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철학생활(5) 철학과에서 생긴 일

철학과 새내기와 철학 입문자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졸업생의 철학 소개글

by 서희미


“철학과엔 진짜로 또라이 많아?”

“진짜 철학과 애들은 다시 태어나면 후레쉬베리가 되고 싶어해? 왜?”

“철학과 교수님들은 강의 스타일이 어떠셔?”

“근데 너네는 취업할 때 어떻게 해?”



철학과에 다니면서 대략 저런 질문들을 들었던 듯하다. 공개적으로 대답도 해 줄 겸, 오랜만에 학부 시절 추억도 곱씹어볼 겸 슬기로운 철학생활 마지막 포스트 주제를 철학과의 캠퍼스 라이프로 정했다. 앞선 포스트들보다 좀더 가볍게 힘을 빼고 철학과 다니면서 내 대학생활이 전반적으로 어땠는지 적어 보겠다. 이 주제는 좀 짧게 쓸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왜냐하면 나는 자발적 아싸였기 때문에, CC라든가 동아리라든가 축제 참여 경험 같은 흥미진진한 에피소드는 없기 때문이다. ㅋㅋ 그러니까 사실 이번 포스트는 보는 사람에 따라 철학과에서 아싸로 지내는 법이 주제일 수도 있겠다. ㅋㅋㅋ


물론 나에게도 철학과에 다니면서 기억에 남는, 아마 남들은 겪어 보지 못했을 독특한 경험들이 있다. 그러나 이걸 글로 옮기는 건 약간 고민이 된다. 학과에서 생긴 일인 만큼 나 혼자만의 경험이 아니라 동기들, 교수님들 등 주로 타인이 깊게 관여된 이야기가 많은데 나는 공개적으로 말해도 좋다고 허락받지 않은 남의 내밀한 인생사를 글감(또는 어떤 형태로든 자칭타칭 ‘예술’의 소재)으로 삼는 걸 굉장히 싫어한다. 그래서 어느 정도까지 서술하면 좋을지 아주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이번 포스트는 그렇게 추려낸 이야기들 한두 가지를 포함하되, 주로 학부 생활하면서 들었던 생각과 느낀 점·이제 막 대학 들어온 새내기가 참고할 만한 대학생활 팁 등을 이야기하는 포스트가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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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도 결국 대학의 한 학과일 뿐이다. 그냥 평범한 대학생들 모여 있다.

정말 철학에 열정이 있어서 온 학생들이 있는가 하면 그냥 수능 점수 커트라인에 맞춰 지원한 경우도 있고, 입시 원서 넣을 때 다른 학과에도 지원했는데 철학과만 붙었다거나, 아무튼 학생들이 철학과에 온 사정은 가지각색이다. 내 동기들이랑 바로 아래 기수 후배들은 철학하고 싶어서 온 학생들이 많은 듯하긴 했다.


그렇다고 또라이가 없냐면 그렇진 않다. 어느 학과든 마찬가지 아닐까? 사람이 모이면 꼭 한두 명은 이상한 애들이 섞여 있는 법이다. ㅋㅋ 물론, “철학과에 또라이 많아?” 라고 물어보는 건 뭔가 자기만의 세계가 확고하고 독특한 개성을 가진 그런 친구들이 많냐는 뜻일 것이다. 타학과 학생들의 성향이 구체적으로 어떤지 모르니까 비교해서 확실히 그렇다고 얘기하긴 어렵다. 그래도 개성이 뚜렷한 친구들을 꽤 본 것 같다. 정치적인 운동에 참여하는 학생도 있었고 사랑이라는 주제에 유독 열광하는 사람도 있었고 만화에서 튀어나온 캐릭터 같은 사람도 있었다. 나는 동기들과 두루 친하지 않았고 대화도 많이 나눠 보지 않았지만, 아직도 인상적인 몇몇은 기억에 남는다. ㅋㅋ 철학을 전공으로 삼아 공부한다는 것 자체가 뭐…… 각박한 현대사회의 기준에서는 좀 특이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현실적인 이유로, 철학과 학생들도 복수전공을 많이 한다. 주로 상경계열이고 문학 쪽 학과를 복수전공하는 사람들도 종종 보였다. 예술에 관심 있는 학생들이 많은데 예대는 대개 복수전공이 안 돼서 관련기관 인턴을 찾아보거나 졸업 후 진로를 따로 모색하기도 한다. 로스쿨 준비하는 사람도 꽤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이런 실정이다 보니 철학과의 진로는 참… 각자도생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ㅋㅋ 근데 솔직히 순수인문계열은 다 비슷하지 않을까. 취업을 염두에 둔다면 그냥 남들 다 하듯이 기술 익히고, 자격증 따고, 인턴 등 나중에 이력서에 한 줄 넣을 만한 활동들 미리 찾아서 하는 게 좋다.


