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해지는 과정 즐기기
커피는 딱 하루 한잔만 마신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엄숙한 의식을 치르듯 커피를 내린다.
위에서 물을 부으면 아래 커피에 골고루 물이 떨어지는 편리한 핸드드립 용품이다.
그런데 오늘은 …..
매일 거룩하게 커피를 내리는 리츄얼을 하는 나인데 오늘은 물담는 것이 먼저가 아닌 커피가루가 먼저 보인다. 순서가 틀렸는데 뭔가 잘못되고 이상하다는 낌새도 못 챘다. 그러다가 꽤시간이 지난 순간 물을 내리는 게 먼저고 커피가 그 아래에 있어야 하는데 순서가 틀린 것을 알고는 잠깐 아주 잠깐 흠칫했다. 아주 잠깐만 당황했다. 커피를 거의 다 내릴 즈음이었기에 다시 돌린다는 것도 큰 의미가 없었다. 스스로 어의가 없으니 미소가 나온다. 거꾸로 내린 커피를 입에 한 모금 음미한다. 맛이 그다지 차이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약간의 허무함이 포함된 미소가 한 번 더 번졌다.
나는 요즘 이런 실수를 한 번씩 한다는 것을 알아채고 있었다. 가끔은 정말 내가 한 말도 기억나지 않아서 “내가요? 정말요? 내가 그렇게 말했다고요?” 상대를 당황하게 나는 날도 있었다. 기억력도 총기도 없어진 요즘이다. 나의 기억력에 상대가 당황하면서 버럭 하려 할 때 예전에는 내 말이 맞다며 빡빡 우겼는데 요즘에는 미소로 사과를 한다. 내 기억력 감퇴가 왠지 싫지가 않다.
반짝반짝한 눈에 잡아먹을 듯 절대 놓치지 않던 그 총기 뒤에 사실은 불안함이 있었다. ‘내가 이것을 놓치면 이 일은 진행되지 않을 거야’라는 불안함말이다. 이제 나는 기억력과 총기는 다음세대의 몫으로 주기로 했다.
나는 뒤에서 바라보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돕는 역할로 서서히 옮겨 가기로 했다. 왜냐하면 내가 꼭 하지 않아도 그 일에 사명을 느낀 새로운 세대가 스스로 움직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고, 내가 꼭 요청하지 않아도 기꺼이 마음을 내어주면서 도움을 주는 따뜻한 이들이 있음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나에게 총기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협업하는 것을 비로소 배운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