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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주쌤 Apr 04. 2024

이대 과잠을 샀다

꼭 한 번 대학교 굿즈란 걸 몸에 걸쳐보고 싶었다.



내가 나온 학교는 전공과가 딱 하나뿐이다. 부지가 넓지 않아 캠퍼스 안 어디에서나 2분만 전력질주하면 각 건물에 도착할 수 있을 정도였다. 수강신청 절차가 아예 없이 매 학기마다 같은 학년의 모든 심화과정 학생들의 시간표와 강의계획서를 묶어 만든 A4 20장 정도 되는 소책자를 제공받았다. 복수전공이나 부전공 따위는 꿈도 꿀 수 없었다. 학교 굿즈 따위도 없었다.



학창 시절 꿈꾸던 캠퍼스는 넓고 넓은 땅에 역사를 간직한 멋진 건물들이 세워진 그런 곳이었다. 머리를 맞대고 토론하며 공부할 학우들을 상상했다. 그런 학교에 다니는 나를 상상하는 건 매일의 학습을 지속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현실은 고등학교 4학년이라 부르는 지방 교대생. 주말마다 경기도에 있는 집에 올라가 학교를 그만 다니고 싶다며 새벽까지 아빠와 다투었다.



그랬기에 과잠에 대한 나의 로망은 깊어만 갔다. 해외 유명대학이나 국내의 큰 대학의 이름이 적힌 야구잠바나 후드티를 입은 학생을 TV에서 보았고 서울 근처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대학에 가면 그런 거 하나쯤은 입고 싶었다. 뭐랄까. 대학생이라는 느낌? 그 학교 일원이라는 감각? 그런 게 부러워서 우리 학교에도 굿즈가 있으면 좋겠다고 여겼다.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학교지만 후드티 하나 정도는 입고 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나의 로망은 사라지지 않고 최근 몇 년 전까지도 '어느 대학이든 가서 굿즈를 사서 입고 싶다'라는 말로 표현되어 나왔다. 마흔이 넘어서도 대학교 로고나 이름이 박힌 야구잠바를 입고 싶은 내게 주변 사람들은 별로 동조해 주지 않았다. 일단 어깨가 넓어서 안 어울린다고 말렸다. 이왕 입을 거면 잘 어울리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거다. 또 다른 이는 소속의 표시로 입는 것인데 그 학교 학생이 아닌 사람이 입는 것이 좀 이상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같은 값이면 다른 브랜드를 입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하는 말마다 다 맞는 말이라 반박도 못하고 마음속에 숨겨뒀던 꿈을 드디어 실현했다. 굿즈가 있는 학교의 대학원생이 되었으니까! 으흐흐 기념품샵에 들러 야구잠바를 모양대로 색깔대로 크기대로 다 입어보 고나니 더욱 사고 싶다는 열망이 생겼다. 


하지만 대학교 기념품샵에 파는 이런 굿즈들은 학부생들이 주로 입고 다닌다는 마지막 만류가 있었다. 그래서 숙고했다. 이렇게 2년 후에 졸업할 때까지 과잠을 사지 않는다면 나는 후회할까? YES. '분명히 후회할 것이다'라는 결론이 나자 당장 사기로 결심했다. 


새 학기 첫 주, OT가 빨리 끝났기에 얼른 굿즈샵으로 뛰어갔다.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사이즈를 골랐다. 두꺼운 것과 얇은 것이 있었는데 당장 입고 싶어서 두께가 있는 것으로 구매했다. 입고 올라갔던 롱패딩과 기타 짐들을 학교 안 우체국에 가서 택배상자에 넣어 부쳐버리고 과잠을 꺼내 입었다. 


드디어 느껴지는 포근함. 안감이 누비로 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겠지만 뭔가 이제야 이대생이 된 것 같은 기분이랄까? 이화여대라는 큰 공동체에 들어간 것 같은 신기한 감각이 느껴지면서 '존재를 입는다'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깊이 체험할 수 있었다. 마음 깊이 한 점 남김없이 만족스러웠다.


과잠은 사실 '같은 학과'라는 동질감을 높이기 위해 과별로 잠바(점퍼)를 주문하는 경우에 사용하는 말이다. 내가 사입은 옷을 정확히 말하면 이대 굿즈샵에서 판매하는 단체복 중 야구잠바 스타일의 옷을 산 것이라 학잠이라 해야 하겠지만 그냥 '과잠'이라고 혼자 부르는 것이니 참고하시면 좋겠다.


사입은 그날 이 글을 다 써놓고 초큼 부끄러웠다. 너무 좋아하는 내가 글을 제대로 썼나 싶기도 하고 대학원생들은 잘 안 입는다는 야구잠바를 산 것이 약간 걱정되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지난 3월, 내가 학교에 가는 날마다 비가 오고 기온이 낮아 따뜻한 '과잠' 혜택을 톡톡히 봤다. 그걸 입고 교정을 누비는 학생들이 체감상 1/2 정도는 되는 느낌이라 그 안에서 나는 굉장히 자연스러웠다. 


3월 말, 일반대학원 카페에 드디어 진짜 '과잠'에 관한 공지가 올라왔다. 학과별로는 아니지만 일반대학원 전체 학생들 중 원하는 사람에 한해 기모 없는 후드집업 디자인의 단체복 주문에 관한 것이었다. 마지막 학기 학교를 다니고 있는 동생을 꼬셔서 같이 입기로 하고 주문서를 제출했다.


그렇다. 나는 올봄, 이화여대에 대학원생으로 입학했다. 왜 마흔다섯 살이나 먹고 다시 학생이 되었는지 그 이야기들을 이제 이어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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