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기란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듣기 시작해 죽기 직전까지 듣는다. 청력은 평생에 걸친 능력임이 확실해 보인다.
중요한 건 이런 값진 능력을 우리가 잘 활용하고 있는가다.
당신은 타인의 말에 잘 귀 기울이는 편인가?
한 조사 기관에 따르면,
➡남편 말이 웃다가 사레 들릴 만큼 재미있을 확률? 0.8%
➡시어머니가 들려주는 얘기가 감동적일 확률? 0.02%
라는 결과가 나왔다. (조사 기관 = 나)
그렇다. 제아무리 현모양처, 부처라 할지라도 ✔재미도 감동도 없는 얘기는 도무지 집중이 안 된다. 반면 재미와 감동이 없음에도 집중하는 때가 있다.
바로 ‘듣기 평가’
듣기 평가하면서 깔깔대거나 눈물을 훔치는 사람을 본 적 있는가? 아무도 재미없어 하지만, 모두 집중하는 건 ‘목적’이 분명해서다. 점수가 잘 나올지도 모른다는 ✔목적.
목적이 분명하지 않음에도 집중하는 얘기 또한 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의 재잘거림이 그 예다. 때때로 신빙성이 떨어지고 장황한데도 불구하고 아이의 말은 눈앞에 장면이 펼쳐지듯 조목조목 입력되지 않던가. 한 편의 영화가 후딱 만들어지는 기분이다. 짝꿍이 예쁘다고 하면 로맨스가, 시험을 봤다고 하면 스릴러가, 뒤에 있던 친구가 발로 찼다고 하면 호로 무비가 상영된다. (이 호로 좌식 생활이….) 이때 왜 우리는 집중하는가? 말하는 대상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듣기는 다음 세 가지 조건 중 하나를 충족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재미와 감동이 있거나, 목적이 분명하거나, 사랑하거나.
이때 듣기의 열쇠는 누가 쥐고 있는가? 청자인가, 화자인가? 신랄하게도 듣기를 쉽게 만드는 주체는 청자가 아니라 화자다. 화자가 위의 조건 중 하나를 충족시켜야 하니까 말이다.
비로소 청자는 아무 잘못이 없다는 게 밝혀졌으니 이제 모두 화자 탓을 해볼까?
아니다. 우리는 피차 화자인 동시에 청자요, 청자인 동시에 백자다, 아니 화자다. 귀 기울임은 포용, 배려, 예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월드 피스를 실천하는 거다. 또한 당신이 어떻게 들을지, 말할지를 고민한다면, 그로써 문해력은 대폭 상승하는 거다. 그러니 사는 동안 우리 잘 듣자!! 다음 시간 ‘말하기란’으로 돌아오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