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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영 Jan 06. 2024

옆에 있으면 용기 나는 사람, 올해 목표입니다


12월은 매일 카운트다운을 세는 나날이었다.

"얘들아, 한 달만 지나면 옆 짝꿍이랑 헤어져."

"이제 얼굴 볼 날이 15일밖에 안 남았어."

"이제 6일도 안 남았다."

아이들이 우리에게 남은 날들을 되새기며 얼마 안 남은 인연을 더 소중하게 대하기를 바랐다. 그래서였을까. "3학년 올라가기 싫어요!", "선생님이랑 헤어지기 싫어요"하는 말들을 입에 달고 살던 아이들이 정작 헤어지는 날이 오니 오히려 의연했다. 며칠 전부터 오늘이 되면 울 것 같다던 이진이(가명) 역시 눈물을 보이진 않았다. 아이들에게 아쉬운 표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헤어짐의 안타까움보다는 3학년 때 어느 반이 되었는지, 어떤 친구와 같은 반이 되었는지에 훨씬  관심이 더 커 보여 살짝 배신감마저 들었다.


한 학년을 마치는 날. 봄에 씨앗을 뿌리고 뙤약볕에 농사를 일궈 선선한 바람이 들즈음, 알알이 영근 들을 주렁주렁 매단 황금빛 들판을 바라보는 농부의 마음이 이럴까. 일 년 동안 함께 했던 아이들을 떠나보내는 마지막 날이 되면, 나라는 프리즘을 통과해 다양한 빛을 내는 아이들의 모습에 눈이 부시다. 또 이렇게 무탈히 한 해를 보냈구나. 천둥벌거숭이들이 많이 자랐네. 의젓해지고 참을성도 늘고... 3월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새삼 뿌듯해진다.


'마지막 날'이라는 특수한 상황 덕분에 더 그렇게 느껴지는 걸까. 월요일 아침이면 교실 밖에서 선뜻 들어오지 못한 채 핸드폰으로 엄마와 하며 울먹이던 아이도, 거의 매일 첫 수업 시각 9시를 넘겨 뒷문을 빼꼼히 열고 들어오는 아이도, 다방면으로 한해 가장 내 속을 까맣게 태우던 아이도 오늘은 다 듬직보인다.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심장이 아니라 아픈 곳'이라던 홍은전 작가의 말*처럼, 학년 마지막 날에 이 아이들이 더 눈에 들어오는 한해 내내 이 아이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열정을 기울였기 때문이리라.


학교 방송으로 교실에서 방학식을 진행하던 1교시에도, 통지표를 받고 성적과 진급반을 확인하며 일순 왁자해진 2교시에도 발랄하기만 했던 아이들이 다른 감정을 내보인 건, 마지막 인사를 하고 교실을 떠날 때였다.

매년 마지막 날, 아이들과 헤어지는 순간에 행하는 나만의 통과 의례가 있다. 아이가 하이파이브나 허그,  중 하나를 택해 그 방식으로 나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것이다. 한 아이, 한 아이와 눈 맞추며 스킨십이 오가는 순간. 그때가 아이들과 내 진심이 오가는 순간이다.


올해는 남자아이 두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아이들 모두가 허그를 택했다. 작년보다 이것을 택한 아이들이 많다는 건 올해 아이들이 내게 많이 마음을 열었단 뜻일까. 두툼한 외투를 입어 눈사람처럼 푸근해진 아이들이 품 안으로 달려들면 곰인형을 안은 듯 따듯하다. 스킨십이  약한 지만 오늘만큼은 아이들이 안겨오는 강도대로 꼭 품었다. 서로 자주 어울리던 남자아이들 몇은 개별로 안기는 게 어색했던지 "와!" 하며 우르르 내 품으로 몰려왔다. 갔다가 다시 돌아와 한 번 더 안고 가는 아이, 눈이 빨개져서 "선생님이랑 계속 있고 싶어요"하던 아이까지, 들썩이던 아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니 도떼기시장 같던 교실이 이내 휑해졌다.


조용해진 교실에 앉아 몇몇 아이들이 주고 간 편지를 읽다가 깜짝 놀랐다. 사랑과, 감사, 진급 학년의 각오 등 매년 비슷비슷한 내용의 아이들 편지 속에 정갈하게 쓰인 두 장 짜리 편지가 섞여 있는 게 아닌가? 한 아이 어머니가 쓰신 편지였다. 학부모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아닌 편지를 받은 건 무척 오랜만이었다. 아이와 엄마가 함께 편지를 쓰며 어떤 표정으로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까. 모녀가 각자의 자리에서 예쁜 편지지에 사각사각 편지를 쓰는 장면. 한없이 마음이 따뜻해진다.


'일 년 동안 감사했던 마음들을 담아두기만 했었는데 꼭 전해드리고 싶었다'며 써 내려간 편지에는 3월 학부모 총회에서 만난 첫 만남의 인상부터 학부모 상담, 개별 상담 등을 거치며 들었던 생각들이 따뜻한 시선으로 꼼꼼히 담겨 있었다. 아이가 자리를 바꾼 후, "엄마, 나 오늘 발표하려고 손을 많이 들었어. 선생님 가까이에 앉으니까 왠지 자신감이 생겨!"라고 한 말에 마음이 따뜻해졌다는 부분에서 어찌나 마음이 뭉클해지던지...

편지 속 아이는 수줍음이 많아서 1학기 내내 자발적으로 손을 드는 일이 거의 없었다. 2학기 들어서고 어느 때부터인가 발표하는 횟수가 늘기 시작하더니 나중엔  이 아이가 이렇게나 발표를 잘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의견 표현을 잘했다. 참 대견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이런 사연이 있었다니, 너무 감사했다.


유진(가명)이가 살면서 선생님과 같은 스승님을 만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많이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어머니의 이 문장눈시울이 붉어지고 말았다. 새해 계획을 따로 세우지 않는 나이지만 이 편지 덕분에 한 가지는 마음먹었다. '곁에 가까이 있을 때 왠지 자신감이 생기는 교사되기'. 

꼭 교사가 아니더라도 곁에 있을 때 왠지 자신감이 생기는 사람이라면 늘 그 사람 곁에 있고 싶지 않겠는가. 내게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가족과 친구들, 아낌없는 정을 나누는 지인들. 내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으니 내게도 그들의 향기가 묻어나는 걸까.


곁에 있을 때 왠지 자신감이 생기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사진 출처: pixabay)



오랫동안 아이들과 함께 하다 보니 아이들의 언어를 배웠다. 단순하지만 정직하고, 맑고 투명한 아이들의 언어를. 언어를 배우는 것은 그 언어에 담긴 세계관을 배우는 일이기도 하니, 난 오랫동안 아이들의 세계관을 익혀왔을 테다. 덕분에 내 안의 편견과 선입견, 아집에 찬 생각들을 더러 걸러낼 수 있었으리라. 올해는 어떤 아이들의 말이, 세계가 나를 그렇게 이끌었던가.

포옹과 손 편지 덕분에 올해도 풍년 농사 지었다고, 오늘 하루 잠시 우쭐해져 본다.    




* 출처: <그냥, 사람> 홍은전, 봄날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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