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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숙 Nov 19. 2021

불멸의 에로이카에 부쳐

한국산문 2021년 10월호에 실림

   친애하는 베토벤 님

  가을 달이 차오릅니다. 잊었던 기억을 되살려내듯 당신의 피아노 소나타 〈월광〉을 클릭합니다. 평론가 루트비히 핼슈타프가 1악장을 가리켜 “스위스 루체른 호수의 달빛 물결 사이로 흔들리는 작은 배”라고 표현한 데서 월광이라 불리게 되었다지요. 저는 루체른 호수에 가 본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제게 비추는 달빛 물결 사이로 당신의〈월광〉 호를 타고 어느 에로이카의 현장으로 저어가 봅니다.  

   

  지난 5월 6일, JTBC의 아침&세계라는 시사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5월 5일이 보나파르트가 사망한 지 200주년이 되는 날이었지요. 파리 앵발리드 군사 박물관 묘역에서 진행한 추모 행사 장면을 소개하더군요. 200년이 지난 시점에도 그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음을 짚었습니다. 인터뷰에 응한 파리 시민은 말했습니다. “그는 위대한 프랑스 정치인과 독재자라는 평가 사이에 있습니다. 나폴레옹 법전 등 위대한 업적을 남겼지만, 혁명 이후 사람들의 열망을 꺾기도 했습니다.”라고요. 문득 베토벤 님이 이 인터뷰에 응했다면 뭐라고 대답했을까? 궁금해지면서 《교향곡 3번》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프랑스혁명이 끝나고 민주주의를 열망했던 시기, 때를 맞춘 듯이 나폴레옹 장군이 등장했지요. 사람들은 그가 자유와 평등, 박애의 공화주의를 실현할 영웅이라고 믿었으며 헤겔은 “말을 탄 시대정신”이라고까지 예찬했습니다.

  베토벤 님 당신도 혁명에 대한 꿈이 원대했고 그 꿈을 이룩해 줄 인사가 나폴레옹이라고 여겼지요. 그를 더욱 신뢰한 데는 프랑스 공사 베르나도트의 영향도 컸다고 들었습니다. 1798년 빈에 근무했던 그는 나폴레옹 영웅담을 긍정적으로 들려줬다고요. 그러기에 당신은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은 사람에게 아무 경제적 대가도 바라지 않고 교향곡을 작곡하여 기꺼이 헌정하고자 했을 테지요. 당신의 철학과 이상, 예술혼으로 응집된 작품을 말이에요.     


  1803년, 당신은 드디어 《교향곡 3번》을 작곡하기 시작했습니다. 1804년 작품을 완성했고 혁명에 대한 열망과 나폴레옹에의 존경의 뜻을 담아 표지에 <부오나파르테(Buonaparte)>라고 썼지요. 곡을 쓰고 헌정할 날을 기다리면서 얼마나 설렜을까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1804년 5월 18일에 나폴레옹은 스스로 황제에 등극했네요. 공식 선포는 20일에 하였다고요. 당신은 실망한 나머지 대로했다고 들었습니다. 그자도 별 볼 일 없는 정복자에 독재자일 뿐이라고요. 그리고 헌정하려던 교향곡의 표지를 찢어버렸다지요. 

  저는 여기서 당신의 불같은 성질에 놀라다가 비호 같은 판단력에 전율했습니다. 대부분 유럽의 사람들이 나폴레옹을 찬양했을 때였음에도 권력욕에 사로잡힌 속물에 불과했던 나폴레옹을 간파하고 확실하게 선을 그었지요. 


  베토벤 님 저는 황제가 된 나폴레옹이 그해 12월 2일에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치른 대관식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 나라의 왕을 넘어 전 유럽의 군주가 되고 싶었던 나폴레옹은 로마 교황 비오 7세를 파리로 불러왔지요. 명실공히 교회가 인정했다는 빌미로 삼으려 했지만, 그는 교황이 관을 씌워주기를 기다리지 않았다네요. 자기의 노력으로 그리고 국민의 힘으로 황제가 되었음을 공표하며 무릎을 꿇지도 않았다지요. 교황으로부터 관을 빼앗아 직접 머리에 썼으니 그 오만함을 멀뚱히 바라보았을 사람들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그런데 궁정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가 완성한 <나폴레옹 대관식> 그림은 어떤가요? 나폴레옹 본인은 이미 관을 썼고 아내 조제핀에게 관을 씌우는 장면으로 탄생했습니다. 실제 대관식 장면을 스케치했던 것과 달라졌답니다. 그 배경에는 나폴레옹의 왜곡된 주문이 있었다지요. 과시하고 싶은 부분으로 위장하거나 포장을 해서 말입니다. 요즘처럼 사진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여서 가능한 조작이기도 했겠지요.


