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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영 Mar 31. 2024

'비장애인간중심주의' 세상에 사는 당신에게 보내는 말들

홍은전 작가의 <그냥, 사람>과 <나는 동물>을 읽고


낯선 대상을 만났을 때 몸이 먼저 반응한다. 일순 몰려드는 긴장감에 동공이 확대되고 온몸의 피부 모공이 일시에 수축되는 느낌. 이런 느낌을 대체로 '위험' 신호로 판단한 내 뇌는 어서 이 상황에서 최대한 빨리, 멀리 피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그런데 피하면 안 된다고, 잘못 판단한 너의 뇌를 진정시키고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라고 더 강하게 말하는 소리가 있다. 마음의 소리다. 뇌과학자가 본다 또한 결국은 뇌의 판단이라 할지 모르지만 왠지 난 뇌의 소리와 마음의 소리가 다른 곳에서 오는 것만 같다.


홍은전 작가의 책 <그냥, 사람>과 <나는 동물>은 내가 최근에 만난 가장 '낯선' 세계다. 누군가에겐 보이는데 나에겐 잘 보이지 않았던 두 세계. 배운 대로, 아는 대로만 바라보는 눈으로 항상 곁에 함께 해 온 세계도 볼 줄 모르는 이가 눈 뜬 맹인이 아니면 무엇일까. 이 책들은 제대로 볼 줄 모르는 눈을 가진 내게 '제대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부드럽지만 단단한 문장으로 벼락을 날린다.


<그냥, 사람>은 우리 사회의 가장 연약한 곳에 자리한 존재들, 그래서 온몸으로 그들이 받고 있는 고통을 저항하는 몸부림으로 드러내지 않으면 그곳에 있는지도 모르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다. 장애인들의 삶이 그렇고, 권력을 가진 자들을 가로막는 자들로 낙인찍힌 이들의 삶이 그렇다. 폭주하는 사회의 희생양들의 이야기를 저자는 가장 가까이 다가가 질문하고 그들의 대답을 기록한다. 저자의 말대로, 실이란 잘 정리된 핵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는 사람과 대답하는 사람 사이에서 새롭게 태어남을 배우며.


홍은전, <그냥, 사람>


예전에 2학년 아이들과 장애인권교육 시간에 장애를 가진 친구들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 "우리 아파트 놀이터엔 장애를 가진 친구들이 없어요" 하는 한 아이의 말에 "장애인 친구가 놀기 힘든 놀이터라 나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건 아니다"고만 얘기했지, 나 역시 그 실체를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인구의 10퍼센트가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들의 존재가 왜 이렇게 잘 드러나지 않는지 의아했는데, 많은 이들이 '시설'에 갇혀 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장애인 활동지원제도'는 정신적, 신체적 장애등의 사유로 혼자서 사회생활과 일상생활을 하기 어려운 장애인 모두에게 활동지원급여를 제공함으로써 사회 참여와 자립생활을 지원하는 제도이다. 이 서비스가 전체 장애인으로 범위가 확대된 것이 2019년이라니. 장애 등급 1~3급에 해당하는 중증 장애인에게만 이 서비스가 겨우 시행됐던 것도 2010년 이후였단다. 그럼 그 이전에는 중증 장애를 가진 이들의 삶은 과연 어떠했단 말인가?


2005년에야 이동권을 인권의 관점으로 명시한 교통약자 이동편의 증진법이 제정된 뒤, 부족하게나마 대중교통의 현실이 점진적으로 개선되어 왔다. 하지만 2017년 조사 결과, 시외버스와 고속버스를 통틀어 휠체어 승강 설비를 갖춘 차량은 한 대도 없다고 한다. 누군가가 데려다주지 않는다면 중증장애인들의 장거리 이동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베트남전 참전 용사였으나 교통사고로 휠체어에 의지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장애인이 된 한경덕 씨의 사연은 눈을 질끈 감게 만들었다. 서울 지하철 신길역에서 리프트 버튼의 위치가 너무 높아 균형을 잃고 굴러 떨어진 그는 이후 98일 만에 세상을 떠났. 전쟁도, 교통사고도 앗아가지 못했던 한 생명이 고작 버튼 하나에 스러져가다니. 인간의 존엄을 다룰 때 그 범주를 우리는 얼마나 좁혀 잡고 있는 까.      


