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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현 Dec 24. 2023

불편한 손님이 다녀갔다.

일요일 밤, 여느 때처럼 노트북을 붙잡고 할 일을 하고 있었는데 몸으로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코와 목이 바싹바싹 마르고 잔기침이 나왔다. 곧이어 정신도 몽롱해지더니 앉아있기가 힘들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아플 것을 직감하고, 마스크를 쓴 후 일찍 잠에 들기 위해 누웠다. 하지만 푹 자면 나아지겠지, 라는 기대와는 달리 결국 그날 밤을 홀딱 새웠다. 새벽부터 몸이 쑤시기 시작하더니, 엉덩이와 골반 쪽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통증이 심해져서 쉴 새 없이 주무르다가 날을 지새운 것이다.


다음 날, 몸은 확실히 더 아팠다. 열감이 느껴지고 기침이 계속 나왔다. 더 누워 있고 싶었지만, 이른 아침부터 시작하는 자격증 대비 수업이 있었기 때문에 겨우 채비를 마치고 나왔다. 신림역으로 향하는 버스에 실은 내 몸이 둥둥 뜨는 듯했다. 강의실에 도착 후 오랜 시간 동안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고 있으니, 미간과 인중으로부터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전날부터 아팠던 골반이 이제는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쑤셔왔다. 수업 중간마다 고통을 참지 못한 내가 얼굴을 찌푸리자, 강사님께서 괜찮은지 물어보실 정도였다. 나는 어서 수업이 끝나길 바라며, 겨우 허리를 펴고 앉았다. 중간에 진통제 하나를 먹은 후 잠깐의 평온을 되찾았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네이버 검색에서 가장 후기가 많은 병원에 들렀다. 나를 제외하고도 다들 아픈 사람들이 많았다. 그 사람들 틈에 섞여 끙끙 소리를 내며 앉아있자니, 어떤 할아버지께서는 나를 대놓고 안쓰럽게 쳐다보셨다. 번호가 불린 후, 진료실에 들어선 나는 호소하듯 말했다. ‘원래 독감이면 이렇게 골반이 아플 수도 있나요? 통증이 너무 심해서 잠을 못 잔 건 처음이에요.’ ‘네, 원래 이번 독감이 증상이 좀 세요. 어떻게, 주사 좀 놔 드려요?’ ‘제발 부탁드릴게요!’ 이렇게 주사가 간절했던 적이 있던가. 나는 반쯤 넋이 나간 채로 한 손은 침대를 짚고, 나머지 한 손은 얼얼해진 엉덩이를 알코올 솜으로 눌렀다. 쓰레기통에는 선명한 핏자국이 점처럼 박혀있는 솜들이 가득했다.


3일 차가 되자 몸이 불구덩이 같았다. 코로나에 걸린 날 외에는 그동안 단 한 번도 쓴 적 없었던 체온계를 꺼내 열을 쟀다. 38.6도였다. 몸이 녹아내리는 느낌과 미친 듯이 쓰라린 목 통증에 샤워를 하다가도 몇 번을 주저앉았다. 나는 전날에 들른 병원 진료 시작 시간이 이른 오전임을 확인 후 바로 집을 나섰다. 택시를 탈까 잠깐 고민했으나, 출근 시간대와 택시비 그리고 정체된 도로 위에서 갇혀있을 나를 생각하자니 상상만 해도 속이 울렁거렸다. 겨우 버스에 올랐지만 10분 거리가 10년도 더 되게 느껴졌다.


병원에 도착 후, 정신을 겨우 붙잡고 학원에 전화했다. 국비지원 과정이었기 때문에 출석이 정말 중요했다. 병가가 가능하냐는 질문을 건넸지만, 9일 과정이라서 그건 어렵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다행히 하루 정도는 괜찮다는 것을 확인 후, 나는 결석을 선언했다. 병원에 거의 기어들어 간 나는 진통제와 수액부터 다급하게 찾았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그땐 정말 사막에서 50일은 나뒹군 사람 마냥 머리는 산발에 눈도 제대로 못 뜬 채로 데스크에서 수액-! 수액-! 을 외치는 미친 사람 꼴이었다.


간호사 분께서 내 오른쪽 팔의 혈관을 잘못 잡은 뒤 바늘을 두 번 찌른 것도 알았지만, 그건 대수로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아팠다. 나는 어서 약기운이 몸에 돌길 바라며 눈을 감았다. 갑자기 억울하고 서러웠다. 이번 해 초에도 감기로 몇 달 내내 고생했는데, 연말까지 꼭 이래야겠냐고, 화낼 대상도 없는 검은 화면에 대고 쏘아댔다. 게다가 겨우 시간을 맞춘 연말 약속도 두어 개나 있었지만, 그마저도 모두 취소한 상태였다. 건강도, 약속도 뺏어간 독감에게 갖은 짜증을 내다가 나는 잠이 들었다.


5일 차에 접어들고 나서야 조금씩 몸이 나아졌다. 몸이 찢길듯한 골반 통증은 수액을 맞은 당일 저녁에 갑자기 사라졌고, 기침도 갑자기 멎었다. 대신 그 자리를 콧물과 재채기가 채웠지만, 몸살에 비하면 감사할 따름이다.


지독한 독감을 앓으며 오랜만에 고립된 시간을 보냈다. 원래 카페라도 들려서 하루에 한 번은 꼭 나가야 했던 내가, 학원을 제외하고는 온종일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집에서의 시간은 나처럼 역마살 성향이 짙은 사람이 버티기엔 참 찐득하고 더디다. 통증을 회피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무언가가 필요했던 터라 티비를 끼고 지냈다. 덕분에 그 주에 방영한 예능과 드라마의 똑같은 장면을 10번 넘게 보거나, OTT 플랫폼에서 <라라랜드>나 <해리포터>를 다시 보기도 했다.


고작 일주일 정도를 이렇게 지냈을 뿐인데, 세상이 멈춘 기분이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더니, 사실 아플 때마다 천장을 바라보며 비슷한 생각을 했는데 그 새 또 까먹은 모양이다. 자취방에서 혼자 앓고 있자면 지독하게 외롭고 서럽지만, 그럴 때일수록 잘 버텨서 이겨내려고 애쓴다. 물론, 그동안 사람들과 섞이고 할 일을 하느라 인지하지 못했던 생각, 감정, 고민이 유독 더 예민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가끔 그 감정들의 중압감에 못 이겨 엉엉 울기도 하고, 불현듯 찾아온 불안감에 잠 못 이루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 몸이 나을 조짐이 보이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마음이 간질간질하다. 그간 아파서 제쳐둔 것들이 눈에 보이면서 뭐부터 하지?라는 설렘이 마구 샘솟기 때문이다.


나는 그 간질간질한 마음으로 오늘 오랜만에 서점을 들르고, 글을 썼다. 지금까지도 잘 버텨왔지만, 이번 독감도 일주일 안으로 무사히 졸업해서 다행이다. 다음 아픔이 또 언제 찾아올 진 모르겠지만, 미래의 나는 역시나 잘 이겨내서 다음 날 무얼 할지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독감을 ‘불편한 손님’ 정도로 여기기로 했다. 늘 소리 없이 찾아와서 내 일상을 헤집어 놓지만, 다녀간 뒤엔 나름의 많은 산물과 할 일을 잔뜩 남겨놓는, 그런 불편한 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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