또 다른 은별이를 탄생시킬 뿐이다.


아니 그러면 애초에 니가 문란하게 굴지를 않았으면 되잖아!라고 생각한 사람 손 들어보자. 괜찮다. 그 손으로 당신 뺨을 후려치라고 하지 않는다. 나조차도 스스로에 대해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알아두었으면 하는 게 있다. 우리는 애초에 "안 돼요! 싫어요!"라고 외칠 만큼 명확한 사건을 마주치지는 않는다. 당신의 상상 속 극단적인 성폭행 상황을 제외하고는. 오히려 "안 되는 건 아니지... 아니긴 한데... 막 죽을만큼 싫지는 않거든... 하, 그렇다고 좋은 건 아니야..."같은 상황이 보편적이리라.


나는 그런 적 없다고? 그럼 다음의 두 가지 경우 중 하나가 아닐까. 당신의 마음속에서 완전무결한 호불호의 추가 작동하고 있거나, 당신의 돈 혹은 지위가 '거부'를 가능하게 해 주었거나. 축하한다. 부럽기도 하고.

매거진의 이전글 "캔 아 키스 유?"-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