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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희미 Aug 26. 2022

『파크애비뉴의 영장류』리뷰

뉴욕 어퍼이스트사이드, 화려한 정글과 지난한 생존기


표지 상단에 ‘뉴욕 0.1% 최상류층의 특이습성에 대한 인류학적 뒷담화’ 라는 문구가 있는데 이 책의 훌륭한 요약이다. 표지가 풍기는 분위기처럼 전체적으로 산뜻하면서 가십을 읽듯 술술 읽히지만 결코 가볍게만 볼 수는 없는 책이다. 책날개 소개에 따르면 저자 웬즈데이 마틴은 예일대 출신으로 문화연구와 비교문학 박사학위 소지자이며 뉴욕에서 20년 이상 작가 겸 사회연구자로 활동한 인물이다. 이름만 들어도 아는 미국 내 메이저 언론사에 다양한 주제의 원고를 기고해 왔고, 광고 및 마케팅 분야에서 일한 경력도 있다. 성공한 문과계열 커리어의 표본 같은 약력이다. 심지어 뉴욕에서도 부촌으로 유명한 어퍼이스트사이드에 살았다니, 거의 드라마 속 주인공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아온 저자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본인이 살던 동네 뒷담화를 책으로 펴내기까지 했을까?


직접 겪은 특정 집단 내 사회현상을 문화인류학과 접목시켜 논하겠다는 야심찬 기획을 통해 구성된 책이지만, 막상 저자는 인류학 전공자가 아니다. 저자의 어머니가 문화인류학과 사회생물학에 매료된 사람이었기에 그 관심사를 물려받아 어린 시절부터 해당 분야의 이론들을 접해 왔다고 한다.


저자는 20대 어느 무렵에 박사학위 취득을 위해 고향을 떠나서 뉴욕으로 간다. 그리고 30대 중반에 뉴욕 토박이인 남자와 만나 결혼했다. 저자와 남편은 뉴욕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뉴욕에 가정을 꾸렸고 한 아이의 부모가 되었다. 9·11 테러로 미국 전역이, 특히 뉴욕이 혼란에 빠지자 부부는 더 안전한 생활을 위해 어퍼이스트사이드(Upper East Side)로 이사한다.



지도를 보면 맨해튼 한복판, 센트럴 파크와 이스트 리버 사이에 위치한 지역이다. 입지상 노른자 땅일 수밖에 없는 지역. 대부분이 금수저였던 드라마 <가십걸> 속 등장인물들이 이 동네 고등학교에 다녔다. 센트럴 파크와 인접한 피프스 애비뉴(5th Avunue)는 명품과 패션의 거리로 유명하고(흔히 5번가라고 불린다) 그 아래 매디슨 애비뉴(Madison Avenue)는 한때 광고업계의 메카로 통용되던 거리다. (현재는 영 앤 루비컴Young & Rubicam을 포함한 많은 대기업들이 다른 위치로 이전했지만, 뉴욕 패션업계가 브라이언트 파크를 마음의 고향으로 생각하듯이 광고업계는 매디슨 애비뉴를 마음의 고향으로 생각한다) 저자가 살았다는 파크 애비뉴(Park Avenue)에는 입 떡 벌어지는 가격의 부동산과 고급 호텔이 즐비해 있으며, 남쪽으로 내려가면 그랜드 센트럴 역(Grand Central Terminal)이 나온다.


미드나 영화에서 맨해튼 지리를 묘사할 때 업타운 다운타운 이런 명칭이 흔히 등장한다. 센트럴 파크 남쪽 경계인 59번지(59th Street)를 기준으로 위쪽을 업타운이라 부르고(말 그대로 북쪽에 있는 윗동네란 뜻이다) 59번지 이하부터 14번지(14th Street)까지를 미드타운, 14번지 이하 남쪽 지역을 다운타운이라 부른다. 센트럴 파크 양 옆에 나란히 위치한 어퍼이스트사이드/어퍼웨스트사이드는 당연히 업타운이다.


이 윗동네, 즉 업타운에 사는 사람들은 같은 맨해튼 주민들 사이에서도 별세계 사람들처럼 취급되는 모양이다. 저자에 따르면 업타운으로 이사할 거라는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아랫동네 친구들은 마치 내가 사이비 종교에 가입할 계획을 누설하기라도 한 것처럼 반응”(p.43)했다.



