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주말 볼일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였다.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내리막길을 걸어가는데 대학생쯤 돼 보이는 커플이 걸어 올라왔다. 둘은 다정히 손을 잡고 있었다. 별 얘기 안 하며 지나갔지만 보기만 해도 '우리 서로 좋아해요. 연애하고 있는 커플이에요.'라고 쓰여 있었다. 예전 같았음 '좋을 때지...' 혹은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을 텐데 이번엔 좀 달랐다. 뭔가 훅치고 들어왔다.
'어머 나도 저랬었는데...' 순간 수많은 생각과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맞아.예전엔 저렇게 사랑하는 사람과 손만 잡고 있어도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했던 순간이 있었는데...' 언제부터인지 그런 감정을 잊은 채 살고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이를 낳고 기르기 시작하면서부터 인 것 같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출산 후 남편과 나의 삶은 거의 서바이벌이었다. 아이가 영아기 일 때는 회복이 덜 되몸도 내 몸 같지 않다. 지속적인 수면 부족과 쌓여가는피로감은다른 욕구들을 모두 뒤로 밀어 버린다. 남편과의 로맨스? '로맨스 따윈 개나 줘버려'가 된다. 그런 건사치에 가깝다. 그냥 24시간 졸리고 피곤하다. 쉴 수 있다면 제일 하고 싶은 건 잠이나 실컷 자고 싶은 정도니 말이다. 우리에겐 고민할, 의논할 필요도 없이 공동 목표가 생겼다. 그것은 바로 이 소중한, 마치 떨어뜨리면 깨질 것만 너무 연약한, 우리의 돌봄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이를 오로지 건강하게 사람답게 잘 키우는 것. 동시에 모든 사랑과 관심의 초점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아이에게로 맞춰졌다. 한마디로 우리의 세상은 아이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러다 아이가 걷기 시작하고 스스로 움직이며 점점 자라기 시작하니 현실적인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싱글 땐 내 몸뚱어리 하나만 신경 쓰면 됐는데 이제는 그게 아니다. 내 아이에게 뭐 하나라도 더 가르치고, 입히고, 먹이려면 그것을 해줄 수 있는 능력이 더 많이 필요함을 느끼게 된다. 그 능력은 알다시피 많을수록 좋다. 그럴수록 선택이 자유롭기 때문이다. 이런 삶에서 과연 로맨스가 발 딪일틈이 있을까? 다시 생각해 봐도 출산 전과 후의 우리의 삶은 180도 바뀌었다.
한동안 그 커플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뒤돌아서 힐끔힐끔 다시 몇 번을 쳐다봤다. 그들의 뒷모습도 둘만의 사랑 안에 마냥 행복해 보였다. 마치 로맨스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그 순간만큼은 둘밖에 없는 세상 같았다. 갑자기 코끝이 찡해졌다. 그동안 아이 키우며 정신없이 사느라잊었었던. 그저 '내 사랑'만 오롯이 즐기며 연애했던 그런 시간. 나도 그리웠나 보다. 생각해보면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닌데.
집 앞 근처 길목에 들어서자 내 안에 파도치던 감정도 잠잠 해졌다. 코끝 찡했던 감정도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히 가라앉았다.
그날 우연히 본 그 커플로부터 그때와 지금의 나의 삶과 목적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너무도 확연히 느끼고 알아버렸다. 더 이상 과거에서처럼 손만 잡아도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느낌은 갖기 힘들다. 그보다는 현실적인, 나를 보호해 주고 나의 가족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이 훨씬 더 설레고 나를 기쁘게 한다. 어렸을 적, 왜 우리 엄마 아빠가 그리고 어른들이 '너희들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라고 했던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