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생중계'는 제작자에게도, 덕후에게도 윈윈, 이것은 갓극이다.
창작 뮤지컬의 첫 뚜껑이 열리면 일단 첫공을 보고 온 뮤덕들의 입소문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아무래도 어설프고, 미숙한 부분이 많을 법도 한데 뮤지컬 '홍련'이라는, 이름도 신선한 이 극은 첫 시작부터 뭔가 시끌시끌한 좋은 후기가 압도적이었다. 요즘은 가뜩이나 살기도 퍽퍽한데 소극장 티켓값은 계속 오르고, 할인 혜택은 빛의 속도로 사라지는 데다가, 극의 퀄리티까지 보장이 안되니 많은 뮤덕들이 눈물을 머금으며 이탈하는 상황이다. 그 와중에 굉장히 신선한 극이 혜성처럼 등장해서 이탈해 가는 뮤덕들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고 하니 꽤 궁금했다. 하지만 나는 지방민이라 일단 관극 엄두를 못내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별안간 온라인 생중계를 한다고 하는 공지가 올라왔다. 아니,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극을 벌써 다 노출한다니! 나는 급하게 생중계 공지글을 찾아보았는데 거기서 두 번째로 놀랐다. 무려 '무료' 생중계를 한다는 것이다. 아니, 돈을 주고 보더라도 생중계를 해주는 것 만으로 감사한 상황에, 그걸 무료로 열어준다니 나는 제작사를 향해 큰절이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심지어 캐스팅을 보고 세번째로 감격했다. 너무나 나의 애배 그 자체였다. 이건 필히 나를 위한 선물이었다.
일단, 홍련 역할의 '홍나현' 배우는 뮤지컬 '더라스트맨'에서 생존자 역으로 극장에서 만난 배우이다.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얼마나 큰지, 그 눈빛과 외침을 도무지 잊을 수가 없는 배우인데, 이번 극에서 다시 볼 수 있다니 내가 흥분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바리 역할의 '이아름솔' 배우는 뮤지컬 '브론테'에서 에밀리 역할로 나에게 콕 박힌 배우이다. 천둥처럼 쩌렁쩌렁하게 싸우는 넘버를 보며 나는 무서워서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이번 뮤지컬에서는 바리데기 설화 주인공인 '바리' 역할이라고 하는데, 그 카리스마와 독보적인 음색을 어떻게 활용할지 너무 기대가 되었다. 강림 역할의 '고상호' 배우는 뮤지컬 '개와 고양이의 시간'에서 댕댕이 랩터 역할을 너무나 훌륭하게 소화한 배우다. 내가 뮤덕이 된 게 얼마 안 되었는데 (?), 각각의 극에서 호감이 마구 올라갔던 배우 세명이나 이번 생중계 캐스팅에 있다니, 마치 오래된 각각의 친한 친구를 한데 만나는 것처럼 혼자 마구 설레었다.
온라인 생중계의 세 가지 장점
나는 극을 처음 만날 때 시놉을 아예 읽지 않는다. 그리고 당연히 스포를 피하고 완전히 무지한 상태로 보려고 노력한다. 심지어 내 기억에서 줄거리도 희미해진 장화홍련전이나 바리데기 설화를 다시 찾아보지도 않았다. 온라인 생중계 창을 띄워놓고, 극을 기다리며 채팅창을 보는데 뮤덕들이 이미 흥분해서 난리가 난 시장통 같았다. 내가 생각하는 '온라인 생중계'의 장점은 세 가지로 요악할 수 있다.
첫째, 채팅창을 보는 맛이 있다. 실제로 관극 할 때는 시체 관극을 해야 하기 때문에, 장면마다 서로 어떻게 느끼는지 전혀 모르며, 심지어 눈물이 나도 최대한 조용히 처리해야 한다. 그런데 온라인 생중계는 실시간 댓글로 시원하게 느낌을 공유하며, 같이 울고 같이 웃으며 떠들 수 있어서 그야말로 꿀잼이다.
둘째,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다. 똥손인 내가 1열을 선점하기는 거의 불가능하고, 오글을 써도 너무나 아쉬운 거리인데, 온라인 중계로 카메라 줌인이 된 극을 보면 개안한 것처럼 행복하다. 심지어 이번 극은 뮤덕들에게 갓기영으로 불리는 곽기영 촬영감독님이 담당해 주셔서, 헉 소리나는 클로즈업과 시의적절한 장면 전환으로 극의 몰입이 가속화되었다.
셋째, 한 번에 자둘 (2회차관극) 을 할 수 있다. 온라인 생중계는 대부분 극을 볼 수 있는 시청 시간을 빡빡하지 않게 열어둔다. 90분짜리 극이 오후 여덜시에 시작했는데, 혜자롭게도 자정까지 시청기한을 넉넉하게 열어두었다. 그래서 시간을 잘 맞추면 두 번도 볼 수 있다. 스트레이트로 자첫과 자둘을 하면, 처음에 못 봤던 대사와 디테일, 감정 변화를 느낄 수 있어서 훨씬 극이 깊게 다가온다. 관극은 자둘부터라고 여기는 나에게 그래서 온라인 공연은 꿀맛이다. 그리고 결국 '내가 이걸 현장에서 꼭 봐야겠다'는 갈망으로 끝나며, 예매창을 무한 검색해 보는 게 국룰이다.