사진 직접 찍음 / 웬즈데이 마틴 저, 신선해 역, 사회평론 출판


그 반응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저자가 이사를 결심하고 집을 알아보는 단계부터 이미 뭔가 범상치 않다. 어퍼이스트사이드에서 괜찮은 집을 고르려면 ‘구매자 측 중개인’이 따로 필요하다. 실구매자가 다짜고짜 부동산에 찾아가서 집 알아보려고 하는데요! 얘기한다고 원하는 집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맨해튼 고급 부동산 거래 시장에는 암묵적인 룰이 있다. 시장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실구매자인 사모님들이지만, 거래 과정에서는 그 사모님들에게 고용된 중개인들이 직접적인 물색 업무를 떠맡는다.


구매자 측 중개인과 판매자 측 중개인은 서로의 고용주가 얼마나 ‘큰 손’인지 간접적으로 드러내기 위하여 온몸을 화려하게 치장하고 나타난다. 부동산 중개인들이 몸에 두른 아이템은 그들의 고객이 어느 정도 지위의 사람인지 대변하는 지표가 된다. 이 부분을 읽는 동안 꼭 시대극 속 귀족 사회를 보는 것 같았다. 마님들은 부채 아래 얼굴을 숨긴 채 우아하게 한 발 뒤로 물러나 있고 아름답게 꾸민 시녀들이 대리로 앞에 나서서 이것저것 재고 따지며 각종 거래나 업무를 척척 도맡는 장면이 연상됐다.


부동산업계의 언어는 옷차림이다. 판매자 측 중개인의 옷차림은 판매자에게 씌워주고자 하는 위엄을 나타내며, 구매자 측 중개인의 옷차림은 잠재 구매자의 이미지를 반영함으로써 양측에 진지한 구매의사를 전달한다.
(…) 그 첫날, 네댓 군대의 아파트를 둘러보면서 만난 중개인들 상당수가 샤넬 백을 들고 있었다.  (p.51)


돈이 많다고 무조건 거래가 성사되지도 않는다. 어퍼이스트사이드의 완벽한 아파트들(코옵co-op 건물)에는 입주자운영위원회가 있어서 자신들의 공간에 또다른 식구를 받아들일 때 이것저것 깐깐하게 따지고 든다. 아파트에 입주하려면 이 입주자운영위원회와 사전 인터뷰를 거치고 승인받아야 한다. 부유하다고, 명성이 있다고 입주가 허가되는 게 아니다. 심지어 전 세계인이 다 아는 연예인이라고 해도 입주자운영위원회의 승인을 받지 못하면 집을 구매할 수 없다. 또 아파트 구매 과정에서 구매신청서라는 것을 쓰는데 저자의 경우에는 ‘신용카드 번호, 대학교 학점, 구매자와 구매자 부모님이 다닌 학교, 구매자 자녀가 다니는 학교’(p.72)까지 써야만 했다.


어쨌든 이런 아파트들은 입주 조건이 미친 듯이 까다롭다는 것만 빼면 여러 조건을 따져 봤을 때 완벽한 아파트다. 하지만 집값 비싸기로 유명한 동네인데도 불구하고 완벽하지 않은 아파트가 더 많다.


매매가로 따지면 애틀랜타나 그랜드래피즈의 수영장 딸린 저택에 맞먹는데도 어퍼이스트사이드의 아파트는 대체로 실망스러웠다. 늘 같은 식이었다. 파크 혹은 매디슨 혹은 피프스애비뉴라는 ‘특권층’ 주소에 화려하고 번쩍거리는 로비와 관리직원들을 갖춘 건물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아파트로 들어서면……, 정신이 아득해졌다. 내 눈을 의심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퍼이스트사이드의 멋들어진 여자들이 이런 데서 산다고?’ 몇몇 아파트는 모델하우스를 방불케 할 정도로 완벽하게 깔끔했지만, 대부분 아니면 상당수가 은근히 혹은 대놓고 방치된 상태였다. (p.57)


