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 놀이터와 클럽과 음악

by 임미리

나의 브런치 글을 읽은 절친한 친구가 말했다. 우리는 14살 때 부터 친구였다.


'니 노래 잘 했는데? 노래방 가수니 목소리가 작니 그런건 모르겠고 그냥 듣기 좋고 잘했어.

듣기 좋은게 노래를 잘하는 사람 아닐까? 발성이고 뭐고 난 중요치가 않아서. 뭐 득음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내 남편도 보컬 전공자지만 그냥 좋은노래를 편안하게부르면 듣기 좋은데 전공자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노래를 부를 때면 정말 시끄러워'


뜻밖의 친구의 견해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게.


그리고 나는 최근에 읽은 장기하의 에세이를 떠올렸다. 제목이 재밌었다.


[상관없는 거 아닌가?]


그의 말대로 상관없었다. 노래는 누군가에게 듣기 좋으면 그만이라는 거. 캄캄한 밤에 전구가 탁 켜지는 듯 했다.


이런 맛에 노래를 계속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내 노래를 듣기 좋아해주는 단 한 사람을 위해서.

덕분에 나는 내가 얼마나 음악을 사랑했는지 떠올릴 수 있었다.


사랑은 관심의 다른 표현이고, 관심은 호기심을 호기심은 이해를 이해는 행복을 준다

마치 첫사랑과 사랑에 빠지듯 나는 그렇게 음악에게 서서히 일방적인 짝사랑에 빠졌다.


그 시작은 역설적이게도 내가 나를 가장 자책하던 시기에 나는 음악이라는 존재에 빠져들었다.

마치 올려다 볼 수 없는 재벌집 막내아들을 사랑하게 된 것 처럼. 나에게 처음 접한 흑인음악은 그런 것이었다.


당시 (2006년 경) 한국에서 힙합은 마이너 음악장르였다. 홍대를 중심으로 소수의 청년들이 즐기기 시작한. 좀 닫힌 세계이기도 했다. 당시 '디씨트라이브'라는 흑인음악 매니아에서 유명한 사이트는 인원제한을 했으며 몇 십명의 사람이 한 사람의 아이디에 '기생' 해서 그 사이트에서 흑인음악 정보를 훔쳐 보곤 했다. 나또한 그 사이트에서 '이센스' '제이지' 뭐 등등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당시 래퍼였던 남자친구와 홍대 놀이터에서 17차를 한 병 사서 죽치고 앉아 많은 사랑이야기를, 음악 이야기를 밤새 나누었다. 그곳에 있노라면 흑인이나 다른 외국인들도 자주 볼 수 있었다. 나는 종종 신기한 모습의 사람들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바바리맨도 자주 만났다. 놀이터에 앉아있는데 나를 보며 누가 실실 웃는데 뭔가 이상해서 눈을 살짝 내려보니 검고 흉측한 것이 툭 튀어 나와있었다. 나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경찰서에 전화해서 큰 목소리로 신고 했고 그는 바지를 헐레벌떡 올려입고 도망쳤다. 저러고 살고 싶을까.


새벽 5-6시 경이 되면 클럽 죽순이 죽돌이들이 클럽에서 실컷 흔들어대다가 친구들과 삼삼오오 집으로 가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여자들은 화장이 다 뜨고 번져서는 그래도 아직 남아있는 에너지가 있어 꺄르르 웃으며 활기차게 걸어갔고, 남자들은 클럽에서 찾지 못한 짝을 아직도 찾는 듯한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 보았다. 길거리에는 새벽에만 열리는 포장마차가 있었고 그곳에서 우동이나 오뎅을 먹었다. 제멋대로 개성을 가진 그들은 지하철2호선이 있는 곳으로 마치 규칙 없이 행렬하듯 쓸려갔다.


Ho-bar 라는 곳이 흑인음악을 그렇게 잘 틀어서 음악하는 친구들과 자주 찾았다.


비욘세의 노래를 들으며 알 수 없는 이국 세계의 노래에 답답함 반 경이로움 반을 가지고 있을 때면

머리를 양갈래로 곱게땋은 예쁜 언니가 주문한 잭콕을 들고 나왔다.

그러면 그들은 음악을 안주로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나누기도 했는데 난 그것을 듣는게 즐거웠다.


"사실 랩 가사는 다 쓰레기야."


