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인해 학교 등교일이 가뭄에 콩 나듯 해도 시간은 흐릅니다. 초등학교 6학년, 제일 큰형이 되었다고 우쭐하고 싶었을 아들은 올 한 해 학교에서 하급생 동생들을 만나보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6학년이 되어 딱히 무엇을 한 기억도 없는데 곧 졸업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중학교 입학을 몇 달 남기지 않아서인지, 요즘 아들 녀석은 생각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아들 녀석이 묻습니다.
"엄마, 소설책만 읽어도 말을 잘할 수 있어?"
아니, 소설책만 읽어도라니, 넌 전단지만 자주 읽어도 지금보다는 말을 10배는 잘할 거다,라고 말하면 안 되니까, 엄마는 침을 한 번 꼴딱, 삼킵니다. 엄마가 굉장히 말을 잘하는 반 아이에 대해 아빠에게 하는 말을 엿들은 모양입니다. 아들이 자기보다 잘하냐고 묻길래, 그럴걸?이라고 한 엄마의 농에 충격이 컸나 봅니다. 엄마가 말한 그 아이가 초등 2학년이니 지금 생각해 보면 농이 심했다, 싶습니다.
아들의 질문에 뭐라고 답해 줄까, 엄마가 고민하는데, 맞은편에 앉아있던 남편이 오랜만에 아빠 역할을 하고 싶었나 봅니다.
"그럼~ 아빠도 어렸을 때는 말을 잘 못했어. 어렸을 때 책을 거의 안 읽었거든. 근데 군대 가서 책을 읽기 시작했어. 그때 책을 엄청나게 읽었지. 그때부터 말을 잘하게 된 거야."
지금 남편은 아이들이 싫어하는 '나때'와 아내가 싫어하는 '군대' 얘기를 한 단락에 넣는, 근래 보기 드문 말재주를 발휘합니다. "너만 할 때 책을 많이 읽었다"라고 하기엔 양심이 많이 찔렸나 봅니다. 그래도 코딱지만 한 양심이라도 있어서 다행입니다.
남편은 고기를 먹었더니 갑자기 입에 기름칠이 도는지, 고기 잴 때 넣은 와인을 고기에만 넣은 게 아니었던지, 모처럼 부드럽게 입담을 이어갑니다.
"네가 책을 한 권 읽잖아? 그럼, 그 책을 읽는 동안 다음에는 무슨 책을 읽어야겠다,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되어 있어. 그래서 책을 계속 읽게 되는 거지."
책을 읽으면 그리 된다는 것을 남편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아내는 처음으로 알게 됩니다.
만난 지 햇수로 20여 년, 결혼 15년 동안 아내는 남편이 책 읽는 것을 한 손, 아니, 한 손에는 손가락이 너무 많은 듯합니다. V자 만드는 데 사용할 손가락만큼, 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책의 효용에 대해 저리 잘 알고 있다니, 군대에서 책을 읽으면 그 커버력이 평생을 가나 봅니다. 아내가 안 가본 군대는 성역(聖域)이 맞습니다.
저렇게 책이 좋은 줄 아는 사람이 애들 어렸을 때 좀 읽어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내는 고까운 마음이 듭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 아내가 매일 밤 '베드타임 스토리'를 하다 너무 피곤했던 날, 남편에게 하루만 대신 읽어달라고 했었습니다. 남편이 마지못해 응하고 책을 읽어주기 시작하는데, 마법사가 주문 외우는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작은 소리로 중얼중얼, 아부라카타부라… 그림책을 삽시간에 그렇게 우울한 책으로 둔갑시키는 것도 참 재주다, 싶었습니다.
그렇게 읊조리며 읽으면 아이들이 재미있겠냐, 했더니, 남편은, "이렇게 읽어야 아이들이 잠을 빨리 잔다"라고 해서 매를 번 사람입니다.
그날 이후로도 남편이 책을 읽어주지 못할 이유는 참 많았습니다. 자기 발음이 안 좋아서 아이들이 바른 소리를 터득하는데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느니, 애들은 엄마의 목소리를 들어야 더 마음의 안정을 얻는다느니, 자기는 몸이 커서 쪼그리고 앉아 책을 읽어주려면 몸에 너무 무리가 간다느니….
그러셨던 분의 밥상머리 책 강의를 귀 기울여 경청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아내는 코미디 프로보다 우습습니다.
누가 키웠는지 아들의 인성이 저리 반듯한데, 말을 좀 못 하면 어떠랴, 싶습니다. 그래도 엄마 마음에 한 가지 욕심을 부려 봅니다. 누가 봐도 아빠 주니어인 아들, 아빠보다는 좀 더 빨리, 군대 가기 전에 책 좀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라고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