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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영 Nov 03. 2024

읽고 나서 나를 떠올렸다던 책

내게 천군만마 같은 1인


타인이 건넨 말 한마디에 갑작스레 마음의 온도가 올라가는 때가 있다.

넘어지니 뛰면 안 된다고, 천천히 걸으라고 아무리 타일러도 누구보다 앞서 나가고 싶은 마음에 뒤도 안 돌아보고 튀어 나가기 바쁜 금요일 하교 시간. 신발장에서 신발로 갈아 신고 바람에 쓸려가는 구름처럼 휩쓸려가며 복도 끝으로 사라지는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다 돌아서는 순간,


"선생님은 주말에 뭐 하실 거예요?"


어쩌다 한 조각 남은 뭉게구름처럼 몽글몽글 웃음 지으며 우리 반 선화가 물어오는 질문처럼.


온통 나, 나, 나... 자기 자신만으로 가득한 초등 1학년 아이의 마음에 한순간 반짝 빛나며 타인의 자리가 마련된 순간. 선화의 다정한 마음씀에 나도 모르게 환하게 미소가 번진다. 50개의 전구가 한꺼번에 켜진 심장의 뇌반짝 불이 들어온다.

 

이럴 땐 없는 일정이라도 귀하게 포장해 건네주고 싶어 질 텐데, 실제로 소중한 일정이 있어서 안심이다.

"선생님이 하는 오카리나 모임에서 연주회를 해. 선화는 주말에 뭐 할 거야?"

이모네 놀러 가서 사촌들과 만나 놀 거라고,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말하는 선화는 이미 마음은 이모네에 가 있는 듯 표정이 환하다. 사촌들과 즐겁게 놀다 오라는 내 말에 선화는 코스모스처럼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시야에서 멀어져 간다. 뒷모습에도 표정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선화의 등에 맨 가방. 좌우로 경쾌하게 흔들린다.


자신의 사정을 돌보기도 바쁜 세상에 타인을 섬세하게 돌아보는 사람을 만날 때, 세상은 살만해진다. 그게 어린이라면 경이로운 일이고 어른이라면 평생 친구 삼고 싶어 진다.

한국식 오카리나 교원앙상블에서 나와 함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L 선생님이 그런 사람이다.


얼마 전, 그녀가 내게 책을 건네주었다. 


이 책을 받고, 강연을 듣고 딱! 떠오른 사람이 혜영샘이니... 이 책의 주인에게 보냅니다.


책 위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에 쓰인 문구가 내 마음의 온도를 단박에 끌어올린다. 배우로만 알고 있던 차인표 님이 쓴 소설이라는 사실에 놀라고, 책을 읽고 교육청 저자 초청 강연까지 듣고 나를 떠올려 주었다는 그녀의 깊은 마음씀에 뭉클해진다.


책 욕심이 많은 내가 가장 못하는 일 중 하나가 읽느라 내 손 때 묻힌 책을 다른 이에게 주는 일이다. 정말 주고 싶을 정도의 책이라면 새로 사서 주지, 내 손 때 묻은 책은 아까워서 못 주는데 그녀는 어떻게 이렇게 쉽게 건넬 수 있는 걸까. 마음이 작은 사람은 큰 그릇을 지닌 사람을 만나면 몹시 부끄러워진.


L선생님이 읽고 나를 떠올렸다던 책, 차인표님의 소설.


최근 몰아 읽고 있는 한강 작가의 책을 잠시 물리고 내 독서대에 L선생님이 건넨 책이 놓인다. 무슨 내용일까? 어떤 이야기이길래 나를 떠올렸을까? 기대감에 한껏 부풀어 책장을 넘기기 시작한다.

반전은, 책의 전반부를 읽는 동안 소박한 동화 같은 인표 님의 문장에 몰입이 잘 안 되었다는 사실이다.


아침 6시, 일찍 집을 나서는 아들의 아침 식사를 간략히 준비해 주고 20~30분 책을 읽는 그 시간은 내게 하루 중 가장 귀한 시간이다. 가장 좋은 것을 제일 먼저 맞이하고 싶은 마음에 기상 후 갖는 첫 몰입의 시간. 며칠간 한강 작가의 이야기에 빠져 며칠 눈물샘이 마를 날이 없었다. 허투루 쓰인 게 하나도 없어 보이는 한강 작가의 문장들이 너무 아름답고 그래서 서사는 더 고통스러웠다. 그런 한강 작가의 문장에서 미처 헤어 나오지 못한 상태라 다른 책에 빠져들기 어려웠던 걸까?


책의 전반부에서는 L선생님이 나를 떠올렸다고 짐작되는 지점을 도통 감 잡을 수 없었다. 그러다 이야기가 우리 모두가 아는 역사적 사실과 만나고, 등장인물들의 관계에 급격한 변화가 전개되며 동화 같던 이야기는 무척 흥미진진해지기 시작했다. 저자가 이 소설을 통해 건네고자 했던, '용서를 빌지 않는 상대를 어떻게 용서할 것인가'라는 주제 의식이 또렷하게 부각되면서 묵직한 감동이 밀려왔다. 식민지 시대, 우리의 무겁고 아픈 근현대사를 소박한 문장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이야기로 변환해 독자에게 다가설 수 있다는 것. 내 1호 팬임을 자청하는 L 선생님은 그것을 내게 알려 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책을 덮으며 그녀의 깊은 마음을 헤아려 보았다.


인생을 바꾸고 싶다면 누구와 만나고 어디에 사느냐가 핵심인 것이다. 오늘 내가 누구를 만나고 누구와 새로운 인연을 맺느냐에 따라 인생은 갈림길에 들어선 사람처럼 바뀐다. 인연은 우주의 가장 큰 법칙 중의 하나다. 인연은 무슨 일이든지 해낼 수 있게 하며 무슨 일이든지 이룰 수 있게 만든다.
_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들>, 김승호


언젠가는 동화책이나 그림책을 쓰고 싶다는 내 바람을 마음에 담아 두고 내가 그 길로 계속 나아갈 수 있도록 빛을 비춰주는 사람. 부족한 내가 계속 글을 쓸 수 있도록 선선한 가을바람처럼 등을 밀어주는 사람의 말. 신은 내가 세상에 온 이유를 알려주려고 다양한 모습으로 변장해서 오는 것 같다. L선생님도 그런 인연 중 하나이리라.


그런 인연은 무슨 일이든지 해낼 수 있게 하며 무슨 일이든지 이룰 수 있게 만든다. 나를 단단하게 하는 건 천군만마 같은 ''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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