그래서 댁은 하셨나요? 궁금하시다면 난 안 했다. 집에서 좀 하라는데도 진짜 싸그리 무시하고 아무것도 안 했다. ㅋㅋ 왜냐면… 신입생 때의 나에겐…… 대학원에 가겠다는 야심찬 포부가 있었으니까…. 이걸 보는 당신은 아마 날 또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ㅋㅋㅋ;


조금 변명을 하자면 난 대한민국의 입시 체제와 정말 안 맞는 학생이었다. 사실 맞는 사람이 드물 것이다. 하루종일 학교에 앉아서 공부하는 것보다 내 시야를 확장해 주지 않는 문제 풀이 위주의 반복 학습을 해야 한다는 게 너무… 힘들었다. 고등학생 때 정형화된 커리큘럼대로, 정해진 진도만큼, 달달 암기하면서 학습하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다가 대학에 와서 스스로 시간표를 챙기고 일정을 조정하며 공부하는 일에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학생들이 있다. 학과별, 강의별로 다르겠지만 시험이 논술형인 경우도 흔한데 이것도 처음엔 많이들 어려워한다. 나는 완전히 정반대였다. 난 대학에 와서 내가 공부를 이렇게 좋아한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아니 이렇게 재밌을 수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말을 했다니. 아 그렇지 그렇지, 나 이런 거 너무 알고 싶었어. 와 나도 이렇게 생각했어. 나 이거 글로 쓰라면 열 장도 쓸 수 있어. 철학과는 내 적성에 100% 들어맞았고 공부하는 재미에 푹 빠진 나는 거의 모든 강의를 앞자리에서 교수님과 아이컨택하며 열정적으로 들었다. 공부하느라 바빠서 자격증이고 뭐고 다 뒷전이었는데, 이 글을 보는 철학과 새내기가 있다면 하나만 조언하겠다. 공부하는 게 아무리 좋아도 최소한 어학은 꼭 미리미리 자격시험 보고, 대외활동도 귀찮고 쓸데없어 보이겠지만 웬만하면 한두 개 정도는 해라. 대학원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더더욱 미리 해라. 석사 하면 이런 거 할 시간 전혀 없다. 내가 당장은 학문에 뼈를 묻을 것 같아도 사람 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살아가면서 필요한 건 가능한 빨리 많이 갖추는 게 좋다. 학부 4년은 특히 정말 쏜살같이 흘러가므로, 공부만 하다가 막상 사회에 나와서 갑자기 맨땅에 헤딩하려면 많이 당황스러울 것이다. 나도 좀 미리미리 하라고 할 때 했어야 했다. 그랬음 지금 고생 약간 덜했을 텐데ㅋㅋㅋ 어른들 말씀 틀린 거 하나 없음.


철학하다 보면 아마 사회에서 통용되는 번잡스러운 자격들, 기준들을 많이 회의적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사회는 각 개인에게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할 것을 요구한다. 네이티브 수준으로 영어를 구사해도 한국에서 취업하려면 내 영어 실력을 증명하기 위해 토익 시험을 치고 수치화된 점수를 받아야 한다. 그 시험이 당신에게 아무리 쓸데없는 돈 낭비 시간 낭비처럼 느껴질지라도 말이다. 토익 900점 넘지만 회화 한 마디 못 하는 사람 널렸다. 그래도 그 사람은 토익 900점 받은 사람이다. 점수가 없는 사람보다는 사회에 진입하기 유리하단 말이다. ㅠㅠ


사실 수능도 비슷하다. 수능 점수가 낮은 학생이라고 그 학생이 무조건 무식하고 멍청한 학생인 게 절대 아닌데, 나처럼 대학 입시를 위한 공부가 너무 적성에 안 맞고 막상 대학에 가면 다른 누구보다 공부 잘할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일단 대학 문턱을 넘기 위해서는 수능 고득점이 필요하다. (막상 대학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고 특히 같이 조별과제 같은 걸 해 보면…… 대체 얘는 어떻게 대학에 왔나 싶은 학생도 참… 많다……….)


