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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원 Oct 19. 2022

<하울의 움직이는 성> 리뷰: 과도기에서 살아남기

기생으로부터 해방된 자유의지가 향한 곳

1. 영화의 배경

1) 중세 봉건사회

 영화의 제목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성'이란 봉건제의 산물이다. 성내 사람들은 세금을 납부하는 대신 야만적인 세상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다. 주인공 소피를 포함하여 거리나 시장에서 만나는 행인들이나 군인들까지도 이러한 소시민적 삶을 살아간다. 작화들은 중세시대의 유물인 봉건사회를 아름답게 그려낸다. 따라서 소피가 사는 마을은 유럽 전역의 성격을 포함하고 있는데, 예컨대 알록달록한 마을의 색감은 이탈리아적이며, 빵집에선 프랑스 마들렌을 팔며, 포스터에는 '용기와 의지'를 의미하는 'Mut und Wille'라는 독일어가 쓰여 있다. 화룡점정으로 마을은 알프스를 연상시키는 산을 등지고 있다.


2) 근대기술의 습격

 하지만 중세 봉건사회는 근대기술에 의한 습격으로 과도기에 접어든다. 이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은 전쟁이다. 근대기술의 종합은 신형 전투기와 전함, 폭탄 등의 군수물자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근대기술이 발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직 비과학적인 미신이나 루머 등을 두려워하는 등 중세적 가치관에 머물러 있다. 흥미로운 것은 중세사회의 소시민들이 정녕 두려워해야 할 것이 무참하게 스며들어오는 근대기술의 위협임에도,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마법사와 마녀라는 점이다. 따라서 그들은 근대의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한다. 도리어 패전한 뒤 꾀죄죄해진 최신식 군함을 보며 안타까움을 표하는 등 근대기술을 응원하는 지경이다.


3) 군인들의 플러팅, 소피의 거부

 두 시대의 과도기인 시점을 은유하는 영화적 장치는 군인들이 마을 아가씨들에게 보내는 구애이다. 여기서 군인들은 근대기술을 상징한다. 물론 군인 개개인은 과도기 내 소시민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들이 모인 군대라는 집단은 매우 근대적이며 따라서 이들이 아가씨들에게 보내는 플러팅 역시 근대가 중세를 잠식하려는 시도로 간주되어야 한다. 마들렌을 굽는 동생이나 다른 아가씨들은 최소한 이 플러팅에 겉으로나마 반응해주고, 심지어는 신난 기색까지 보인다. 한편 주인공 소피의 경우 군인들을 매우 경계하며 플러팅하는 남성들을 회피하고자 한다. 이는 그녀가 근대의 도래의 거부하고 중세를 수호하는 인물임을 드러낸다. 또한 그녀가 모자 가게를 운영하며 시대의 흐름에 관계없이 가업을 이어받고자 하는 의지나, 중후반부 전쟁으로 인한 위기상황에서 가녀린 몸을 이끌고 가게가 무사한지 확인하러 나가는 책임감은 이러한 해석의 정당성을 더해준다.  


4) 마법

 한편 소피 외에도 중세의 유물로서, 근대와 대립하는 것이 바로 마법이다. 하늘을 활강하는 것은 전투기뿐 아니라 하울의 마법또한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마법은 중세가 근대로부터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그러나 하울의 봉건적 소유물인 움직이는 성이 낡고 지저분해 각종 벌레들이 득실대는 것처럼, 늙고 쇠약한 마법은 젊고 팔팔한 근대기술에 대항하기엔 힘이 부친다. 캘시퍼가 항상 불이 꺼질 위험에 처해있는 것은 이러한 중세적 마법의 쇠락을 보여준다. 


5) 배경 정리

 따라서 이 영화는 근대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는 배경 아래 중세가 어떻게 도태되지 않을 것인지에 대한 답을 주는 영화이다. 영화의 주인공이 소피라는 가녀린 숙녀인 것은, 중세가 근대로부터 자신의 몸을 간수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진 않을 것이라는 힌트다. 더구나 쇠락한 중세가 근대와 당당하게 일기토를 뜨기엔 체급 차이가 너무 크다.



2. 주요 인물 해석

1) 외강내약 하울과 외약내강 소피

 하울은 능력 있는 마법사로, 수많은 군인들과 괴물들, 전투기들을 상대할 수 있는 외강한 남성이다. 한편 그가 집에 돌아와 마법사의 옷을 벗으면 그의 약소한 내면이 드러난다. 이 나약함은 샤워 후 소피에게 왜 화장실을 청소했느냐고 따지는 장면에서 수건 한 겹에 가려진 채 드러나는 그의 앙상한 속살로써 그려진다. 그의 깡마른 몸, 특히나 그 젓가락같이 얇고 긴 다리는 이러한 특징을 그려한 작화이다. 내면이 불안정한 그는 그를 일으켜 세워주려는 소피의 애정에 매우 냉소적이며, 그의 시니컬함은 부정적 자기주문과도 같다.


 반면 소피는 외적으로는 가녀릴지언정 그 내면만은 누구보다 강하다. 그녀의 약한 외면성을 부각하기 위해 영화는 그녀의 마지막 외적 힘인 젊음마저 앗아갔다. 그러나 할머니가 되었음에도 소피는 도리어 자신의 늙음으로부터 긍정적인 면을 찾는 등 정신적으로 성숙한 모습을 보인다. 심지어 순무 허수아비를 꺼내주는 장면 등에선 육체적으로도 강인한 모습을 보인다. 그가 하울의 성에서 담당하는 임무는 고작 청소에 불과하지만 그녀의 영향력이 매우 강력하다는 것은 성내 모든 이들이 인지하고 있다. 마치 캡틴 아메리카가 묠니르를 들듯, 캘시퍼의 불이 그녀에 의해 조종되는 것도 그녀의 내강성을 드러낸다.