미친 듯이 비쌀 게 뻔한 부동산이 저래도 되나 싶지만 잘 생각해 보면 서울도 사정이 비슷하다. 집값하면 따라올 지역 없는 강남권에도 외관상 쓰러지기 일보직전인 구축 아파트들, 연식이 얼마나 먹었는지 짐작하기조차 어려운 낡은 건물들이 억 소리 나는 경우가 많으니까. 저자는 어퍼이스트사이드의 집을 돌아보는 과정에서 커다란 깨달음을 하나 얻게 된다. 바로 여기 사는 사람들이 집을 파는 이유다. 맨해튼 최정점, 가장 부유하고 안전한 동네에 살면서 대체 뭐가 아쉬워서 이 집을 내놓고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일까? 대체 왜?


정답은 모든 사람이 평생에 걸쳐 그 최정점의 부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퍼이스트에 사는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은 평생 돈 걱정이라곤 할 필요 없는 최고의 부자들일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 어떤 사람들은(물론 이들도 일반인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부자겠지만) 어퍼이스트사이드의 생활을 몇십 년씩 유지하는 일이 재정적으로 다소 버겁다. 그런데도 부담스러운 생활비를 감당하면서도 오랫동안 어퍼이스트에 붙어 있어야만 했다. 자녀들을 좋은 학군에서 교육시키고 최고의 대학에 보내야 하니까. 이 또한 어디서 많이 들은 익숙한 이야기다.


애들이 다 커서 독립한 뒤에는 걱정이 없을 것 같지만, 슬슬 경제 생활에서 은퇴할 나이가 된 중장년층이 어퍼이스트사이드의 넓은 집에서 가정부 끼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기에는 역시나 부담이 크다. 가정부를 자르지 않고 계속 편안한 생활을 유지하면서 살려면 생활비가 좀 덜 드는 동네로, 더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가야 한다. 결국 그들은 별로 내키지 않음에도 어쩔 수 없이 어퍼이스트사이드를 떠나게 된다. 그나마 자녀들이 아이비리그를 졸업하고 사회에 편입되었으니 좋은 학군의 덕은 톡톡히 본 셈이다. 성공한 자녀들은 아마 대를 이어 다시 어퍼이스트사이드에 입성할 것이다. 부모보다 더 큰 부를 축적했다면 평생 그곳에서 살 수도 있다.



이제 겨우 책의 도입부를 지났을 뿐인데 벌써 혀를 내두르게 된다. 이 뒤로는 아이를 좋은 학교에 입학시켜 탄탄대로를 만들어 주기 위해 어퍼이스트사이드의 엄마들이 얼마나 고군분투하는지 그 험난한 입학 전쟁 과정이 생생하게 묘사된다. 그 다음 장에서는 저자가 업타운에서 무시당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갖은 애를 써서 버킨 백을 구매하는 속물적이면서도 처절한 에피소드가 펼쳐진다. 또 이어지는 장에서는 여성의 외모가 극도로 대상화된 특수한 집단적 분위기 속에서 일종의 의식처럼 부상한 치장·미용·피트니스가 얼마나 묘하고 기괴한지, 그렇게 만들어낸 완벽한 외모가 여성들에게 신체적/정신적으로 얼마나 나쁜 영향을 끼쳤는지, 부부 간 권력의 구도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예리하게 짚어낸다. 남부러울 것 없는 이 부유하고 화려한 사회에 알콜중독이 얼마나 만연한지, 뉴욕 특권층의 여성들이 어떤 방식으로 미국의 정상가족 규범과 모성 신화에 편입되고 또 그것들을 재생산하는지도 보여준다.