  그것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라는 명언과 함께 기억되는 작품을 떠올려 봅니다.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또는 <생 베르나르 고개를 넘는 나폴레옹> 말이에요. 백마를 타고 망토 자락을 휘날리며 손가락을 치켜들고 있죠. “나를 따르라!”라고 외치며 알프스 산맥을 넘던 위대한 영웅의 상상을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간직하기도 했습니다. 역사란 승리한 자의 기록이라는 것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까요? 얼마만큼 대단한 황제로 남고 싶었으면 이렇게 위장하고 조작했을까요.


  사실 나폴레옹은 부하들이 모두 산을 넘은 후 맨 꼴찌로 알프스 산맥을 넘었다고 합니다. 백마가 아닌 나귀를 타고 말이죠. 백마는 험악한 산악을 타는데 최적화된 동물이 아니랍니다. 19세기 화가 폴 들라로슈는 <나귀를 타고 가는 나폴레옹>이란 실증에 가까운 그림을 그렸는데요, 이 그림에 나타난 나폴레옹의 행색은 오히려 초라하거나 측은하여 일말의 인간미마저 느껴졌습니다.      


  존경하는 베토벤 님

  당신은 찢어버렸던《교향곡 3번》에 “어느 위대한 영웅을 추모하며”라는 헌사를 다시 쓰고 추슬렀지요. 혁명적 영웅을 열망했던 작품을 저버릴 수는 없었겠지요. 얼마나 심혈을 기울인 역작이었습니까. 그 실례로 당시 25분이나 30분이었던 교향곡 연주 시간을 50여 분으로 확대하였죠. 심지어 잦은 불협화음도 사용하였고요. 이 곡을 연주했던 연주자들이 잘못된 게 아니냐고 의아해하거나 “음악이 거칠다.”라는 의견도 냈다면서요. 앞서가는 시대정신의 확신에 차서였을까요? 당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오히려 “더 대담하게 음표 하나하나에 엑센트를 주어서 연주하라.”라던지 “긴박하게 연주하라.”라고 주문했습니다.


  대문을 발로 차는 느낌의 1악장은 영웅의 탄생 또는 나타남을 표현했다지요? 알레그로 콘 브리오의 연주가 그 희망과 떨림, 설렘을 전합니다. 아다지오 아사이의 2악장은 장송곡으로 영웅의 죽음을 표현했지요. 독재자 나폴레옹의 종말을 예견하면서요. 1악장과 대비되는 빠르기로 첼로나 목관악기의 연주를 통해 느리게 걸어가는 행진이기도 하지만, 뒤로 갈수록 격렬하고 장엄하여 다른 장송곡과 차별화됩니다. 그래서 엄지 척하게 되는 악장이기도 하고요.


  3악장은 장대한 스케르초 형식이지요. 음악 평론가 최은규는 이 악장을 <웅장한 ‘베토벤 사운드’의 비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있고 깊고 풍부한 울림을 지닌 호른 3대가 트럼펫과 함께 힘차게 연주할 때면 당당한 영웅의 이미지가 절로 떠오릅니다.”라고요.

  당신은 마지막 악장에서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거침없이 찬양했습니다. 아끼던 발레 모음곡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의 주제를 가지고 왔지요. 매우 격정적이고 열광적으로 몰입하게 하여 이 곡을 처음 들은 청중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괴물” 같은 교향곡이라고 했다면서요?   

   

  인류의 영원한 에로이카 베토벤 님

  당신이 지금 살아있다면 나폴레옹에 대한 감정이 어떨까요? 슬그머니 심술궂은 질문을 해보고 싶네요. 물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쑤석대며 큰 눈을 부릅뜨겠죠. 불쑥 튀어나온 광대뼈에 힘을 주며 “독재자 나폴레옹”이라고 큰소리로 외칠 거라고 짐작하는 건 저의 편견일까요? 


  오랜 세월이 흐른 이 시점에도 그 공과가 극렬하게 엇갈림을 아침 방송에서 보았습니다. 아직도 프랑스 사람들이 그를 “영웅”이라고 당당하게 부르지 못하는 데는 나폴레옹에 대한 상처가 너무 컸기 때문이지 않을까 미루어 짐작해 봅니다. 모르긴 해도 섬에서 태어나 한때 영웅이었던 나폴레옹은 섬에 갇혀 죽음으로 그 영광의 막을 내렸다고 여겨지기는 합니다. 다만 우리의 진정한 영웅은 언제, 어디에서든지 태어나고 스러지며 또 나타나리라 기대합니다. 그리고 Ludwig van 베토벤 님 당신이야말로 인류의 영원한 에로이카임을 다시 새깁니다.         

 

                                             2021년 10월의 어느 가을밤  

                               달빛에 흔들리는 〈월광 〉호를 저어가며 김숙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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