갸우뚱 하는 나를 보며 남자친구가 가사를 번역하며 알려주었다. 나는 그가 멋지다고 생각했다. 영어를 잘 했고, 그 배경에는 이런 꼬불랑 거리는 노래들을 많이 들어와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가 알려준 가사는 죄다 돈 많다는 걸 자랑 하고 여자랑 어떻게든 하고 싶다는 걸 표현하는 그런 내용들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말했다.


"남자새끼들은 다 동물이야. 다 그것만 생각해. 너도 조심해야 해."


그는 나를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마냥 어쩔 줄 몰라했다. 그가 보기에 내가 탐스럽고 예뻐서 다른 사람들도 나를 탐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 던 것 같다. 랩에서 야한 가사가 스피커를 달고 온갖곳에 퍼지고 있는 동네니까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실제로 내가 살던 고시원 옆방에 여자가 성폭행을 당하는 일도 벌어졌다.


그는 나에게 노래를 추천해 주었다.


"네가 비욘세의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다면 너는 진짜 노래를 잘하는 거야."


그가 들려 준 노래는 me, myself 라는 비욘세의 노래였고 이 노래는 지금들어봐도 어렵다. 랩은 그렇게도 선정적인 내용이 많은데 비욘세의 노래는 왠지 나 자신, 진정한 사랑. 이런것에 대해 노래 하는 것 같아서 마음에 들었다. 물론 그녀의 화려한 노래스킬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 뒤로 쭉 비욘세의 음반이 나올 때 마다 많이 들었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가수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다 또 남친을 통해 새로운 가수를 알게 되었다. 비욘세에 필적할 만한 팝스타가 나왔다는 것이다.


"리한나는 색깔이 강해서 피쳐링과 참 잘 어울리는 가수야."


색깔이란 무엇인가? 리한나의 Umbrella, Don't stop music 이라는 걸 들으면서 처음에 좋아하던 비욘세 노래 보다 더 많이 듣고 있는 나를 발견 했다.


비욘세의 노래는 화려하고 깊이가 있었으며 세계최고의가수다. 그런데도 내 귀는 다른 것에 끌렸다. 마치 바람을 피는 사람이 된 것 처럼 나는 그렇게 리한나의 음악에 빠져들었다.

독특해서 한 번 들으면 잊혀지지 않는 음색, 반복적인 멜로디 등 그것이 그녀가 가진 무기였다.


나는 그렇게 흑인음악의 바이블이 되는 여자 가수들의 노래들을 감탄하면서 많이 들었다.


듣다가 가장 먼저 알게 된 것은 '그루브'였다.

흑인 그루브는 몸을 꿀렁이는 것인데 노래또한 꿀렁였다. 이 꿀렁임은 아직 이해할 수 없었지만 클럽에서 추는 많은 이들의 춤에 이 꿀렁임이 있음을 눈치 챘다. 거기엔 진짜 흑인들도 있었고 그들의 몸은 오징어 처럼 유연해 보였다.

뻣뻣했던 나는 골반을 뫼비우스의 띠 처럼 꿀렁이는 방법을 익혔고 이 후로 클럽에서 음악을 들으며 리듬감을 느끼는데 푹 빠졌다. 랩이나 알앤비를 들을 때면 흑인 그루브를 익힌 몸이 반응했고 나중에는 손가락하나로도 그루브를 만들어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귀여운 지렁이가 꼬불랑 거리는 것과 같은 움직임이었다.

나는 이 후 '흥의 여성'으로 발돋움 하며 동아리내에서 흥을 담당하여 몸을 잘 흔들며 축제를 잘 즐기를 여성이 되어있었다. 스스로 이러한 변화가 놀라웠으면 가히 나는 문명화 되었구나 그것도 서구문화에!

촌여성의 놀라운 발전이었다. 그래서 더 재미있었고 즐거웠던 것 같다. 좋아하니 잘하고 싶은 욕구가 드는 것은 당연했다.


또 알게 된 것은 '레이백' 이었다.

몸에 그루브가 익혀졌지만 아직 목소리에는 리듬감이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것은 흑인음악이 모든 박자게 엇박으로 그루브를 주는 음악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한국적인 박자와 완전히 반대였으며 당연히 한국에서 자란 나에게는 어려운 것이었다.


'lean back'이라는 가사를 가진 노래에 맞춰 동아리 애들이 자꾸 등을 어따 기대는 흉내를 내면서 '린 백! 린백!' 하며 하하호호 즐기는 것을 보면서 나는 궁금해 했다.