<그냥, 사람>이라는 책을 읽을 때만 해도 가까이, 자주 접해보지 못한 이야기들이 낯설었지만 그건 내 무지의 영역이라 반성하며 수긍할 수 있었다. 그게 '사람'의 이야기였기 때문이었음을 <나는 동물>에서 뼈아프게 확인할 수 있었다. 편을 가르고 내 편이 아닌 쪽을 비인간화 취급을 하며 잔혹한 행동까지 불사하는 인간의 심리에 대해 모르는 바 아니었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정작 인간이 아닌 존재들인 동물들을 대하는 인간의 잔혹성에 대해서까지 깊이 고민해 보진 못했다.


홍은전, <나는 동물>


저자가 저항하는 장애인들로부터 배운 것은 '억압받는 자들의 자리에서 세상을 다시 정의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억압받는 자'의 자리에 들어갈 대상에 '동물'도 포함됨을 쉽게 떠올리지 못했다.

저자가 *비질에 나선 하루에 대해 쓴 글은 차마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읽어 내려가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아니, '불편했다'는 게 더 솔직한 심정일지 모른다. 내 육식의 바로미터를 눈으로 확인해야 하는 일은 웬만하면 피하고 싶은 일이니까.


도살장으로 끌려들어 가는 소, 돼지들의 모습을 보며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가는 유럽 횡단 열차의 화물차량 안을 빈틈없이 채운채 끌려가는 유대인을 끌어왔을 때에야 비로소 나는 이게 무슨 뜻인지 '감각'할 수 있었다. 내 사고 회로는 철저히 인간 중심주의라서 연약하고 병든 동물들에 대한 연민을 가진 보통 인간이지만 먹거리의 희생양까지 깊이 들여다볼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다. 아니, 애써 알고 싶지 않았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일 테다.


내 '동물권'에 대한 인식은 막연해서 언젠가부터 '육식을 줄여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어렴풋하게나마 했을 정도다. 그러나 소와 돼지 몇 천 마리가 단 몇십 분 만에 도살되는 공장식 컨베이어벨트 현장을 눈앞에서 목격한다면 지금처럼 죄책감 없이 육식을 해댈 수 있을까.


언제나 현장을 본 사람과 아닌 사람의 괴리는 너무 고 무엇을 들었어도 어떻게 살 것인가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같은 것을 듣고도 다른 삶을 살게 된다. 그러니 난 이 낯설어서 어쩐지 편치 않은 세계를 접하고는 앞으로 어떻게 달리 살아가야 할지 갈팡질팡하는 것이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표현을 흔히 쓰지만, 살아 있다는 것이, 불법을 저지르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실은 어마어마한 특권일 수 있다는 벼락같은 가르침에 책을 덮고도 한동안 얼얼했.


치킨을 좋아하는 남편이 한 주에 두 번 치킨을 주문하길래, 이 책의 이야기를 전했다. 그날 우리는 치킨 대신 분식점에서 김떡순(김밥, 떡볶이, 순대)을 시켜 먹으며 조금은 죄책감에서 놓여났다. 탄수화물 치사량이라는 죄책감 따위를 어찌 죽음에 임박한 순간, 온몸으로 부르짖는 동물들의 고통에 비할 수 있으랴.


내게 눈을 제대로 뜨고 살라고 벼락같은 가르침을 준 홍은전 작가의 책들 by 정혜영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닌 세상이 좀 더 선명해졌다고 해도 비장애인간중심 세상에서 아무 거칠 것 없이 살아온 삶을 금방 바꿀 수 있다고 자신하지는 못하겠다. 그래도 세상에서 내가 누리는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잊지 않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단체에 보내는 알량한 몇 푼의 기부금으로 '손 잡아주는 자'의 자부심을 누려온 내가 과연 '손 벌리는 자'의 마음을 진심으로 헤아리고 있느는 질문을 그치지 않아야 하겠다.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질문을 던지는 일뿐이니까.





*비질 - vigil, 도살장 앞으로 찾아가 육식주의 사회에서 고통받는 동물의 현실을 목격하고 증언하는 활동. 죽음을 앞둔 동물을 감각하고 그 모습을 영상, 사진, 기록을 하는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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