사회가 정해 놓은 기준에는 분명 무용하고 불합리한 부분들이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그 기준은 중요한 것이고 각자 다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 만들어진 것이다. 나도 이걸 진심으로 체감하는 데 오래 걸렸다. 살면서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 수는 없으니 함께 투덜투덜대면서 사회의 기준을 가능한 만족시켜 보자. 아니면 그 기준을 무시할 수 있는 능력자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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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는 학교 혼자 다닐 수 있나요?

사실 나는 어느 학과든 캠퍼스 라이프를 어떻게 꾸려 갈지는 각자 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한다. 난 평소에도 혼자 잘 다니고 밥도 혼자 잘 먹고 무엇보다 단체생활을 정말 안 좋아했기 때문에… 고등학교와 달리 대학이 내게 주는 큰 메리트가 바로 모든 걸 나 혼자 알아서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학부 때 문학하는 학과들 강의도 꽤 많이 들었는데, 이건 정말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문학하는 학과들에 비해선 철학과가 좀더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 보이긴 했다. 그래도 같은 해에 입학한 동기들끼리는 또 으쌰으쌰 잘 지내는 것 같았다. 근데 요즘은…… 또 어떨지 모르겠다. 당장 나 때부터 졸업앨범을 안 만들기 시작했는데 요즘은 대학 졸업앨범 대부분 안 하는 추세니까, 그만큼 대학에서 학과 내부 구성원들끼리의 결속이 많이 약해지지 않았을까 막연히 추측해 본다.


어쨌든 동기들은 아무래도 강의에서 계속 마주치므로 안 친해도 몇몇 눈에 띄는 학생들의 경우 얼굴이든 이름이든 약간씩 익숙해지게 된다. 교양강의에서 만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강의 같이 들을 친구가 없다고 들으려던 강의를 포기하는 짓은 안 하길 권한다. 어차피 조별과제 할 때 그 친구랑 한 조가 된다는 보장도 없고, 굳이 누군가와 함께 듣지 않아도 본인이 성실하게 강의 참여하면서 공지나 필요한 것들 잘 챙기기만 하면 정보를 놓쳐 고생할 일은 없다. 혼자 강의 듣는데 아파서 지난 시간에 빠졌다, 교수님께서 뭔가 중요한 공지를 하신 듯한데 모르겠다, 그럼 정중하게 교수님께 메일 드려서 여쭤보라.


나는 진짜 거의 모든 강의를 솔플했다. 공지 같은 거 놓치면 물어볼 만한 나름 친한 동기가 같은 강의를 들었을 때, 중간에 그 동기가 드랍하고 나가는 일도 있었다. ㅋㅋㅋ 타학과 강의 솔플할 땐 교수님께서 듣도 보도 못한 책들을 매 시간 과제로 내 주시면서 읽어 오라고 하신 적이 있는데 어떤 것들은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구할 수 있었지만, 발행부수 적은 어디 조그만 계간잡지 같은 곳에 발간된 글도 있었다. 그걸 파주 출판사에 가서 구할 수도 없고 텍스트 원본이 인터넷에 있을 리도 없고 진짜 멘붕에 패닉이던 와중에 어느 라디오 쇼케이스 같은 곳에서 그 글을 읽어주는 방송이 있어서 그걸 찾아 듣고 감상문을 적어 냈다. 맨 위에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글을 읽지 않고 낭독본 들었다고 적었다. 이거 찾느라 너무 힘들었으니까 다시는 이런 과제 내지 마시라는 의미에서…… ^^ 나중에 뒤늦게 전해 들었는데 그 학과 애들은 선배 통해서 그 글을 구해서 다같이 돌려 읽었다더라. ㅠㅠ 솔플하면 이런 어려움과 서러움이 좀 있긴 하다. 근데 결과적으로 난 그 강의 A+ 받았다. 자랑 맞다. ㅋㅋㅋ 이런 건 좀 자랑스러워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결국 솔플해도 열심히 하려고만 하면, 그리고 내가 열심히 했다는 티 팍팍 내면 손해 안 본다는 것이다.