뭐 자꾸 등을 기대고 저러냐. 뭐길래? 잘 몰랐지만 몸을 뒤로 기대는 흉내를 같이 내다 보니 나도 어느새 '린 백! 린 백! ' 하며 즐기고 있었다.

알고 보니 흑인음악은 정박자에서 살짝 뒤로 밀어대며 랩이나 노래를 하는 스타일이었다. 박자에서 조금 밀려 났고 약간 그 느낌이 뒤로 기대는 게으른 느낌을 주는 것이라고 해서 lay back 이라는 용어를 썼던 것이다.


또 하나 알게되어 아직까지도 써먹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영어 발음 이었다. 오래도록 흑인음악을 들어온 동료들은 발음이 외국인 처럼 좋았다. 내가 공연곡 준비를 할 때 남자 친구가 나의 형편 없는 영어 발음을 흑인 처럼 교정해 주었다.


예를 들면 living my life 라는 가사가 있을 때, 내가 생각하는 ~ing 발음은 노래에 들리지 않았다. 그걸 모르고 있었는데, 남자친구가 알려주었다.

"livin' 이라는 것 보이지? ing 발음을 하지 않고, in' 으로 발음을 해. '리빙' 이 아니라 '리빈' 이렇게"

그렇게 그가 알려 준 걸 바탕으로 노래를 다시 들으니 웬걸? 정말 발음이! 그랬다. 놀라웠다.

그는 'slang'이라는 것도 알려 주었는데, 흑인음악에는 정식 영어에서 쓰지 않는 그런 그들만의 은어 같은 것이 있었고 그것이 슬랭이었다. 어느 나라 말이건 욕이 제일 재미있게 마련이다. 나도 욕을 신나게 배웠다.


그러나 뭔가 괴리감이 있었다. 나는 한국사람인데, 한국사람이 외국노래를 뭐 이렇게 억지로 따라 해야 하나. 내 몸에 알맞지 않는 옷은 아닌가.


2006년 이 시기의 홍대에 거주한 그들은 한국 힙합을 만든 역사의 장본인들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들과 동시대를 살았다는 것이 행복하다.


동아리에서 함께 활동했던 로꼬는 대표적인 멋진 한국 래퍼가 되었고, 그레이도 한국에 유명 프로듀서가 되었다.

당시 이센스는 2006년 당시에도 이미 힙합계의 유명인사였다. 우리 동아리 공연에 초대 가수로 초청되어 랩을 했는데, 힙합클럽의 전성기였던 시기였다. 클럽은 붐볐고 모두가 열광하며 즐겼다. 나는 한국 힙합을 만들어가는 순간들의 중심에 있었다.

그의 영어 발음을 가까이서 들을 기회가 생겼는데 나스를 좋아한다는 그의 영어 발음이 매우 유창했으며 고향은 대구 경산이었다. 내 고향 왜관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 같은 사투리를 쓰는 사람이 힙합을 하고 그 씬에서 인정을 받는 사람이라니. 그는 촌 출신인 나에게 희망을 보여주는 멋진 사람이었다.

담배를 많이 피는 듯 가래 끓는 듯한 허스키한 목소리에 진짜 술에 취해서 '꽐라'라는 랩을 했는데

그것이 힙합커뮤니티인 힙합플레야, 디씨트라이브 등에 굉장히 유명했다. 지금은 유명한 '디스전'이 그때부터 있었다. 그는 OK본 이라는 사람을 디스해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아 더욱 유명해졌다. 나는 그의 팬이었고, 그의 음악과 가사를 사랑했고 그를 사랑했다.

그는 이후 비욘세에 이어 곧 나의 한국인 롤모델이 되었다.


그때 나는 흑인음악이 좋았고, 빠져들었으며 일종의 '뽕'에 취해 있었다. 한국발음으로 된 노래들은 더이상 듣고 싶지 않았고 간지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한국인이라는 딜레마에 빠져있었다.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 지 고민하기 보다는 무작정 수용하던 시기였던 것 같다.

그러면서 배움이라기 보다는 수용이라고 해야 하려나.


아직도 홍대에 가면 꼭 놀이터 풍경을 봐야 직성이 풀린다. 내가 다니던 호바와 클럽이 살아있는지 궁금해 둘러본다. 내가 음악을 사랑하기 시작한 곳. 많은 곳이 사라졌지만, 홍대 놀이터로 넘어가는 언덕, 거기서 쭉 오른쪽으로 내려 가면 즐비한 클럽과 유흥가의 풍경등은 아직도 나에게 위험한듯 강렬한 흥을 불러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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