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생각보다 많은 글들을 썼다. 그 사이 부끄럽지만, 후회는 없이 신춘문예에 도전도 해봤다.
일전에 올린 깜콩이를 주인공으로 재해석했던 나름의 단편 어른동화도 신춘문예에서 똑 떨어진 작품이다.
(하지만 언젠가 깜콩이를 위한 선물로 책으로 꼭 내고 싶어, 손이 나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그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물론 그 가치가 없으면 책으로 나올 수도 없겠지만.)
하지만 그 무엇보다 그 신춘문예에 도전한 사람은 사실 '엄마'다.
몇년을 준비하고 고대하던 작가님들에게 내가 비할바가 없었다. 내가 떨어질것도 엄마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 곳이나 엄마는 손목이 부러져 글씨를 쓸 수 없는 딸을 위해 함께 시를 읽어주고, 소설을 읽어주고 고쳐주고, 겉봉에 내 이름과 'OO일보 신춘문예 담당자 앞'을 써주었다. 집에서 700미터나 떨어진 우체국에 돈 한 푼 벌지 못하며, 부러져 아프다고 내내 징징거리는 손목으로 쓴 시를 무슨 마음으로 엄마는 봉투에 넣고 신춘문예 담당자에게 보내라고 하신걸까.
당일 특급등기가 마감이 되자 이참에 잘되었다며 서른 셋의 마지막 달을 보내고 있는 딸의 손을 잡고 난생처음 PC방에 함께가 푸른 불빛 아래 시를 읽는 엄마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돈 한 푼 벌지 못하는 상황에서 퀵비 만 이천원을 까먹어가며 봉투를 건네는 딸의 모습을 바라보는 심정은 어땠을까?
직장에서 마음 어느 한 곳 성한데 없이 두들겨 맞고 백수가 된 딸이 그렇게라도 하고 싶은게 있다는게 다행이라는 마음이셨을까? 너 하고 싶은거 다하라고 하는 그 말을 몸소 보여주고 싶으셨던걸까?
지금 생각해보면 '내 서른 셋 12월의 엄마'는 살아있는 문학이었다.
엄마는 소설의 한 챕터였고, 긴긴 한 편의 시였다.
우울증이 도지고 엄마를 피했다. 아니 어쩌면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소홀하다는걸 혼자 참지 못하고 하소연 하는 그 순간 부터 나는 엄마를 피해버렸다. 그걸 듣는게 너무 힘들었으니까. 깜콩이 얘기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금방 엄마와의 통화는 끊어버렸다. 내 마음 추스리기도 힘든 상황에서 가족 걱정이라니. 난 민폐끼치지 않으려 내가 아픈 거, 힘든거 다 숨기고 사는데, 저것까지 소화하라는건 너무 나에겐 가혹한 일이었다.
그러다 오른손목이 부러졌다. 내가 좋아하는 그림도 그리지 못하고 글도 쓰지 못하고 강아지에게 밥만 겨우 먹일 수 있었다. 백수가 되고 채울 수 있는 빈 시간을 채우기는 커녕 기본적인 일상생활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13년만에 엄마를 내 자취방에 불렀다.
강아지 털이 득실득실한 정리도 안 된, 설거지도 제대로 하지 못한 자취방. 특히 퇴사 2년전부터 병들어 온 마음때문에 엉망이 된 방에 엄마를 부른다는 것은 공포 그 자체였다.
그런 엄마는 이게 다 엄마가 신경을 못쓴거라며 묵묵히 청소를 시작하고 따뜻한 밥을 내오셨다. 강아지 똥이며 산책이며 아무말 없이 견뎌내셨다. 심지어 내가 너무 이해받고 싶은 마음에 나와 함께 내 정신과 주치의를 만나고 오셨다. 내 공황발작을 보셨고, 근종때문에 구르지도 눕지도 못하는 생리통에 몸서리치는 나를 묵묵히 보셨다.
한동안 '이력서'라는 서식에 맞춘 다른 글들을 쓰느라 글을 쓰지 못했다. 그리고 곧 당분간이 될지 긴 시간 새로운 환승버스가 될지 모르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딱 1년만이라도 쉬라고 그렇게 말하는 엄마 앞에서 또 서른 셋의 딸은 고집을 피우며 '담당자 앞'으로 지원서를 냈다.
오늘도 엄마는 날 위해 신께 보낼 봉투 위에 기도로 내 이름을 써서 내주신다.
어느날 한 번 쯤은 당선될 그 마음을 가득 담아 나를 대신해 부쳐주신다.
그리고 이렇게 서른 넷의 딸을 열넷의 딸처럼 오늘도 돌보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