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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담 Mar 27. 2023

4년 차 농사일지 16화

미움받을 용기

 밭에서 일하는데 남편 직장 동료에게서 전화가 왔다. 옆에 있어서 다 들렸다. “네네, 잘하고 있는데요, 뭐. 네네,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다들 좋아하잖아요. 워낙 일을 잘하시니. 다들 좋아합니다. 그럼요, 네네, 걱정하지 마시고 그렇게 진행하시면 될 겁니다.” 남편이 이렇게 친절한 목소리의 소유자였던가. 하긴 목소리가 좋은 사람이었지. 여자인 나보다 남편 목소리가 더 낭랑한 사람이었지. 그런데 나는 남편의 그 친절한 목소리를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설마 ‘남편’이란 단어가 시중의 우스갯소리처럼 ‘남의 편’을 줄인 말인가. 어떨 때 보면 정말 남의 편이 따로 없다. 나도 남편에게 그런 지지와 격려와 응원의 멘트를 듣고 싶다. 그런데 바뀔 수 있을까. 


  나보다 정확히 두 배는 일이 빠른 남편. 고추 딴 바구니를 보면 남편이 딴 고추인지, 내가 딴 고추인지 구별이 된다. 내 바구니에는 고추만 있는데, 남편 바구니에는 고춧잎들이 섞여 있다. 고추를 따다 보면 가지가 부러지거나 고춧잎이 떨어질 때도 있는데, 나는 일일이 그것을 떼어놓는다. 남편은 그냥 다 담는다. 어차피 선별하면서 버릴 거니까.   



   

  잡초작업을 해도 남편이 지나간 자리 내가 지나간 자리는 확연하게 비교된다. 남편은 잡초뿌리가 뽑히면 뽑히는 대로 끊어지면 끊어진 대로 그냥 지나간다. 어차피 또 자라서 맬 때 다시 뽑으면 되니까. 그런데 나는 낑낑대면서도 끊어진 뿌리를 반드시 뽑아야만 직성이 풀린다. 내가 잡초를 뽑고 간 자리는 눈이 부실 정도로 깨끗하다. 그런데 속도는 남편의 딱 반이다. 잡초가 크게 자랐을 때는 그에 못 미칠 때도 있다. 내가 일하는 것을 보면 일머리가 없다고들 한다. 성격이 급한 사람과 느긋한 사람이 같이 살면 어떻게 되겠는가. 서로 미치는 거다. 




 내가 아무리 바지런을 떨어도 남편의 기대에는 못 미친다. 남편이 직장에 가고 혼자 일할 때 나는 점심을 거의 굶거나 대충 빵과 커피로 때우고 일을 한다. 퇴근하고 온 남편이 “에게. 오늘 하루 종일 겨우 이거 했어? 대체 하루 종일 뭐 한 거야? 논 거야?” 하기 때문이다. 동동거렸는데도 그러는데, 농땡이라도 피운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다음날은 남편이 벌초 때문에 비행기를 타고 내려가야 해서 일찍 가야 했다. 그런데, 시간이 아깝다면서 땅콩을 더러 캐어놓고 가자고 했다. 하기는 비 소식이 있고, 너구리가 다 먹어버릴지도 모르니 캐서 가는 게 좋겠지만, 이만 파하고 갔으면 좋겠는데. 또 고집을 부렸다. 이러면 말려도 소용없다.      

 

 차를 타고 가는데 차가 밀렸다. 항상 새벽이나 밤늦게만 다녀서, 이 시간에 이렇게 차들이 많은 줄 몰랐다. 그럴 줄 알았으면, 점심을 건너뛰고 오는 거였는데. 

  남편이 내가 서둘지 않았다며, 나 때문에 늦었다며, 잔소리하기 시작했다. 내가 이래서 땅콩을 한 줄만 캐고 가자고 한 거다. 그런데 남편은 이왕 캐는 것 두 줄을 캐고 가자고 하였다. 


  “여보, 앞으로는 동료 대하듯 나를 대해줘요.”

  “그게 뭔 소리야?”

  “어저께 당신 통화하는 소리 들으니까 동료에게는 아주 친절한 목소리로 말합디다. 격려하고 응원하는 멘트까지 넣고.”

  “그거야, 동료니까 그렇지.”

  “그러니, 나도 동료처럼 대하라구요.”

  “내가 어떻게 했는데.”

  “그럼 내가 잘 흉내낼 자신은 없지만, 좀 흉내내 볼게요.”     

   나는 그대로 재연하지는 못했지만, 남편의 목소리를 흉내내며 차례대로 말했다. “에게, 하루 종일 이것밖에 못했어? 하루 종일 논거야?” “네네, 그럼요. 잘하고 있습니다. 네, 그렇게 하시면 될 겁니다.” 남편 얼굴이 벌개졌다.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일단 한방 먹인 모양이다. 이 한방으로 달라지진 않겠지. 나는 용기를 내어 더 나간다.


  “내가 당신 없을 때는 끼니까지 거르며 일한다고, 당신한테 ‘에게, 이것밖에 못했어’라는 말 듣기 싫어서.”

  “누가 굶으면서 하래?”

  “그러게. 그렇게 하는데도 인정을 못 받으면서. 뭔 미친 짓인지 몰라.”

  말을 하다 보니, 울컥해서 눈물이 찔끔 났다. 누가 밭에다 떠다민 것도 아닌데, 직업으로서의 농부도 아니면서. 아이구, 못 살아. 그래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남편의 인정 따위 기대하지 않는, 오히려 미움받아도 좋다는 용기인지도 모르겠다. 

   

 내 태도에 놀랐는지, 남편은 침묵 모드로 들어갔고, 나는 어제부터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꺼내니 조금은 후련한 것 같기도 했다. 속으로 되뇌었다. 그래, 내게 필요했던 것은 인정욕구가 아니라 남편에게 미움받을 용기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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