철학과가 아니라 어떤 학과든 대학에서 당신이 혼자 다닌다고 뭐라고 할 사람 아무도 없다. 학식도 혼자 먹는 사람 널리고 널렸다. 하지만 동기들과 친해져서 손해 볼 것도 없다. 나는 자발적 아싸가 성격에 잘 맞고 모임이나 술자리를 싫어하기 때문에 이렇게 혼자 다닌 거고, 적당히 사람들과 어울려 가며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고 싶다면 그렇게 해라. 아마 그게 더 좋을 것이다. ㅋㅋ 나는 사실 자발적 아싸라고 말했지만 그래도 몇몇 동기들이랑 얼굴 트고 인사 정도는 하는 사이였다. 정말 은밀하고 조용히 솔플하는 사람도 꽤 있고, 마당발도 있다. 그리고 솔플하다가도 친구 사귈 수 있다. 나도 대학 시절 만나 지금까지 연락하는 친구들은 거의 솔플하다 만난 타학과 친구들이다. 어차피 모든 강의에는 서로가 서로를 잘 모르는, 나에게도 새롭고 그들에게도 내가 새로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jonathan-rados-Sbxt82CsMxA-unsplash.jpg 점심 뭐먹지


철학과 사람들은 우울하고 회의적인가?

모르겠다. 철학과 사람들이라고 싸잡아 말하지 말라. ㅋㅋㅋ 하나하나 다 다른 사람들이란 말이다! 예전에 트위터에서 무슨 설문조사를 했는데 철학과 학생들은 자기가 다시 태어나면 후레쉬베리가 되는 게 낫겠다고 응답한 비율이 높았다는, 뭐 그런 밈을 친구로부터 전해 들었다. 그때 친구는 내게 장난 삼아 너네 진짜 이래? 인간의 삶에 너무 회의적인 거 아니야?ㅋㅋㅋ 라며 웃었다.


저 밈이 왜 나왔는지 잘 모르겠지만 후레쉬베리는 학술모임, 세미나 등등에서 자주 제공되는ㅋㅋ 과자이기도 하니까… 오랜 시간 앉아서 정신이 아득해지는 남의 발표를 듣던 철학도들이 ‘아… 뭐라는지 모르겠다…. 당 떨어진다…. 여기 후레쉬베리가 있구나……. 후레쉬베리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왜 인간으로 태어나 이런 고통을 받고 있는가…. 후레쉬베리로 태어나는 게 낫지 않았을까…….’ 뭐 이런 의식의 흐름을 거쳤을지도 모른다ㅋㅋㅋㅋ 어쨌든 밈은 밈으로만 소비하자. 이름 어려운 철학자는 줄줄 외면서 후레쉬베리가 뭔지는 모르는 철학도도 많을 것이다.


철학과에서 내가 본 사람들은 괴짜 아니면 조용한 학자 스타일, 또는 평범하고 밝은 긍정맨들이었다. 철학과라고 하니까 막 심오한 것 같고 고뇌할 것 같고 인생을 엄청 부정적으로 바라볼 것 같고 왠지 칸트 같은 애 하나 있을 것 같고 니체 같은 애도 하나 있을 것 같고 그런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만, 편견이다. (있어도 난 가까이 안 했을 것임 ㅋㅋㅋ) 아까 말했듯 대체로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친구들이다. 다들 강의 끝나고 뭐 먹을지 고민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만약 다음 생에 인간보다 후레쉬베리가 되는 게 나을 것 같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끄덕일 확률도 높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ㅋㅋㅋ



albert-einstein-1933340_1920.jpg 이게...... 어렵니?


철학과 교수님들과 강의는 어떨까?

교수님들 성격도 강의 스타일도 참 천차만별이다. 진짜 무서운 호랑이 교수님도 계시는 반면 넉살 좋고 푸근한 교수님도 계신다. 그러나 인자하신 건 잠깐뿐이고 강의에선 인정사정 없는 경우도 있다.