2015년에(국내 번역서 초판은 2016년) 출판된 책이지만 여전히 시의성 있는 주제이며, 저자가 관찰 및 분석한 ‘뉴욕 특권층의 정서와 생태’가 한국 사회 기저에 깔린 가부장제·출세주의·루키즘과 상당 부분 일맥상통한다고 느꼈다. (노파심에 첨언하는데 이 말을 오독하여 자부심을 가지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정서가 뉴욕 특권층의 정서와 겹치는 부분이 많다고 해서 한국 사회가 ‘특권층처럼 고급스럽고 특별하고 트렌디하고 세련된’ 사회라는 얘기가 아니다. 폐쇄적인 특권 집단의 특수한 정서 및 생태를 국가 단위로 공유한다는 것은 자부심을 가질 일이 아니라 이상한 일이다. 어느 국가나 특권층은 유별난 소수이기 마련인데, 특권층이 아닌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이 책에 나온 어퍼이스트사이드 사람들처럼 ‘남의 눈치에 필요 이상으로 민감하고 속물적이고 입신양명에 집착하며 화려한 겉모습과 달리 정신적 결핍과 불안에 시달리는’ 사회는 얼마나 병적이고 기묘한가. 사람 사는 곳 다 똑같다고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버킨 백 에피소드가 나오는 3장에서 저자가 점점 어퍼이스트사이드의 비상식적인 관행들에 물들어 가는 스스로의 모습(둔감화habituation)을 담담하게 설명하는 대목은 현실적으로 이해가 되면서도 소름이 돋았다. 저자는 어느 순간 예전의 자아를 잃어버리고 다른 어퍼이스트사이드의 엄마들처럼 “매끄럽고 윤기 나는 금발머리를, 버킨 백을, 바버 재킷을, 기발하게도 고양이 얼굴이 수놓인 에메랄드그린 색상의 샬롯 올림피아 플랫슈즈를 원하는 여자”(p.166)가 되어 버렸는데 그 변화로 인해 오히려 삶이 더 편해졌다고 고백한다. 외압으로 둘러싸인 환경에서 저항은 고통스럽고 순응은 달콤하다. 저자의 상황에서만 통용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나는 5장 「특이습성: 자유를 잃은 여자들」과 6장 「이상행동: 예쁜 알코올 중독자들」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5장에서 저자는 행사를 위해 구두를 새로 사야 했고 쇼핑을 하러 나간 일화를 소개한다. 가게에서 무척 예쁘지만 굽이 지나치게 높아 몇 걸음 걷지도 못할 듯한 구두를 발견했다. 거금을 주고 이 구두를 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데, 점원이 충격적인 이야기를 건넨다. 너무 충격적이라 저자뿐만 아니라 읽는 나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런 구두는 잠깐씩만 신는 거예요. 말씀하신 모임이 장시간 이어지는 행사라면 미리 ‘주사’를 맞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죠.”
  뭐라고요?
  그가 웃으며, 밤새도록 킬힐을 신을 수 있게 발을 마취하는 주사에 관해 들어본 적 없느냐고 되물었다. 듣자 하니 이곳과 할리우드에는 여성이 하이힐을 원 없이 신을 수 있게 해주는 족부 전문의들이 있으며, 나도 돈만 내면 주사를 맞고 하이힐 위에서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는 얘기였다. (p.218)


저자가 관찰한 특권층 여성들은 말 그대로 신경을 마비시키고 뼈를 깎아 가며 노력해 완벽한 외모를 얻는다. 그리고 그 대가로 “표정과 더불어 교감 능력을 잃었고, 공복감과 운동 습관이 몸에 배었다.”(p.236) 밖에서 보면 대체 왜 저래? 싶은 그들 세계만의 엄격한 지표와 잣대가 모든 평가와 판단의 기준이 된다. 마크제이콥스 백 따위를 든 여자는 어퍼이스트사이드 부동산 실구매자인 ‘사모님’일 리가 없고, 에르메스 백을 들지 않은 여자는 코웃음이 나오는 ‘가소로운 상대’가 되며, 모델처럼 탄탄하고 완벽한 몸매를 가져야 ‘동족’으로 인정한다.


외모와 품위에 대한 강박은 집단 내 다른 여성들과의 관계에서 비교 우위를 점거하려는 의도도 지니고 있지만, ‘이 정도는 해야 이 집단에서 도태되지 않는다’는 내적 불안감의 발로이기도 하다. 특권층의 세계에서 이처럼 기형적인 외모 가꾸기와 품위 지키기는 당연한 일이므로 스스로를 특권층으로 정의하려면 반드시 준수해야 하는 규범이자 고결한 의식인 것이다. 몇 걸음 떨어져 관망하는 입장에서야 비정상으로 보이지만 그들 세상에서는 이게 정상이다. 그들의 모든 기행은 규격화된 정상성에 편입되려는 발버둥이다.


