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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희 Sep 19. 2021

결혼생활의 날씨

여류작가여서일까? 한강은 남편들이 흔히 범하는 아내에 대한 다그침, 명확한 또는 심각한 폭력은 아닐지라도 여성들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폭력성을 잘 포착하고 있다. 

“그 꿈을 꾸기 전날 아침 난 얼어붙은 고기를 썰고 있었지. 당신이 화를 내며 재촉했어. 제기랄 그렇게 꾸물대고 있을 거야? 알지, 당신이 서두를 때면 나는 정신을 못 차리지. 빨리, 더 빨리. 칼을 쥔 손이 바빠서 목덜미가 뜨거워졌어, 갑자기 도마가 앞으로 밀렸어. 손가락을 벤 것. 식칼의 이가 나간 건 그 찰나야.”(한강, 2007).


채식주의자의 주인공 영혜는 이 일이 있은 뒤, 무서운 꿈을 꾸게 되는데, 날고기와 피 그리고 자신의 얼굴인 듯 아닌 듯한 얼굴을 본다. 이 꿈을 꾼 뒤로 영혜는 고기를 먹지 못하게 되고 채식주의자가 된다. 영혜는 채식주의자가 됨으로써 가족과 불화하고 드디어는 자살까지 시도하게 된다. 


영혜는 고기를 먹는 것 때문에 자신이 악몽을 꾼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는 자신의 뱃속 얼굴 때문에 악몽을 꾸었음을 깨닫는다. 자신의 뱃속 얼굴은 자신의 진짜 마음(감정)이 아닌가 생각된다. 남편으로부터 사람대접을 받지 못함으로써, 영혜는 치욕감을 느꼈을 것이다. 영혜가 고기를 먹는 것 때문에 자신이 악몽을 꾼다고 생각하다가, 드디어는 자신의 일그러진 자아 때문에 자신이 악몽을 꾼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의 자아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일그러질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관료제적 지배 속에서 우리는 조직이 제시하는 작은 정체성을 받아들이면서 우리의 자아가 상처 받고 일그러지는 경험을 한다. 또한 가부장제 하에서 여성들은 남편의 일상적인 폭력과 통제로 인해 자아가 일그러지는 경험을 한다.


82년생 김지영은 작가의 경험을 어느 정도는 담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주인공 김지영은 출산과 육아로 인해 원하지 않지만 조직을 떠나게 되고 아이 돌봄을 전담하게 된다. 아이를 돌보는 너무도 소중한 일이 한 개인의 인생에 어떤 부정적인 궤적을 그려내는지를 소설은 잘 보여주고 있다.


채식주의자와 82년생 김지영 모두 돌봄 노동을 담당하는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채식주의자에서 영혜는 남편의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남편이 내뱉는 차갑고 무시하는 말을 듣고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 82년생 김지영에서 김지영은 아이를 돌보기 위해서 자신의 일과 꿈을 포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편하게 커피나 마시는 맘충이라는 비난을 듣는다. 이들 주인공은 모두 그들이 담당하는 돌봄 노동의 가치를 존중받지 못한다.


어떤 원로 학자께서,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에 대해, 세계적 문학이라면 갖고 있어야 할 사상이 없는 것 같다고 아쉬워하는 것을 어떤 인터뷰 기사에서 본 적이 있다. 그리고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에 대해, 소설이 갖고 있어야 할 서사가 없다고 하는 댓글을 본 적이 있다.


그 평에 대해, 나는 전문적인 평론가가 아니므로 논평할 입장은 아니지만, 채식주의자와 82년생 김지영 이 두 작품에 대해 그렇게 평을 한다는 것은 여성의 삶에 대한 이해가 매우 낮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여성들도 성장을 지속해 나가고 싶고, 성장과정에서의 서사를 왜 갖고 싶지 않겠는가? 돌봄 노동을 하느라,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되어 보지도 못하고, 주인공을 지원하는 역할에 그치는 경우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여성의 돌봄 노력은 가시적이지 않다. 여성의 경험과 감정은 보이지 않는다. 뚜렷하게 극복해야 할 상대도 없다. 극복해야 하는 것은 자신일 뿐이다.

혼자서 울고 웃고 해야 한다.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시간을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하면서 살아내야 한다.

