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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므므강 Aug 10. 2023

못된 생각 4 (The thinking of bad)

접신

당신이라면 죽어 마땅한데 말이야


"기적이 아닐 수 없어요! 바바꼬 영감의 나이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닙니다! 어떤 튼튼한 이도 이만한 사고에 살아남을 수는 없었을 겁니다!"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은 바바꼬 영감을 두고 의사가 호들갑을 떨었다. 병원 침대에서 기절한 지 일주일 만에 깨어난 바바꼬 영감은 자신의 꼴을 보고 다시 한번 기절할 뻔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깁스와 붕대로 꽁꽁 묶여있었기 때문이다. 옆에 있는 망토가 눈치껏 움직여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신세가 되어 있었다. 의사는 바바꼬 영감이 듣기 싫든 좋든 호들갑을 이어갔다.


"온몸에 철심을 500개나 넘게 박았습다. 앞으로 걸을 때마다 그 여행가방 없이도 끼리릭 소리를 낼 수 있겠군요! 하하하!"


의사는 바바꼬 영감의 검은색 여행 가방의 녹슨 바퀴가 내는 비명소리를 흉내 내는 자신의 재치를 경탄하며 웃어제꼈다.


"영감님 그러니까 마음 씀씀이를 좋게 쓰쇼. 말년에 이게 무슨 개고생입니까. 악!"


옆에서 가만히 참고 있던 망토가 의사의 정강이를 냅다 걷어찼다. 얌전히 횡단보도를 건너던 바바꼬 영감이 빨간 스포츠카에 치여 하늘 높이 튕겨져 병원에 실려온 날, 천하에  놈인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천벌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오고 갔다. 의사건 간호사건 심지어 지나가던 환자들까지도 그렇게 쑥덕거렸다. 바바꼬 영감이 실려온 병원은 '나쁜 생각 공원'에서 걸어서 3분도 채 걸리지 않은 가까운 거리에 위치했다. 그래서 병원 관계자들이 종종 커피를 들고 공원으로 산책을 나오곤 하는데 가끔 바바꼬 영감이 나타나면 항간에 떠도는 괴담들을 서로 공유하며 자리를 피했었다. 그의 젊은 시절, 전쟁터에서 금지된 생화학 무기를 뿌려댄 이야기, 포로들을 가둬놓고 불을 질렀던 이야기, 생살을 바르는 고문을 저지르는 이야기 등 차마 인간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잔혹한 짓들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그 시절을 잊지 못하고 괴팍하게도 그 일들이 훈장처럼 자랑스러워 매번 공원 벤치에 앉아 그 나날들을 곱씹고 있는 것이라며 손가락질을 해댔었다. 결국 그렇게 쌓인 업보가 이번 기회에 청산됐다며 세상의 정의는 살아있다고 병원에서 박수치는 사람이 여럿 있었다. 망토는 한쪽 정강이를 부여잡고 있는 의사의 다른 쪽 정강이 마저 있는 힘껏 차버리고는 병실에서 도망쳤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나갔는데 정확히 들리지는 않았다.


"저 쪼끄만 녀석이, 어후. 아무튼 영감님 입장에선 천만다행. 당신 같은 사람이라도 살려야 하는 게 의사라 일단 최선을 다해봤는데 결과가 좋은 것 같군요."


의사는 바바꼬 영감의 몸상태에 관해 이런저런 쓸데없는 설명을 거만하게 늘여놓고는 자신을 만나 운이 좋았다는 말을 덧붙이고 나갔다. 한참 후 헐떡거리며 아까 부르짖던 누군가를 찾지 못하고 돌아온 망토가 까무러치게 놀라고 말았다. 바바꼬 영감이 제 스스로 온몸에 두른 붕대와 깁스를 풀고 있던 것이다. 재빠르게 붕대를 푼 그는 옷장에서 환자복을 꺼내 입었다. 불과 일주일 전에 온몸이 부서지는 사고를 당한 노인이 벌떡 일어나 아무렇지 않게 움직이는 모습은 분명 그날의 사고만큼이나 놀라운 장면이었다. 망토가 이리저리 둘러봐도 비비꼬 영감의 몸은 멀쩡해 보였다. 다만 쩍쩍 갈라진 입술로 내뱉는 말은 어딘가가 분명 온전치 않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역시 노인의 몸이라 접신이 쉽지 않았나 보군. 일주일 만에 깨어난 걸 보니."

"할아버지! 어쩜 그렇게 멀쩡할 수가 있어? 분명 살아나기 힘들거라 했는데?"

"넌 누구인가?"

"아, 몸은 괜찮은데 머리가 갔구나."

"어린이야. 노인을 함부로 대하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이전에 생기를 잃은 바바꼬 영감의 눈빛과 전혀 다른 쌩쌩한 눈동자로 망토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러고는 혼자 뭐라 뭐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비비꼬 영감은 사고의 영향으로 머리가 망가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운명의 세 여신이 이렇게 낡은 노인의 몸을 선택한 이유가 뭘까...... 어린이야! 이 노인하고 잘 아는 사이인가?"