어떤 교수님이든, 자기 성향과 맞든 맞지 않든, 많은 교수님들의 강의를 골고루 들어보라. 본인 대학교 철학과 홈페이지 교수진 소개란에 들어가면 교수님들의 약력이 주르륵 나온다. 발표하신 논문이 얼마나 많은지, 쓰신 책은 또 몇 권인지, 외국 어디에서 공부를 얼마나 하셨는지……. 그분들은 고졸인 학부생과는 애초에 상대가 안 되는 학문적 커리어를 쌓은 분들이다. 나도 성격적인 면에서 존경하지 않는 교수님이 있다. 그러나 그분이 이뤄낸 성과는 존경하고 존중한다. 성격이나 성향이 나와 너무나 맞지 않는 교수님을 만났을 때, 너무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과감하게 강의를 포기하고 그래도 꼭 들어야 하는 강의라면 그냥 무슨 소리를 하시든 적당히 걸러 가며 듣되 기본적인 것들만 지키자.


강의를 듣기 전 방금 말한 대로 본인 대학 철학과 홈페이지에서 교수진 소개란도 한번 훑어보고, 여유가 되면 학술DB 사이트에서 교수님께서 쓰신 논문도 들춰보라. 어떤 분야에 관심과 전문성이 있으신지 미리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렇게 찾아보고 배운 내용을 따로 질문하면 대학원에 들어오라는 권유를 받을지도 모르니 주의해야 한다. ㅋㅋㅋ


나는 다른 어떤 타학부 강의, 교양강의에서보다 철학과 강의에서 가장 질문과 토론을 많이 했다. 토론하다 그날 교수님이 정해 두셨던 진도 다 못 나가는 경우도 흔했다. 질문하는 데 망설임 없는 학생들이 많고, 강의 끝난 이후에도 여러 명이 줄지어 질문하곤 했다. 어떤 개념이나 이론을 새로 배울 때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내용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 그랬다. 교수님이 뭐라고 한 말씀 하시면 다들 더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고 반박을 하거나 자기 의견을 덧붙이고 싶은 경우도 많은 것 같았다. 그렇게 누구 한 사람이 물꼬를 틀면 다른 사람이 거기에 대해서 또 반박을 하거나 동의를 하기도 해서, 학생들 간 토론 역시 굉장히 활발했다. 다른 철학과도 다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게 철학과만의 유니크한 특성이라고 생각했고 이 분위기를 굉장히 좋아했다. 아예 처음부터 자신에게 논리로 도전해 보라고 학생들을 도발하시는ㅋㅋ 교수님도 계셨다.


철학과 강의에는 타학과생도 굉장히 많이 찾아온다. 다들 철학에 어떤 로망이 있는 것일까. ㅋㅋ 거의 대부분의 철학과 시험은 논술형이다. 묻는 질문을 배운 내용에서 정확하게 찾아 대답하되, 자신의 의견을 곁들이게 하는 문제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A와 B의 이론을 각각 간략하게 소개 및 비교한 다음 어느 쪽이 합당한지 본인의 의견을 밝히고 근거를 제시하라거나, C가 다음과 같이 주장한 이유가 무엇인지 또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쓰라거나. 중간고사는 리포트로 대체하는 경우도 꽤 많았고, 시험이 오픈북인 경우도 있다. 당연하게도 오픈북이라고 시험이 쉽지는 않다. ㅋㅋㅋ 길게 쓴다고 꼭 좋은 건 아닌데 시험지 앞뒤로 꽉꽉 채워 2장씩 쓰는 사람도 종종 나온다. 얼마나 써야 할지는 문제에서 묻는 내용에 따라 다르다. 나는 문제 자체가 간략한 답을 의도한 경우에는 문제 하나당 시험지 한 면의 반 정도를 채웠고, 이건 좀 할 말이 많다 싶으면 한 문제에 최소 한 면의 2/3 이상을 투자했다. 그렇게 두 문제를 푸는 데 시험지 한 장 반 정도 쓰고 나온 적이 좀 있었던 기억이 난다. 제한시간은 보통 한 시간 내외기 때문에, 무진장 힘들다.


