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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희 May 16. 2021

주방은 베이스 캠프

베이스 캠프를 지키는 일은 가족 모두가 함께

서울에서 일할 때이다. 설날 연휴 마지막 날, 모든 열차가 매진인데, 겨우 서울행 표를 한 장 구했다. 10시 40분, 광명행 열차, 대전까지는 입석, 대전부터 좌석이 있었다. 나는 머리를 감고, 머리를 말리려고 딸의 방에 들어갔다. 드라이어를 쓰려고 보니, 방바닥에 머리카락이 널려 있었다. 나는 청소기를 갖고 와서 청소를 했다. 아이의 침대 뒷 공간과 침대 아랫부분을 청소했다. 그리고 머리를 말렸다. 부엌으로 갔다. 전기압력밥솥에 있는 밥을 플라스틱 용기에 담았다. 구운 가자미 한 마리와 삶은 달걀 다섯 개, 그리고 약간의 김치를 챙겼다. 갈치조림을 하려고 손질해 놓은 감자 세 개도 챙겼다. 서울 집에 가져갈 음식을 챙기면서 우리 집 부엌이 ‘베이스캠프’ 같다고 생각하고는 혼자서 피식 웃었다. 언제는 부엌을 폐쇄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우리 집 부엌이 베이스캠프 같다니. 내 생각의 변화에 나 스스로 놀라워했다.

기차 탑승 시간이 다 되어서 설거지는 포기했다. 남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동대구역으로 갔다. 기차를 타고, 입석이니 통로에 자리를 잡았다. 통로에 있는 간이의자에 자리를 잡고 보니 나쁘지 않았다. 서서 갈 줄 알았는데, 이렇게 의자에 앉아서 가게 되니 행복해졌다. 남편에게 전화를 해서 나의 이 행복감을 설명해주었다. 그러자 남편은 부엌에서 정리 중이라고 했다. 설거지도 안 하고 가냐고 원망 섞인 말을 했다. 광명역에 내려 사당행 셔틀버스를 타고 낙성대역에서 내렸다. 거기서 관악 02 마을버스를 탔다. 그리고 서울대 후문 연구공원역에 내렸다. 그리고 BK 국제관(생활관)으로 들어갔다.

서울대 생활관에 도착했다고 남편에게 보고를 하고 대구에서 가져온 음식을 꺼냈다. 인덕션으로 대구에서 가져온 구운 가자미를 데웠다. 그리고 밥을 먹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눈물이 났다. 그동안 20여 년 동안 우리 집 부엌을 매일매일 지켜온 나 자신이 대견해서였다. 나는 부엌을 지키는 일이 몹시도 고달팠지만, 결코 도망치지는 않았구나. 그런데 또 한편 생각해 보면 남편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결국 우리 부부가 함께 힘을 모아 우리의 베이스캠프를 지켜온 것이다.

나의 서울 집인 생활관에는 프라이팬이 하나 있었다. 프라이팬을 데워서 기름을 두르고 대구에서 가져온 찬 밥을 데워 먹었다. 수저도 딱 한 벌이 있었다. 햇반 용기 세 개를 그릇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런 서울 집과는 다르게 대구 집에는 어머님이 담가서 나누어주신 김치가 있으며, 언젠가 어머님께서 우리 집에서 단지에 메주를 넣고 담가주신 간장과 된장이 있다. 그리고 언젠가 아버님께서 유튜브를 통해 터득하신 대로 담그신 고추장이 있다.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쌀이 있으며, 식용유와 참기름이 있다. 다양한 종류의 과일이 냉장고에 있으며, 간식거리로 다양한 종류의 과자가 있다. 그야말로 인생의 베이스캠프답다. 어머님 댁은 더 큰 베이스캠프이다.

대구 집에서 매일의 가사노동에 전전긍긍하며 살 때 나는 종종 주방을 폐쇄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또는 NO FOOD DAY를 갖고 싶다고 생각했다. 일 년 365일 돌아가는 부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매일매일 요리를 하고 설거지를 해야 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나는 나의 일과 아이들 돌봄 등의 일로도 이미 충분히 지쳤는데, 매일매일 부엌을 운영해야 했다. 하루하루 나는 지쳤다.

서울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 매일의 식사를 외식으로 해결한다는 것이 환상적으로 좋았다. 대구 집의 가사노동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좋았다. 약 넉 달 간 세끼의 식사를 모두 사서 먹었다. 그리고 다짐했었다. 나는 서울 집에서 절대로 요리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러던 어느 날 집에서 인덕션과 밥을 갖고 왔다. 주된 동기는 생활비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월급을 받으면 집에 약간의 생활비를 보내주고, 생활관의 월세를 내고, 나머지 돈으로 생활해야 했는데, 이따금씩 아이들에게 용돈을 보내주게 되면 나의 생활비가 모자라게 되는 것이었다. 내 생활비를 위해서 남편의 신용카드를 쓰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대구에서 음식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생활관에서 요리를 본격적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집에서 가져온 약간의 음식을 데워서 생활관에서 식사를 해 보게 되었다. 그런데 간단한 음식이지만, 기숙사 식당에서 사서 먹는 음식과는 또 다른 느낌이 들었다. 소박한 음식이지만, 맛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수도 없이 했던 말 ‘집밥이 맛있구나.’ 싶었다.

내가 그토록 폐쇄하고 싶었던 대구 집 부엌에서 나는 서울 집에서 먹을 이런저런 것들을 챙겨 왔고, 그 대구 집 부엌이 베이스캠프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베이스캠프에 감사했고, 어렵더라도 그 베이스캠프가 유지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첫째와 남편이 우리의 베이스캠프를 지키고 있었다. 첫째인 아들은 종종 나에게 전화를 걸어와서 요리 재료에 대해 묻고는 했다. 남편은 내가 집을 떠나면 설거지를 하며, 집안에 요리 재료가 떨어지지 않도록 인터넷으로 쇼핑을 했다.

서울 집에서 있다가 대구 집에 갔을 때, 부엌이 잘 정리되어 있고 전기밥솥에 밥도 있으며, 요리 재료도 적절하게 구비되어 있으면 행복했다. 내가 부엌을 도맡았던 긴 세월 동안에, 가족들은 그 베이스캠프 덕분에 행복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했던 일의 의미를 그제사 알게 되었다. 이렇게 소중한 베이스캠프를 폐쇄하다니. 내가 잘못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 소중한 베이스캠프를 지키는 구체적인 방법은 달라져야겠다. 20년 전부터 남편과 아이들이 베이스캠프를 지키는 일에 동참했어야 했다. 베이스캠프를 돌보는 일을 누군가에게 일임하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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