"할아버지 괜찮아? 말투가 많이 아파 보여."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거라."

"우린 둘도 없는 콤비이자 영혼의 단짝이지. 그리고 내 돈을 멋대로 꿔가고 아직 갚지 않은 사이이고."

"의사라는 작자가 이 인간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혐오하던데 사이가 좋지 않은가 보지?"


망토는 바바꼬 영감이 세간에 퍼진 소문에 대해 기억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 악담들을 구태여 알리고 싶지 않은 망토는 머뭇머뭇 대답을 미뤘다.


"됐고. 이 노인의 집은 알고 있겠지. 앞장서서 안내토록 하라."

"아니 집은 몰라. 대신 항상 만나는 장소는 있지. 거기 가면 좀 괜찮아질 수도 있으려나."


망토는 어찌 됐든 바바꼬 영감이 무사히 일어난 모습에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다. 그녀를 기억 못 할 정도로 상태가 좋진 않았지만 꼼짝없이 죽은 줄로만 알았던 바바꼬 영감이 멀쩡히 살아 움직인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신이 난 망토는 바바꼬 영감의 자글자글한 손을 잡고 병실을 나섰다. 영감이 깨어나면 누군가 자신을 불러달라고 했던 기억은 이미 어린 망토의 기억에서 잊힌 지 오래였다. 망토의 손에 이끌려간 바바꼬 영감이 도착한 곳은 '나쁜 생각 공원'의 구석진 곳, 망토와 자주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눈 그 벤치였다. 망토는 바바꼬 영감을 얌전히 벤치에 앉히고는 어디론가 뛰어갔다. 곧이어 낑낑대며 자기 덩치만 한 검은색 여행 가방을 끌고 왔다. 망토는 바바꼬 영감의 의식이 없는 동안 공원 한쪽에 가방을 숨겨 보관해 놓고 있었다.


"이게 무엇인가?"

"할아버지가 항상 가지고 다니던 가방이야. 이것도 전혀 기억이 없어?"


디케는 바퀴는 녹슬고 지퍼는 이가 여러 군데 나갔으며 여기저기 낡아 실밥이 끝없이 늘어져있는 검은색 여행 가방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이 가방 안에 바바꼬 영감의 신분증이라도 들어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디케와 같은 생각을 떠올린 망토가 가방을 열어보라고 부추겼다.


"가방 열어보자! 그 안에 들어있는 걸 보면 기억이 조금 돌아올 수도 있지 않을까?"


되찾을 기억 따위 있을 리가 없었다. 이미 그는 바바꼬 영감이 아니라 정의의 여신 디케였다. 차에 치여 바바꼬 영감이 하늘높이 튀어 오른 날, 전능한 신이 그의 몸으로 들어왔다. 운명의 세 여신의 이끌림이 부여한 몸. 기왕 인간세상에 내려와야 한다면 젊고 튼튼한 몸을 골라줘도 됐을 터인데 굳이 나이 들어 이곳저곳 쑤시고 결리는 하자가 많은 몸을 고른 이유가 뭘까. 원망스럽더라도 지금은 불평보다는 일단 보금자리 확보가 중요했다. 특히 체력이 달리는 이 노인의 몸으로는 바깥활동을 오래 하기 힘들었다. 인간 생활을 위한 최소한의 의식주. 기존의 이 인간이 살던 집과 재산이 필요했다. 이 인간과 막역한 사이라는 저 어린아이조차도 집을 모른다면 이제 기댈 것은 낡아빠진 검은색 가방이 유일했다. 여행 가방에는 잠금장치도 없었다. 망토가 나서서 가방을 똑바로 눕혀 지퍼를 열어젖혔다.


"오! 모에라이! 그대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겠구나!"


디케가 접신한 바바꼬 영감이 하늘을 바라보며 경외와 찬탄의 소리를 질렀다. 가방 안에는 낡고 찢어진 옷가지 몇 벌과 잡다구리 한 물건들, 황금색의 천칭저울, 그리고 몇 개의 무게 추들이 있었다. 디케는 자글자글한 바바꼬 영감의 손으로 천칭저울을 들어 올렸다. 천칭저울과 추가 가방에 있었다니. 게다가 이 저울은 인간세상에 내려오기 전에 법과 정의의 여신인 디케가 사용하던 그 천칭저울이 분명했다. 머리에 어지러움이 스며들더니 통증이 올라왔다. 디케는 기억의 일부가 온전하지 못했다. 그녀가 인간세상에 내려온 이유와 천칭저울의 존재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본인의 물건임에도 이 천칭저울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사용해 왔는지와 같은 기본적인 기능과 정보를 알지 못했다. 지금 디케가 기억하는 것은 본인은 신으로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인간의 몸에 접신하였으며 알 수 없는 이유로 검은색 낡은 가방에서 튀어나온 천칭저울이 명백히 자기 물건이라는 것뿐이었다. 노인의 몸에 접신한 이후 전지전능은 옛말이 되었다. 한낱 보잘것없는 노인에 불과해진 신은 잃어버린 기억 외에 또 다른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이 인간의 집을 찾아갈 방법이 가방 안에는 없다는 사실에 전능한 신은 좌절하고 말았다. 그때 손뼉을 치며 망토가 소리쳤다.