논술형 시험이라고 채점의 객관성을 의심하는 학생들이 종종 있는데 다시 말하지만 채점하는 교수님, 조교님들은 우리가 쳐다볼 수 없는 학문적 커리어를 쌓은 또는 쌓고 있는 분들이다. 진짜 노력에 비해 성적이 너무 안 나와서 억울한 나머지 정정 메일을 보내는 걸 말리진 않겠지만, 채점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게 교수님께는 굉장히 무례하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내 의견을 쓰랬잖아. 의견에는 답이 없는 것 아닌가? 어떻게 의견을 평가한다는 거지?’ 그 의견을 주어진 시간 내에 잘 정리하여 논리정연하게 서술했는지 평가한다. 당신의 의견이 애초에 의견이라고 부를 수 없는 헛소리는 아닌지, 제대로 된 주장을 했다면 그 주장에 대한 근거가 있는지 그리고 그 근거는 얼마나 타당한 것인지, 근거라고 제시한 것들이 너무 빈약하지는 않은지. 주관식에서 채점할 사항은 끝도 없이 많다. 그리고 상대평가의 경우, 당신도 노력했겠지만 당신의 두 배 세 배로 노력한 사람도 있고 당신보다 글을 논리적으로 잘 쓴 사람이 많을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자. 물론 속이 쓰릴 것이다. 근데 공부 잘하고 머리 좋은 사람 진짜 많다…….


평소에 철학적인 글쓰기 연습을 좀 하고 싶은데 주제를 어떻게 잡을지 막연하다면 바깔로레아 시험의 철학 문제를 참고하는 것도 좋다. 강의 시간 외에 학과 구성원들과 함께 공부를 더 하고 싶다면 학과 내의 관련 학회에 참여하라. 우리 학교 철학과에도 예술철학회, 정신분석학회 뭐 이런 것들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보통 고문 교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따로 질문하기도 용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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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를 다니며 기억에 남았던 일, 즐거웠던 추억

짧게 쓴댔는데 또 엄청 길어졌다. 이제 마지막이다. 진짜 아직도 어떤 얘기를 할지, 이 얘기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이런 것들이 고민된다. 자칫 잘못하다간 너무 내 신상 특정되는 거 아니냐 싶고…… 혹시 동기가 내 글 발견하는 거 아닌가 싶고… ㅋㅋ 그래도 한번 적어 보겠다. 뭐 이 길고 재미없는 글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볼 것 같진 않으니까.


우선… 진짜 맥 빠지는 말일 수도 있는데 난 철학 공부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너무 즐거웠다. ㅋㅋㅋ; 나는 흥미가 생기지 않는 일을 억지로 시키면 정말 거부감이 심하고 잘하지도 못한다. 머리가 크면서 그래도 좀 체념하고 타협하는 법을 배웠지만 아직도 이런 경향성이 뚜렷하다. 그래서 난 좋아하는 것을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고 가능한 잘하려고도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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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저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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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변론』최후 진술 부분. 다시 봐도 비장하고 감동적이다
KakaoTalk_20210531_021802262_02.jpg 『파이돈』에서 논변 혐오자(misologoi)가 되지 말자고 당부하는 소크라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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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입문(기초) 강의 주교재 중 하나였던 프랑스 철학 교과서
상대적으로 필기가 부실한 논리학 교재ㅋㅋㅋ 프린트물을 많이 주시긴 했다.... 쪽지시험 겁나 못 봄ㅋㅋ


잠깐 서재에 가서 먼지 쌓인 전공서적들 몇 권 꺼내 살펴보고 왔다. 와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ㅋㅋ 나 공부 열심히 했네……. 진짜 즐거웠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이랑 『파이돈』은 강의시간에 학우들과 함께 강독도 했기 때문에(가끔 막 “뭬야?” 이런 대사 나오면 소소하게 다들 웃음 터짐ㅋㅋ) 더 기억에 많이 남는다. 아 논리학 교재는 펴자마자 진짜ㅋㅋㅋ 고통받은 기억만 떠오름ㅋㅋㅋㅠ 다시 보니까 원전에 해제도 다 달려 있고 주석도 풍부해서 아예 처음 읽는 사람들한테도 별로 안 어렵겠다.


