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경희 May 14. 2021

남편의 프레임

설거지거리가 너무 많아 힘들다고 하면,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설거지거리를 너무 많이 만들어.’ 또는 ‘당신은 설거지를 제때 하지 않고 쌓아 둬.’라고 했다. 내가 빨래가 많아 힘들다고 하면, ‘수건을 한번 쓰고 빠니까 힘들지.’라고 말했다. 남편은 내가 겪는 문제의 모든 원인이 아내인 나에게 있다고 생각했으며, 좀처럼 아내의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보거나 가사노동을 함께 하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남편의 이런 가정 또는 접근법을 ‘아내가 문제야 프레임’이라고 부른다. 남편이 ‘아내가 문제야 프레임’을 활용하는 경우, 나는 대부분 그 프레임에 끌려가게 되며, 내가 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더 열심히 가사노동을 하자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는 했다.

돌이켜보면 결국 프레임의 문제인 것 같다. 남편의 프레임.

프레임은 우리가 현실을 바라볼 때 사용하는 가정이나 믿음으로 구성된다(Edmondson, 2019). 남편이 나에 대해 갖는 가정이나 믿음이 나를 아프게 했다. 남편은 어쩐 일인지 나를 늘 부족한 사람으로 취급했다. 특히 내가 가사노동에 게으르다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가사노동의 책임은 일절 없다고 생각했고 가사노동은 전적으로 아내인 내 책임이라고 여겼다.

정희진이 “가장 친밀한 폭력”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한국 사회에서 가사노동은 여성의 임금 노동 여부에 상관없이 여성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의무로 간주된다.” 남편도 역시 그랬다. 나의 가사노동을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특히 결혼 초기에는 내가 가사노동에 서툴다는 것을 알게 되자, 나를 비난하고, 끊임없이 가르치려 들었다.

아내인 내가 가사노동을 책임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서인지 남편은 좀처럼 가족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나의 노력을 인정해 주지 않았다. 그는 놀랍도록 인정에 인색했다. 남편이 내 노력을 인정해 주지 않고 비난하기만 할 때, 나는 많이 슬펐다. 남편이 인정할 때까지 열심히 하려고 했고, 늘 나는 탈진상태였다. 그런데, 파스칼 샤보(2016)에 따르면, 인정에 대한 갈증은 직무 소진을 야기하며, 인정을 거부하는 행위는 폭력적인 형태의 권력 남용이다.   

  

“인정은 그들의 노력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알아봐 주고 그들이 더 나은 것을 성취했음을 인정해 줌으로써 비로소 그들이 겪는 어려움에 의미를 부여해 준다. 의식적으로 인정을 거부하는 행위는 가장 폭력적인 형태의 권력 남용에 속한다. 인정이란 인간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를 이룬다. 비웃음, 경멸, 무시를 일삼으며 인정을 거부하는 행위는 결국 상대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자존감을 뒤흔든다. 인정의 결핍이 주요 원인이 되어 발생하는 번아웃의 경우, 고통이 즐거움으로 변환되는 과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파스칼 샤보, 2016).     



한편, 상대에 대한 부정적인 프레임(관점)을 강요하는 것은 가스라이팅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에서 소개되고 있는 멜라니의 사례. 멜라니의 남편은 친구들을 집에 초청하기로 하고 아내 멜라니에게 자연산 연어로 요리를 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런데, 멜라니가 마트에 갔을 때, 양식 연어만 있었고 자연산 연어는 다 팔리고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멜라니는 자연산 연어 요리를 하지 못했다. 이에 남편은 화를 심하게 냈고 아내 멜라니를 비난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멜라니에게 말을 하지 않았다. 멜라니는 “남편의 비난은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증거라고 여긴다.” 멜라니는 “자신에 대한 상대방의 부정적인 견해를 그대로 수용해 더 이상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에서는, 가스라이팅을 차단하기 위해 해야 할 일들 중 하나로, ‘자신의 관점을 유지하라’고 제시한다. 가스라이팅 가해자의 관점에 지배되지 말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가스라이팅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나의 입장을 고수하라’고 제시한다. 예를 들어, 다른 남성의 관심을 받는 여자친구에게 남자가 엉뚱한 비난을 하는 경우, “나는 더 이상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 또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이 방에 있지 않겠어”와 같이 말하고, 그 입장을 고수하라는 것이다(스턴, 2018, 200).

가스라이팅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힘 부여하기’가 필요하다(스턴, 2018). 가해자의 부정적인 프레임(관점)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경우, "피해자는 자신이 무능하다는 느낌을 갖게 되고, 자신의 힘을 깨닫고 되찾는 것은 변화의 결정적인 부분이다"(스턴, 2018, 270). 나에게 힘을 부여하는 방법으로는 자신의 장점 열거해 보기,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 버리기,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을 피하기, 자신의 장점을 인정해주고 지지해주는 사람과 교류하기 등이 있다(스턴, 2018, 272).

여성이 남편감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하는 것은 집이나 자동차가 아니라 남성의 프레임이 아닐까. 아내를 인생의 평등한 동반자로 생각하는 것이 필수적일 것이다. 그리고 결혼으로 걸어 들어가는 여성이 준비해야 하는 것은 혼수가 아니라, 자신을 지켜주는 프레임이 아닐까. 남편이 자의적으로 들이미는 프레임을 깨뜨릴 아내 자신만의 프레임. 늘 아내 잘못이라는 남편의 프레임에 대해 반대할 수 있는 프레임.

최근에 와서는 “나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는 남편으로 인해 슬퍼하지 말자”고 생각하게 되었다. 남편이 내 노력을 인정하지 않는가? 아내인 우리도 그를 인정하지 말자. 무엇보다 남편의 프레임을 인정하지 말자. 편협한 그의 프레임을.     


<참고문헌>

샤보, 파스칼 (2016). 너무 성실해서 아픈 당신을 위한 처방전(허보미 역. 원저 Global Burnout by Chabot Pascal, 2013). 함께 읽는 책.

스턴, 로빈 (2018).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신준영 역. 원저 The Gaslight Effect by Robin Stern, 2007). 알에이치코리아.

Edmondson, Amy C. (2019). The Fearless Organization: Creating Psychological Safety in the Workplace for Learning, Innovation, and Growth. John Wiley & Sons.


작가의 이전글 섬세한 진보(발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