"맞다! 할아버지 깨어나면 경찰 아저씨가 꼭 알려 달라고 했었는데! 잠깐만 여기 앉아있어 봐 금방 경찰 아저씨 데려 올게!"


경찰이라면 디케가 있던 신들의 세계로 따지면 해태 같은 존재가 아닌가. 선악을 판단해 악을 물어뜯고 선을 수호하는 해태 같은 존재라면 당연히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울 것이다. 그런 디케의 판단으로 망토가 경찰이라는 인간을 데려올 때까지 기다려 보기로 했다. 디케는 환자복을 벗어던지고 가방에 들어있던 추레한 옷으로 갈아입고 천칭저울을 꺼내 벤치 앞 땅바닥에 세워두었다. 디케는 천칭저울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물건이라 생각했다. 균등한 세상 그 자체를 담은 천칭저울을 바라보기만 해도 흐뭇했다. 불쌍한 노인의 모습으로 멍하니 앉아 천칭저울만 보고있는 디케를 저 멀리서 조롱하듯 웃으며 다가오는 커플이 있었다.


"이야, 요즘은 거지도 마케팅을 아는 시대구나!"

"돈 통이 번쩍번쩍하네!"


커플은 디케를 접신한 바바꼬 영감을 이리저리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래, 돈 통이 고귀한 천칭저울이라니 정말 기발해."

"특이한 거지네."

"단순히 특이한 거지가 아니야. 비상해. 이 공원 근처에 법원, 검찰청, 변호사 사무실이 저 뒤로 빼곡한 거 알지."


명품 브랜드 로고가 대문짝만 하게 붙어있는 손가방을 든 여자의 팔짱을 빼며 자가 주머니를 뒤져 동전 하나를 찾아냈다.


"그렇지 이번에 오빠도 거기다 사무실 차린 거잖아."

"그래. 그런데 저 저울은 법은 만인 앞에 정의롭고 평등하다를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해. 법조인이라면 누구나 저 저울이 가진 의미를 알고 있지. 아마 그들을 노린 돈 통인 거야. 노인네가 머리를 쓸 줄 아네."


남자는 엄지 손가락으로 동전을 퉁겨 천칭저울에 정확히 넣었다.


"의외다. 거지한테 돈도 주고."

"어울리지 않게 너무 착한 일 한 거 아냐 이거?"


가로 벋은 막대의 양끝에 달린 저울판 중 동전이 떨어진 한쪽 저울판이 짤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스윽 내려갔다. 유난히 청량한 소리가 오래 울려 퍼지는 순간 디케의 머릿속으로 무언가가 빨려 들어갔다. 순식간에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갔다가 한없이 밝은 빛줄기가 퍼지더니 누군가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 찰나의 순간에 보이는 얼굴이 있었다. 방금 동전을 퉁긴 무례하고 거만한 변호사로 보이는 청년의 얼굴이었다. 청년 변호사는 법정에서 열심히 누군가를 변호하고 있었다. 곧이어 재판에서 승소한 듯 피고인과 악수를 나누자 방청객에서 누군가 '당신도 살인마야!'라고 소리 지르는 장면을 끝으로 디케의 정신은 '나쁜 생각 공원'의 벤치에 앉은 바바꼬 영감의 몸으로 돌아왔다. 디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나간 주마등 사이에 보였던 청년 변호사로 보이는 남자가 혼이 나간 듯 천칭저울 앞에서 가만히 서있었고 그 옆에 명품 가방을 멘 여자가 남자의 이름을 부르며 몸을 붙잡고 흔들어 대고 있었다.


"코크샤! 정신차려!"


디케의 정신이 돌아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변호사 코크샤도 눈을 끔뻑거리며 제정신이 돌아왔다. 코크샤는 천칭저울을 걷아차며 디케에게 소리쳤다.


"영감. 정체가 뭐야? 무슨 짓거리를 한 거지? 나한테 약이라도 탄 거야? 사람 봐가면서 헛짓거리 하는 게 좋을 거야. 내가 누군지 알고......."


빈혈이 온 듯 한 번 휘청거리는 코크샤를 여자가 붙잡아 부축했다. 관자놀이를 누르며 어지럼증을 호소하는 코크샤와 여자는 천천히 제 갈길로 떠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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