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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원 Oct 19. 2022

결정론과 자유의지의 양립, <테넷>

<인셉션>, <인터스텔라>, <테넷>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이 영화들의 핵심 소재는 각각 꿈, 우주, 시간 역행이다. 그리고 이 세 소재는 모두 인간이 제어하기에는 너무나 광활하여 통제할 수 없는 것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하지만 세 영화의 주인공들은 이러한 통제불가능성의 세계 속으로 자기 자신을 내던져, 그 광활한 세계를 통제하려는 격정적인 발버둥을 친다.


<테넷>은 이러한 발버둥이 가장 극에 달한 영화이다. <인셉션>에서는 '사랑'이, <인터스텔라>에서는 '가족'에 대한 의미 성찰로 주제가 분산되었으나, <테넷>은 그 파격적인 세계관을 제외하면 나머지 요소는 곁다리에 불과하다. 단적으로 주인공(주도자)의 이름은 영화 내내 단 한 번도 제시되지 않는다. 이 영화가 개인의 서사로서 논의되기보단 인간의 실존적 투쟁이길 바랬기 때문이다.


주도자는 무엇과 투쟁하는가? 세계와 투쟁한다. 테넷의 세계는 결정론적인 세계이다. 주도자가 현실을 바로잡고자 인버전을 사용하더라도, 결국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따라서 '아마겟돈'을 원하는 사토르의 파괴 계획은 저지 불가능한 숙명처럼 주도자와 관객을 압박해 온다. 이러한 세계관에서 '자유의지'가 들어설 공간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영화는 흥미로운 방식으로 '자유의지'를 결정론적 세계관에 접목시킨다. 작중 닐의 대사를 보자.


"일어난 일은 일어난 거야." 이건 세계의 작동 구조에 대한 믿음의 표현이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핑계가 될 수 없어.

What's happend, happend. Which is an expression of faith in the mechanics of the world. It's not an excuse to do nothing.


인간이 결정론적 숙명을 피해갈 수 없다고 한들, 인간은 자신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자기 운명을 개척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일어날 사건들은 숙명에 따라 일어나겠지만, 그럼에도 그 숙명을 거부하기 위해 자기개척적 노력을 해야 한다. 그렇게 인간이 자기 개척을 위해 힘쓸 때, 숙명은 인간들의 편을 들어준다. 프리포트에서 주도자가 인버전된 자기 자신과 싸웠을 때, 어느 한쪽의 균형이 깨졌다면, 나머지 한쪽도 필연적으로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정방향의 주도자와 인버전된 주도자가 모두 최선을 다해 전투에 임했기에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이다. 


영화에선 같은 구조의 사건들을 계속해서 제시한다. 프리야는 주도자가 플루토늄 탈취에 실패할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탈취 작전을 펼치게끔 한다. 후반부 레드팀과 블루팀이 스탈스크-12에서 수행하는 작전도 마찬가지다. 작전 브리핑에서 아이브스는 대원들에게 '너희들의 임무는 폭발 해체 실패이고, 폭발 해체 작업은 작전조만 수행한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대원들의 입장에선 정말 어이없게 들린다. 어차피 해체 작업을 작전조만 수행한다면, 본인들은 왜 이 전투에 참가하는가? 최소한 엄호라도 하라는 명령을 내려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결정론적인 테넷의 세계관에서 대원들은 폭발 해체 작업을 수행하지 못할 운명이므로 이 비정상적인 명령은 불가피한 것이다. 


하지만 프리야에게 속은 주도자나, 이상한 명령을 곧이곧대로 따른 대원들은 결코 쓸데없는 체력 낭비를 한 것이 아니다. 숙명론적인 세계관 속에 플루토늄을 탈취하지 못할 운명, 폭탄 해체에 실패할 운명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자신의 현실 속에서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마치 인버전 전투씬에서 두 주도자가 필사적으로 싸웠던 것처럼 말이다. 감독은 그렇게 최선을 다한 인간들에게 해피 엔딩이라는 보상을 제공해 준다. 노력을 기울인 인간들에게 주도자가 인버전된 자기 자신을 마주하는 불상사, 탈취하지 못한 플루토늄이 세계 종말을 위해 쓰이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어떨까? 영화야 픽션이니까 결정론적 세계관에서도 최선을 다한 이들에게 해피엔딩을 선사해 준다지만, 영화의 메시지가 현실에까지 미칠 수 있을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앞선 닐의 대사를 포함하여, 영화에서는 '믿음'이라는 키워드가 자주 등장한다. 우리 인간은 자신이 결정론적인 세계에 사는지, 비결정론적인 세계에 사는지 알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자유의지가 존재하는지도 알 수 없다. 마치 바닷속으로 다이빙하는 자신을 보고 그게 자신인지도 모른 채 그녀를 부러워하는 캣처럼, 우리 인간의 세계 지각 능력은 그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의 가능성을 믿는다. 프리야에게 캣의 안전을 보장해 달라는 주도자에게, 프리야는 '우리 비즈니스에서 약속이 무슨 의미가 있어?'라고 말한다. 하지만 약속이란 그 어떠한 변수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약속한 일은 완수하겠다는, 숙명을 초월한 의지의 표현이다. 이는 곧 자기 의지에 대한 믿음의 표현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제시되는 신과 인간의 차이는 믿음의 유무이다. 신에게는 믿음이 없지만, 인간에게는 믿음이 있다. 


