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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주 May 30. 2024

이화의 사계 중간에서

나도 ECC에 연구실 하나 있음 좋겠다.




지난 주 수업을 들으러 교육관 산을 넘다 우연히 게시판을 보게 되었다. 어떤 분이 사진전을 여신다는 이야기였는데 제목에 눈길이 끌렸다. <이화의 사계 - 이화 동산을 마음에 담다> 하얀 포스터에 네 계절의 사진이 담겨 있고 이화그린 컬러로만 글자가 쓰여 있어 단 번에 이화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학교를 사랑했으면 사진을 이렇게나 많이 찍으셨을까 궁금해졌지만 강의가 끝난 후 깜박 잊어버렸다.


다음 날, 다른 강의를 들으러 갔더니 수업 시작 전, 교수님이 사진전 이야기를 하신다. 교수님에 따르면 이번 사진전의 작가분이 올해 은퇴하신 황규호 교수님이라는 분이라고 한다. 워낙에 사진도 잘 찍으시는 데다 학교의 풍경을 아름답게 촬영해오신 사진작가님으로, 학교 SNS에도 오를 정도로 유명하신 분이라고. 꼭 한 번 가보라고 권하셨다.


이쯤되면 한 번 가봐야지 생각이 든다. 그래서 화요일 날 수업 전에 잠시 다녀왔다. 입구로 들어가다 보니 학생들 한 무리가 한 벽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고 그 앞에서 누군가 설명을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학교 안에 자라고 있는 각종 꽃사진들만 모아 전시한 공간 앞에서 작가님이신 교수님께서 이야기를 들려주고 계셨다. 이야기를 듣는 척 하다가 발길을 돌려 전체 사진을 하나씩 구경해봤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이화여대의 마스코트가 된 ECC 를 높은 곳에서 촬영한 사진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첫 학기를 보내는 중인 나는 봄과 여름의 이화 동산을 경험해본 존재였다. 아직 내게는 첫 가을과 첫 겨울이 오기 전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화의 사계> 가 가로로 펼쳐진 딱 중간에 서서 사진을 찍고 싶어졌다. ‘나는 지금 여기 있어요’라는 느낌으로.



오른쪽으로 발길을 돌리니 학교 곳곳을 찍은 멋진 작품들이 계절별로 전시되어 있다. 하나하나 다 둘러보고 나서 가장 맘에 드는 사진과 가장 학교를 사랑하는 마음이 잘 드러난 사진을 하나씩 고르기로 했다.



이건 나의 원픽. 사진전에 있는 모든 사진들 중 이건 교수님만 아시는 풍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골라봤다. 3개의 아치형 문과 다양한 크기의 흰 돌로 지어진 건물. 그 앞에 자라고 있는, 마치 함부로 자란 것처럼 보이지만 정말 일부러 꾸며둔 것 같은 수형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앵글이 조금만 더 높거나 조금만 더 낮아도 이런 나무를 찍으실 수는 없었을 거야' 하며.



눈이 펑펑 쏟아지는 이 작품은 학교를 사랑하지 않으면 절대 찍을 수 없을 것 같아 골랐다. 교육관 수업을 마치고 밤에 약학관을 지나면서 걷게 되는 길이란 걸 글을 쓰다 알았다. 눈이 와 있는 걸 본 적이 없어서 여기는 어딜까 유심히 보다 그걸 깨닫고 깜짝 놀란 거다. 인적이 드문 시간, 눈을 맞으며 이 사진을 찍으셨을 것 같은데 언제 어떤 상황 어떤 옷차림으로 그 자리에 계셨을까 상상해보게 된다. 자세히 보고 있으면 정말 지금 눈이 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해서 신기한 작품.



지방에 살고 있어 서울에 잠시 들러 수업만 듣고 내려오는 일정으로 지내다보니 아쉬운 게 많다. 캠퍼스를 한 바퀴 다 돌아보고 싶기도 하고, 학교 안에 오래 머물고 싶은 마음도 든다. 살면서 내가 ‘학교’란 곳을 이렇게나 좋아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아마도 지금의 내ㅉ가 인생에서 가장 안정적이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애교심이 아닐까 싶다.


학교를 사랑하셔서 캠퍼스를 카메라에 담고 제자들에게 사진을 나누기도 하셨다는 교수님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ECC에 연구실이 하나 생기면 좋겠다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교수님으로 다시 학교에 오게 된다면 지금처럼 온갖 짐을 다 짊어지고 땀을 뻘뻘 흘리며 정신 없이 기차 시간 맞추러 뛰어다니진 않을 것 같아서. 여유를 가지고 학교를 더 돌아보고 싶어서 연구실이 가지고 싶다니. 요새 나는 참 앞과 뒤, 맥락이 엉망진창인 것 같은데 그래도 괜찮아서 참 좋다.


다 보고 나오면서 작품들을 기억하고 싶어 굿즈를 구입했다.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그 중에 엽서를 묶어 판매하는 것을 사기로 했다. 꽃 사진과 ECC의 사계 두 주제로 되어 있었는데 ECC를 골랐다. 학교 사진을 집에 전시하고 싶어서.


사진전은 내일로 마지막 날이다. 학교 사랑을 사진으로 표현하신 교수님을 떠올리며 나는 어떻게 학교를 사랑해볼까 고민에 빠져드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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