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스틱 라이프
밤늦게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왔더니, 딸이 “엄마, 요즘 엄마가 최신 유행하는 라이프 스타일인 거 알아요?” 했다.
“그게 뭔 소리니?”
“엄마가 러스틱 라이프라고.”
“뭐라고? 러스틱?”
“응, 러스틱, 궁금하면 인터넷 찾아봐.”
인터넷 검색창에다 ‘러스틱 라이프’를 치니, 친절하게도(?) 설명이 나온다. 매년 트렌드를 분석하고 새로운 트렌드 키워드를 발표하는 김난도 교수의 도서 <트렌드 코리아 2022>에 ‘러스틱 라이프 키워드’가 등장했다고 한다. 김난도 교수라면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쓴 교수 아닌가. 나의 청춘은 그 책이 나오기 이미 한참 전에 지나갔지만, 워낙 유명했던 책이라 나도 읽어봤었다. 설명을 더 읽어 들어간다.
러스틱 라이프는 도시가 아닌 한적한 자연 속에서의 삶을 갈망하는 라이프 스타일인데, 쉽게 말해 ‘촌캉스’란 말이라고 한다. ‘촌캉스라고?' 바캉스는 알겠는데, ‘촌캉스는 뭐야?’ 다시 눈을 비비고 촌캉스란 설명을 따라 읽으니, 시골을 뜻하는 ‘촌’과 ‘바캉스’를 합친 합성어라고 한다. ‘호캉스’랑 비슷하게 조합한 단어인가 보다. 처음에 ‘호캉스’란 단어를 들었을 때도 ‘호캉스가 뭐지?’ 하였는데, 이제는 '촌캉스'라. 하여간에 단어를 잘도 만들어 낸다. 점점 새로운 조어가 등장하니, 언젠가는 젊은 사람들 하는 말을 반은 알아듣고 반은 못 알아듣는 날이 조만간에 올 것 같다.
젊은이들에게 핫한 뷰는 ‘논밭뷰’라고 했다. 확 트인 논밭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장소가 핫플레이스라고 한다. 우리 밭 근처에도 요즘 핫플레이스로 떠오르는 식당 겸 베이커리 커피숍이 생겼다. 처음에는 손님이 별로 없어서 일하다가 밀짚모자 쓰고 장화 신은 채로 가도 환영을 받았다. 이런 촌구석에 누가 올까 싶었는데, 점점 주차장에 세워진 차량이 늘어갔다. 요즘은 주말에는 주차장이 꽉 찰 정도로 차들이 세워져 있어서 가지 않고 있다. 일하던 차림새로 갔다가는 환영은커녕 따가운 논총을 받을 것 같기 때문이다. 돈 쓰고 욕먹을 짓은 안 하는 게 좋다.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내가 최신 유행하는 트렌드의 선두주자가 되었다고 하지 않는가. 소가 뒷걸음질 치다 쥐를 잡은 형국이다. 그런데 김난도 교수가 말한 ‘러스틱 라이프’에 내가 포함되기는 하는 걸까? ‘한적한 자연 속’은 맞는데 ‘한적한 삶’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일하지 않고 풍경을 바라보면, 일하는 사람들마저 풍경 속에 녹아들어 ‘평화로운 한 폭의 그림이 따로 없다.’며 감탄할 때가 나도 종종 있다. 가까이 가서 보면 벌게진 얼굴로 땀 냄새를 풀풀 풍기며 일하고 있는데 말이다.
며칠 있다가 콩밭에서 잡초를 매고 있자니, ‘러스틱 라이프’가 생각났다. 밭에서 바라보는 풍경으로만 따진다면, 1번 밭보다는 2번 밭 풍경이 끝내준다. 혼자 감상하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뷰가 좋다. 나는 허리를 펴고 서서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며, 캔 커피를 한 모금 넘겼다. 캭, 좋다. '여기에 카페를 차린다면 정말 끝내주겠구나.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핫플레이스가 될 수도 있겠지.'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났다. '근데 무슨 돈으로? 그냥 혼자 이 풍경을 즐기자. 부라보. 러스틱 라이프.'
“당신, 뭐 하고 있어? 바쁜데.”
“논밭 뷰 즐기고 있는데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일이나 해.”
“두고 봐. 여기 끝내주는 명소가 될 수도 있어. 우리 사는 동안에.”
“명소는 무슨 명소. 헛소리 작작 하고 일하라고.”
나는 서둘러 호미를 쥐고 콩밭 매는 일을 한다. 끝내주는 논밭 뷰는 눈에서 사라지고, 콩 줄기를 휘감고 올라간 메꽃과 환삼덩굴을 비롯한 잡초가 눈 가득 들어온다. 어이구, 이놈의 잡초들. 4도 3촌, 나의 ‘러스틱 라이프’의 하루가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끝내주게 멋진 저 논밭 뷰를 제대로 감상할 새가 없이 오늘도 지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