영화에서는 믿음에 대한 대가로 감독이 해피 엔딩을 선사했지만, 설령 현실 세계에선 그러한 믿음이 헛된 믿음이라 할지라도 인간이 그 믿음 탓에 손해볼 이유는 없다. 결정론적 세계관이 명백하게 제시되는 <테넷>과 달리, 우리는 이 세계의 작동 기제에 대해 갈피조차 잡지 못한다. 이러한 무지 속에, "무지가 우리의 무기다"라는 작중 대사는 유효성을 발휘한다. 우리는 세계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에 도리어 우리 자신의 힘을 과신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건 그들(미래인)이 실패했다는 증거잖아?'라고 말하는 주도자의 과신처럼, 믿음이 섞인 무지는 되려 우리를 실존하게 한다. 이 과신은 합리적이진 못할망정 실효성이 있다. 


영화는 무지의 긍정성을 강조하기 위해 '할아버지 역설'을 제시한다.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할아버지를 죽인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우리는 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며, 영화의 주인공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러한 무지는 오히려 이점이다. 할아버지 역설의 결과를 알지 못하는 인간만이 오직 할아버지를 죽이는 선택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선택은 닐이 과거로 돌아가 죽음을 택함으로써 세상을 구한 방식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화에서 사토르와 한패로 제시되는 미래세력 역시 닐처럼 '할아버지 역설'을 통한 자기 구원을 시도한다. 미래인들의 입장에선 과거(즉, 현대)에 너무 많은 환경오염이 일어났기에 자신들이 위험에 처했으며, 유일한 구원의 방법은 과거인들을 몰살시켜 그러한 오염이 일어나지 않게끔 만드는 것이다. 조상을 몰살시키면 후대인들인 본인들 역시 존재를 부정당할지도 모르겠으나, 일단 상황이 너무 위급하고 유일한 해결책이 할아버지를 죽이는 것뿐이니 그런 결단을 내린 것이다.


영화에서 미래인은 사토르와 한패로 나오기 때문에 이러한 미래인들의 결단은 부정적인 것으로 치부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결단이 그들의 유일한 생존 전략일 수 있다는 점이나, 환경오염이라는 문제가 현대인들의 무책임한 과오라는 점을 감안하면 미래인의 입장에선 충분히 합리적인 판단이다. 즉 사토르와 한패라고 해서 그들을 무작정 악당으로 여길 순 없다. 물론 그렇다고 미래인의 결단이 닐의 '숭고한 희생'에 비견될 수는 없다. 닐이 할아버지 역설을 통해 죽인 것은 자기 자신으로, 자신을 제외한 모두를 살리기 위한 결단이었던 반면 미래인들이 할아버지 역설을 통해 죽이려 한 것은 자신들의 조상으로, 이는 자신들이 살고자 조상을 희생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남을 향한 나의 희생과 나를 향한 남의 희생. 이 대비는 정확히 주도자와 사토르 간의 대조점이기도 하다. 두 남자는 모두 자살약을 삼키려고 한다. 사토르의 경우 세상 종말의 방아쇠를 본인이 당기기 위함이다. 본인의 삶이 병에 의해 끝나야만 하는 숙명에 처한 상황에서, 그는 결코 본인 혼자만 죽을 수는 없다는 오기를 부린다. 그가 캣을 가둬두는 것처럼, 자신이 가지지 못한다면 아무도 가질 수 없다는 히스테리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한편 주도자는 영화 내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서라도 남을 살리고자 노력한다. 그가 영화 초반 임무를 완수했음에도 공연장에 다시 들어가 폭탄을 해체하는 이유, 그 후 러시아 요원에게 잡혀 고문당함에도 불구하고 동료들에 대한 기밀을 누설하지 않고 자살약을 먹는 이유, 닐이 프리포트에 비행기를 들이박자는 아이디어를 제안했을 때 '여객기는 안 돼'라고 하는 이유, 캣과 플루토늄 탈환의 양자택일적 상황에서 항상 캣을 먼저 구하는 이유 등등은 그러한 희생정신이다. 


흥미롭게도 감독은 희생정신이 투철했던 주도자를 위기상황마다 숙명적으로 구원하여 죽지 못하게끔 하고, 최종적으로는 주도자를 위해 닐을 희생시킨다. 캣의 구원자로 제시된 주도자와, 주도자의 구원자로 제시된 닐. 영화가 끝난 후 우리는 이러한 연쇄 관계에 근거하며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닐이었다'라며 감탄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되돌아봐야 할 것은 영화 속이 아닌 영화 밖의 우리 인생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구원자는 당신의 자유 의지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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