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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영 Apr 27. 2024

'홍익인간'이고 싶은 순간


인생은 경보 경기와 닮아 있다.
남들은 뛰어가고 날아가는데 나만 제자리걸음 같을 때, 내가 참가한 경기의 규칙은 조금 다르다고, 내게 맞는 근육을 사용해 한 걸음 한 걸음 즐기며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충분히 지적이고 용감한 사람이 아닐까.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 정희재



당연한 말이지만, 사람들은 참 다르다.

어떤 이는 자기 안의 시계가 재깍재깍 돌아가며 다그치는지 어서, 빨리, 먼저 하지 않으면 불안해하고, 어떤 이는 마감에 임박해서 짧은 시간 안에 온 역량을 끌어모아 겨우 끝내고는 그러느라 반짝 활성화된 온몸의 짜릿함을 즐기기도 한다.

난 굳이 따진다면 후자 쪽에 가까워서 전자인 사람들을 만나면 참 신기하다.

"참 일을 빨리 처리하네요. 난 이제 서서히 시작해 볼까 하는데."

동료 교사의 전광석화 같은 일처리에 경외심마저 느끼며 말했더니,

"병이에요, 병. 불안 때문에 일을 미루지를 못하는."

이라는 답이 돌아온다.


그렇구나. 내 눈엔 능력자 같기만 한데, 정작 본인은 그게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닐 수도 있겠구나. 그래도 이런 사람이 나같이 느긋하게 일을 미루는 사람과 함께 일해야 한다면 속이 터질 것이다. 그 사람의 마감 기한과 내 마음속의 그것은 처음부터 어긋나 있을 테니 그는 내가 답답하고 난 그가 숨 막힐 일. 이런 사람들은 애초에 공동의 일을 도모하지 않는 게 신상에 이로울 일이다.


좋게 말해 여유롭고 느긋한 것이지, 실상 들여다보면 당장 하기 싫은 일이라 미루고 있는 난 가끔 일처리가 빠른 이들이 부럽다. 먼저 끝냈기 때문에 일의 과정 상의 어려움을 먼저 겪고 다른 이들에게 주의사항을 안내해 주는 이들의 홍익인간 정신이 부러운 것이다. 나도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 싶은데 마감에 맞춰 겨우 일을 끝내는 내가 일로 홍익인간의 정신을 발휘하기엔 무리다. 그래서 매 금요일이면 동료들을 먹일 주전부리를 챙기고 있는 것일까. 한 주 동안 지지고 볶인 동학년 선생님들의 몸과 마음이 잠시 달달한 먹거리로라도 에너지를 충전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요즘 내가 금요일마다 챙겨가는 간식은 '사과'다. '금요일의 사과'라는 의미로 금사과라는 별칭을 붙였는데 한동안 워낙 사과 값이 치솟아서 간식이 아니라 진짜 金사과 대우를 받았다. 가격 때문이 아니라도 씻고 잘라 손질해야 먹을 수 있는 주전부리는 손질한 이의 수고로움까지 더 얹어 원래의 가치보다 몸값이 다. 가족들을 위해 깎느라 제 입은 잘 챙기지 못했을 여자 동료들의 입에 사과가 한쪽씩 물리는 걸 보면 그게 그렇게 좋다.


그렇게 동학년 선생님들의 입에 사과 한쪽씩 물리는 심정으로 쓴 책이 출간을 앞두고 있다. 마감 기한이 다 되어 겨우 업무를 처리하고 일로는 깜냥도 부족한 내가 책을 몇 권째 출간한다는  실은 기적 같은 일이다. 뛰어가고 날아가는 사람들 틈에서 느린 내 걸음에 주눅 들지 않으려고 괜찮은 척했던 지난 시간이 알려준 건 한 가지였다. 그것은 '허투루 가지만 않는다면, 느리게 가도 괜찮다'는 것. 그러니 염두할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내게 맞는 근육을 사용해 맺은 결실을 수줍은 마음으로 티 좀 내도 되겠지. 


출판사 대표님이 마침내 결정된 책표지 시안을 보내주셨다. 제목도 우여곡절을 거쳤지만, 표지도 네 가지 중 하나를 고르는 게 쉽지 않았다. 사람 마음이 그렇게 하릴없이 흔들릴 수가 있을까. 하루는 이 시안이, 하루 지나면 또 다른 이 마음에 들었다. 결국 이건 내 영역이 아니구나, 싶어 출판사에 일임했다.

"결정해 주시면 전 또 갈대같이 처음 그게 제 마음이었던 것처럼 여기렵니다."

고작 이런 시답잖은 멘트나 날리면서.


신간 《어쩌면 다정한 학교》(정혜영 저)의 표지 시안입니다. 부디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길.


언제까지 유명인도 아닌 내 삶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에세이만 써낼 것인가. 그래서 다음 수순을 조심스럽게 밟아보려 한다.

결국 내 글쓰기가 향하는 끝이 어디일까, 생각해 보았다. 그 끝은 '어른과 어린이의 마음을 모두 사로잡을 동화를 쓰고 싶다'는 있는 듯하다. 글쓰기를 정식으로 배우지 못한 한은 땅을 치고 후회해 봐야 답 안 나올 일. 온라인 서점에서 동화와 그림책 쓰기에 관한 책들을 검색하고 우선 몇 권 주문했다. 모르는 건 배우는 게 제일 빠른 지름길일 테니. 책들이 내 부족한 글쓰기 항아리를 아낌없는 양분으로 채워주었으면 좋겠다.    


내 동화 쓰기에 충분한 양분이 되어주길 바라며 주문한 책들 by 정혜영




p. s. 위에 언급한 책, 어쩌면 다정한 학교는 7월 간 예정입니다. 두어 달 들여졌다가 칙! 김을 내뿜으며 알알이 탱탱하게 잘 익은 밥처럼 허기진 분들의 마음을 채울 수 있길 바랍니다. 독자분들의 관심, 넙죽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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