물론 멋진 서사를 써내는 여성들도 최근에는 많이 생겨나고 있어서 기쁘게 생각한다. 그들의 인생을 응원하며 내 딸도 그런 멋진 서사를 만들어 나가기를 바란다.

많은 여성은 아직도 자신의 서사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이 그렇게 살아간다.

나의 글도 그런 것 같다. 어떤 상대와 대결을 하고 경쟁을 한 그런 이야기라기보다는 나 자신을 극복해 나간 이야기인 것 같다.

좌절감, 외로움, 무의미감 등을 극복해 나간 이야기인 것 같다.

내 딸이 그리고 여성 후배들이 삶의 어떤 모퉁이에서 지치고 힘들 때, 자신만의 삶의 의미를 찾아 나가기를 바란다.


돌이켜보면 결혼 후에 직면하는 어떤 상황은 날씨 같은 어떤 것이었던 것 같다. 남편의 폭언이 있었다고 하지만, 엄청난 가정폭력은 아니고, 어떤 날씨 같은 것이었던 것 같다. 결혼의 날씨는 따뜻하기만 하지는 않았다. 어떤 때는 너무 추웠고, 어떤 때는 너무 숨이 막혔다.


한편, 에드먼슨(Amy C. Edmondson)은 팀 심리적 안전의 중요성을 제시하고 있다. 심리적 안전 정도가 높은 팀은 그렇지 못한 팀에 비해서 더 높은 학습능력을 통해 더 높은 성과를 나타낸다는 것을 보여준다. 심리적 안전은 개인이 느끼게 되는 감정이나 생각을 두려움 없이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어떤 분위기를 가리킨다. 결혼생활에서도 가정마다의 심리적 안전이라는 것이 있고, 심리적 안전 정도가 높은 가정의 경우 행복 정도가 커지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남편의 거친 말투, 모든 문제를 아내 탓으로 돌리는 남편의 프레임, 그리고 남편의 나쁜 방어기제들로 인해, 내가 느끼는 가정 내 심리적 안전 정도는 그다지 높지 못했다. 나는 남편에게 두려움을 느꼈다. 나는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을 남편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다. 만약 내가 나의 진정한 선호나 계획을 남편에게 말하면 남편이 화를 낼 것 같아 두려웠다. 나는 PT를 받을 당시 남편에게 숨기고 운동을 했었다.


모든 아내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어떤 아내는 결혼생활 기간 동안, 많은 시간, 두렵고, 추울 것이다. 언젠가, 어떤 여성 연예인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후, 그가 사망 직전에 친구들과 만나서 했다는 말, “나를 집에서 꺼내 줘서 고마워”라는 말. 뉴스에서 그 말을 읽었을 때, 나는 몹시 마음이 아팠다. 그에게도 결혼의 날씨는 몹시 추웠던 모양이다.


내 딸과 여성 후배들의 결혼생활의 날씨가 늘 맑은 봄날이기를 바란다. 그런데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그 사실을 숨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들이 결혼생활의 날씨가 추우면 춥다고, 남편이 두려우면 두렵다고 말해 주면 좋겠다. 친구에게 가족에게. 그리고 결혼 속에서 추위를 느끼고 두려움을 느끼는 게 혼자만의 일이 아님을 알았으면 좋겠다. 마음껏 남편의 폭력성을 서로 간에 보고하고 공유했으면 좋겠다.


결혼이라는 날씨는 추울 수도, 비가 올 수도, 눈이 올 수도, 더울 수도 있다. 그리고 두려울 수도 있다. 그런 다양한 날씨와 두려움에 대비했으면 좋겠다. 그 모든 역동적인 날씨와 두려움에 대비해 따뜻한 옷과 친구와 우산을 준비하면 좋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편들이 아내를 돌봄 노동 전담자로 취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남편이 자주 돌봄 노동을 교대해 주면 좋겠다. 그리고 삶에서 아내들이 좀 더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다양한 선택지가 주어지면 좋겠다. 그래서 앞으로 나올 베스트셀러의 여자 주인공은 남편과 돌봄 노동을 공평하게 분담하면서 자신의 일에서 멋진 서사를 만들어 가는 사람이기를 기대해 본다.


<참고문헌>

Edmondson, Amy C. (2019). The Fearless Organization: Creating Psychological Safety in the Workplace for Learning, Innovation, and Growth. John Wiley & S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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