정상성에 집착하는 이 특권층 여성들은 당연히 가부장제를 근본으로 하는 미국의 정상가정 신화에도 집착한다. 남자에게는 남자만의 영역(바깥일)이 있고 여자에게는 여자만의 영역(내조)이 있다. 남자가 돈을 벌어 오면 여자는 그 돈을 받아 쓰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살림을 관리한다. 가정 내 권력은 자연스레 자본 공급자인 가장(남편)에게 집중되고 자본을 공급받는 입장인 여성들은 그 가장의 권위에 종속된다. 이러한 종속성dependency은 폐쇄적인 사회 내부의 여러 경쟁 스트레스와 더불어 여성들에게 큰 정신적 불안/공포를 불러일으킨다.


(…) 주변 엄마들을 관찰하고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식사하거나 술잔을 기울이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더 뚜렷이 보였다. 그녀들의 삶과 행복과 정체성은 전적으로 타인에게, 그리고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들에 달려 있었다.
  그녀들은 남편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밤잠을 설치는 이유가 그것임을 알든 모르든, 어쩌면 남편이 다른 여자를 만나 자신을 버릴지도 모르는데 남편 없이 혼자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단순한 자각이 공복으로 인한 통증만큼이나 고통스럽게 그녀들을 갉아먹고 있었다. (p.281-2)


이렇게 의존적인 아내들이 본인의 능력이 부족해 ‘취집’한 사람들이냐면 그렇지도 않다. 같은 페이지에서 저자가 일례로 든 한 여성은 아이비리그 대학 수석 출신에 MBA 학위 소지자였다. 저자처럼 최소 중산층 이상 집안에서 교육받고 자랐으며 엘리트 코스를 밟고 비슷한 수준의 반려자를 만나 결혼한 후 특권층의 삶을 사는 여성들, 말 그대로 별세계 여성들이다. 그런데도 마치 빅토리아 시대 여성들처럼 가장의 권위에 전적으로 의존해서 사는 것이다. 그 결과 온갖 신경증에 시달리고 약물과 알콜에 중독된다.


(…) 성비가 유리한 환경에서 가정의 경제권을 쥐고 의존적인 아내와 더 의존적인 자녀들을 거느리는 어퍼이스트사이드의 특권층 남성은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다. (…) 남편 돈으로 생활하는 것이 괜찮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인간과 비인간 영장류에 관한 비교연구에 따르면, 그런 방식으로는 밥벌이하는 자의 권위를 살 수 없다. 이를 잘 알거나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기에, 남편의 권위와 자신의 권위 사이에 있는 심연 같은 차이를 감지하는 것만으로도 생각 있는 여자들은 밤잠을 이루지 못할 수 있다. (p.243)


나는 내가 인상 깊게 읽은 구절들만 인용했지만 책 속에서는 더 광범위한 관찰과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엄마로서 다른 엄마들과 어떤 방식으로 교류하는지, 자녀를 둘러싼 엄마들의 사회에 얼마나 쟁쟁한 정치적 관계가 도사리고 있는지, 엄마들 간의 유대감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도 이 책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자녀가 있는 독자는 나보다 공감할 만한 대목이 많을 듯하다.






<가십걸> 같은 뉴욕 상류층 그사세 동네 사람들 이야기에 흥미가 있는 독자라면 잡지 보듯 술술 넘겨 가며 적당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하지만 버킨 백 들고 다니는 1세계 백인 엘리트 특권층의 고충에 별 공감이 가지 않는 독자라면 저자가 굉장히 모순적이고 가증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저자의 개인적인 경험을 반영한 회고록이라는 점에서, 또 관찰자(저자)와 관찰 대상이 어퍼이스트사이드 거주민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이 은 결코 객관적인 연구 보고서가 될 수 없다. 문화인류학적 접근법 자체도 본격적이라기보단 피상적인 수준이고 비판적 통찰과 방어적 자기정당화가 아이러니하게 공존한다. 유효하고 인상적인 논의들을 내포했지만 표지에 달린 부제대로 ‘뒷담화’의 성격이 더 강하다. 바꿔 말하면 ‘뒷담화’임에도 불구하고 유효하고 인상적인 논의들이 존재한다. 무엇에 중점을 둘지는 독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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