그러니, 결국 이건 위태로운 요즘의 뮤지컬 시장에서, 회전문을 도는 충성고객인 뮤덕의 마음을 움직이게 해주는 몹시나 좋은 마케팅 전략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는 이 극을 다 보고서야 도대체 왜 초연극을 시작하자마자 이렇게 과감하게 '무료 생중계'를 결심하고 오픈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들은 그만큼 자신이 있었다. 이것을 자신 있게 풀 만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무료로 유혹해서 당당하게 공개할 만큼 극은 정말 기대 이상이었다.
(스포 있고 불친절함) 책갈피와 화이트 X와 네불라까지 소환된 '바리'와 '홍련'
사실 현재의 나에게 가장 좋아하는 극을 말하라 하면 단연 뮤지컬 '호프'이다. 지금도 호프 넘버를 들으면 바로 눈앞이 뿌옇게 변할 만큼 호프 여사님은 늘 내 마음 안에 있다. 의도치 않게 나는 이 극을 보면서 호프 여사가 소환되어서 내 눈물버튼이 무장 해제되었다. 세상에, 공연장도 아니고 저 시골에서 작은 노트북 화면을 보면서 결국 눈물 줄기를 좔좔 흘렸다. (참, 온라인 생중계는 내 맘대로 코 풀고 소리 내서 울어도 돼서 너무 편하다.) 날 서있는 불꽃같은 홍련이를 가련하게 여겨주는 바리의 모습은 호프여사 옆에 붙어있는 원고지 K 같았다.
비겁했던 자신을 혹독하게 비하하고, 자책감에 사로잡혀 결국 망상 속으로 들어가서 구천을 떠도는 홍련이를 바리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그런 홍련에게 바리공주는 그럼에도 너를 사랑하고, 너를 용서하라고, 제발 귀하게 여기고, 쉼 없이 자신을 사랑하라고 절규하며 홍련을 구원하려 한다. 세상에 대한 증오로, 자신에 대한 증오로 똘똘 뭉친 홍련은, 결국 자신을 위한 바리의 무한한 사랑 앞에서 멍에가 씻겨진다.
흰 옷을 입은 바리공주는 뮤지컬 더데빌의 화이트 X 같았다. 그레첸에게 '순결한 너는 아무 흠이 없도다' 라며 손을 내밀어주는 화이트 X. 이 극에서는 씻김굿이라는 무속적 요소로 표현되지만, 나는 이상하게 바리가 인간(홍련)을 바라보는 그리스도 같이 다가와서 눈물이 그렇게 났다. 또, 호프여사에게 어떻게든 지금 그 일상을 살아가 보라고 간절히 말하는 다정한 원고지 K 같기도 했다. 거기에 뮤지컬 쇼맨에서 죄책감의 파도 속에서 허우적대는 네불라와 수아의 모습이, 홍련 안에서 소환이 되었다.
유독 내 가슴을 파고들었던 여러 뮤지컬들이 뮤지컬 '홍련' 안에 집약되어 있었다. 거기에 내일이 없는 것처럼 혼신의 힘을 쏟아내는 이 배우들이 악을 쓰며 속을 내보이며 터트리는데, 내가 어찌 마음이 안 흔들릴 수 있겠냐고.
그것은 사랑이어라.
결국은 사랑이었다. 외투를 벗기기 위해서 해님과 바람이 싸웠던 그 동화에서도, 결국 햇님이 바람을 이겼다. 결국은 빛이고, 결국은 사랑이다. 그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 그것을 사랑으로 들어줄 누군가가 있다면 매듭은 결국 풀린다. 결국 사랑을 깨닫고 바리의 손을 찾아가는 홍련을 보며, 수천번 반복하며 홍련을 꺼내주려는 바리의 손을 보며, 내 마음은 벅차올랐다.
진리는 뻔하다. 그런데 쉽고 뻔한 도덕으로 사람의 마음을 동하게 만들기는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이 극은 반전에 반전을 가하는 내용과 카타르시스 그 자체의 마무리까지 가해져 커튼콜에 기립박수를 안칠 수 없을 것 같다. 어떻게 이런 극을 창작했을까. 정말 천재 같다. 한국 설화와 전래동화를 모티브로 가져와서 이런 스토리를 짤 수 있다니, 이런 넘버를 만들고, 이런 기승전결을 만들 수 있다니,, 거기에 찰떡 배우들의 열연과 제작사의 열린 마인드까지 모든 모서리를 다 갖췄다. 요즘 나 역시 살짝 이탈하려던 차에, 덕구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한 정말 멋진 창작 초연극이었다.
지금 악명 높은 자유극장을 전석 매진시키고 있다는 핵돌풍 같은 창작뮤지컬 '홍련'.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나는 치토스처럼 매일 치열하게 갈망한다.
'언젠간 보고 말테야.'
https://youtu.be/h8x1FYj-VbE?feature=shar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