불교철학 조별과제를 위해 조계사를 방문해서 사찰 관계자 분과 인터뷰했던 일도 가끔 떠오른다. 그때 조원이었던 동기들은 다들 뭘 하고 살까. 잘 지내고 있을까. 비가 오던 날이었는데 조계사 내부에 그렇게 들어가본 게 처음이라 인상에 깊게 남은 듯하다. 사찰, 불상, 탱화 등에 관한 설명을 많이 들었지만 이건 이제 기억이 안 난다. ㅠㅠ 당시에 찍었던 사진들 아직 남아 있는데 다른 노트북에 저장해 놔서 옮겨 오기 귀찮다…….


만약 누가 철학과 다니면서 가장 잊을 수 없는 경험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여름방학에 다녀온 아테네 해외 연수라고 대답하겠다. 약 2주? 였나 꽤 길게 머무는 동안 현지 교육기관에서 저기 위에 있는 플라톤의 『국가』를 영어판으로 읽고 공부했다. 지금도 영어 못하는데 그때는 진짜 너무너무너무너무 못해서ㅋㅋㅋ 엄청 힘들었다. 천병희 선생님의 번역서가 나를 살렸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테네에서는 공부도 공부지만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 힘든 시기였고, 나 자신의 성격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았기에 심적으로 불안정했는데 아테네라는 장소 자체로부터 크게 위로받았다. 이국의 풍경과 공기에서 비롯되는 설명할 수 없는 감각들이 있다. 로맨스 비슷한 에피소드ㅋㅋ도 있었지만, 트러블도 있었고, 사실 우울하고 나쁜 기억들 역시 꽤 떠오른다. 그러나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상쇄하는 쾌청한 하늘과 아름다운 지중해 바다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옛 신화의 배경 무대였던 폐허들과 먼 옛날 어쩌면 내가 아는 철학자들이 거닐었을 길을 따라 걸으면서 황홀해했고, 밤이 되어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는 짐 자무쉬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이때 찍은 사진들이 아직 내 수많은 SD카드들 중 어딘가에 남아 있을 텐데. 남아 있어야 하는데. ㅠㅠ 발견하면 나중에 꼭 아테네 여행기를 정리할 것이다. 직항도 없어 환승을 거쳐 간 먼 길이었지만 나는 정말 반드시 그리스에 다시 갈 것이다. 아테네도 그렇고, 가 보고 싶었지만 가지 못했던 델포이도ㅠㅠ 아무튼 아테네에 있을 때는 철학도로서 성지 순례하는 듯한ㅋㅋ 그런 기분도 들고 왠지 고향에 온 듯한 느낌도 들었다. 파르테논 신전 처음 봤을 때 눈이 휘둥그레해져서 ‘우와’ 하고 쳐다봤더니 인솔해 주시던 현지 튜터님이 “아이고, 얘 표정 좀 봐ㅎㅎ 나도 처음 여기에 왔을 땐 이랬어”라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철학도라면 기회가 될 때 언젠가 한 번은 방문해 보라. 나도 꼭 다시 가고 싶은 여행지다.






이걸로 <슬기로운 철학생활> 포스트는 끝이다. 몰랐는데 같은 제목의 책이 있더라… ㅋㅋㅋ 덕분에 내 글은 검색에 좀 덜 걸릴 것이다. 갑자기 누가 “혹시 이거 너야?” 하며 연락 올까 무서워할 걱정을 약간 덜었다. ㅋㅋ 당연한 소리랑 쓸데없는 얘기만 많이 늘어놓은 기분도 들지만, 어쨌든 또 뭔가 하나를 끝내고 나니 후련하다. 철학과에 들어오려는 당신에게, 이미 철학과에 다니고 있는 당신에게, 또는 철학하려는 당신에게 내 글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기를 바란다. 첫 포스트에 적었듯 내가 잘못 전달한 정보가 있다면 부디 정정해 주시고 이 긴 글을 다 읽어 주셨다면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이걸 다 보실 정도의 인내심이라면 철학도 잘하실 거예요. ㅋㅋ 철학과 더불어 즐겁고 좋은 추억을 많이 남기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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