 외강내약의 하울과 외약내강의 소피 간의 극명한 차이로 인해 둘의 로맨스는 태초부터 위기에 봉착했다. 하지만 되려 이러한 위기가 그들의 로맨스를 더욱 애틋하게 만들어준 것 싶기도 하다. 예컨대 소피의 경우, 외약성 탓에 성 바깥으로 나가기엔 힘이 부침에도 불구하고 하울의 부탁에 따라 설리만 선생을 만나러 나가며, 하울의 경우 전쟁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설리만의 군대로부터 소피를 지키기 위해 그녀를 성 안에 남겨둔 채 전투를 치르러 떠난다. 특히나 후자의 경우,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져야만 하는 하울의 상황이 극히 안타깝다. 또한 같은 상황에서 소피 역시 자신의 외약성 때문에 성 밖에 나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 안에서 자신만의 해결책을 모색하는 면모가 매우 인상적이다. 이 해결책이란 중세와 근대 사이의 모순을 풀어낸 열쇠인데, 이에 대해선 후술할 것이다.


2) 설리만 선생

 설리만 선생은 표면적으론 왕실 휘하의 전속 마법사이지만 전쟁을 실질적으로 관장하는 사실상 최종보스 격의 인물이다. 그녀는 중세에 속한 마법사임에도 불구하고 중세를 배반하고 근대의 편에 붙어 중세의 몰살에 앞장서는 일종의 매국노이다. 그녀는 근대에 의한 중세의 파괴를 발전론적 역사관에 따라 당연한 수순으로 바라볼 것이다. 영화가 설리만 선생이 일으키는 전쟁이 정확히 어느 국가와 어느 국가간의 싸움인지 영화가 명확히 드러내지 않는 것은, 그 전쟁이 누구끼리의 싸움이든 관계없이 소시민들의 파멸을 이끄는 것임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설리만 선생이 노인 소피를 마주한 궁전의 방은 유리 온실을 통해 인공적인 자연을 구축해 놨다. 자연의 본질인 개방성을 무시한 채 자연의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근대기술의 태도는 자연스러운 꽃밭과 바다를 흠모하는 소피와 대조된다. 설리만 선생은 자연마저 인간의 통제 범위 안에 가두려는 전형적인 근대 정신관의 인물이다.


3) 마녀

 마녀또한 하울과 같은 마법사이므로 설리만 선생의 적이다. 이 마법 세력들만 처치되면 중세는 무너지고 근대가 바로서므로, 설리만 선생은 각종 함정을 통해 이들을 묶어두려 한다. 마녀가 그 함정에 쉽게 넘어간 것은 그녀의 심각한 결점, 탐욕 때문이다. 마녀는 소피의 아름다움과 젊음을 부러워해 죄없는 그녀의 젊음을 앗아갔으며, 계단을 지나 왕의 궁전에 도착했을 땐 누가봐도 수상한 의자에 한치의 의심 없이 털썩 앉는다. 마법 능력을 상실한 마녀는 외약내약의 노인에 불과하다.



3. 과도기적 모순의 봉합

1) 아름다움

 아름다움에 대한 관점에서 하울과 소피는 상반되는 입장을 취한다. 이는 소피가 화장실을 청소한 탓에 하울의 머리가 검정색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알 수 있다. 하울은 자신의 노란 머리만이 아름다운 머리색이라고 생각하기에 검정 머리가 된 자신을 보고 엄청난 실의에 빠진다. 한편 소피는 검정색도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라며 위로한다. 다시 말해, 하울은 아름다움이 노란머리라는 실체로 고정불변한 것이라 생각하는 반면, 소피의 경우 특정한 아름다움의 영역을 한계짓지 않고 다양한 아름다움을 긍정한다. 노인이 되고 나서도 나름의 긍정성을 찾는 소피이기에 이는 합리적인 해석이다. 두 미 개념을 비교하자면 소피 쪽이 보다 더 진정한 중세정신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텐데, 아름다움을 한정짓는 하울의 미 개념은 도리어 자연을 개선하고 지배하려는 근대정신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반면 소피는 자연적인 모든 것에 깃들어 있는 고유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줄 안다.


2) 중세의 자발적인 봉건 해체, 그리고 Renaissance

 하울이 설리만의 군대와 싸우기 위해 성 밖을 나섰을 때, 소피는 자신의 내강성을 통한 문제의 해결책을 고민한다. 이는 바로 자기 해체다. 그녀는 쫓아오는 군대를 피해 달아나기엔 지나치게 느린 고물덩어리 성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따라서 캘시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를 난로에서 꺼내고 이사 준비를 한다. 자기 해체는 큰 용기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어지간한 정신력으로는 완수할 수 없는데, 소피가 그만큼 강인한 인물이기 때문에 이러한 행동이 가능한 것이다.


 소피가 캘시퍼까지 꺼내 성 밖으로 나섰을 때, 성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마치 소수의 마법사에 의해 연명되던 중세처럼, 캘시퍼가 화로를 나서자 그의 예상대로 성이 무너진 것이다. 사실 중세의 관점에서 마지막 구원투수와도 같은 마법을 강판하는 것은 정말 바보같은 짓이다. 하지만 소피가 의도했든, 혹은 얻어걸렸든, 그 선택은 중세의 자기모순을 해결해주는 묘수였다. 무너진 성 중에서도 핵심적인 부분만은 그 형체를 유지했고, 필요없는 부분들을 덜어낸 성은 더 빠르게 내달릴 수 있게 됐다. 낡고 무거운 구시대적 유물을 들어내고 실사구시적인 본체만 남김으로써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결국 소피는 자기해체를 통해 자기부활을 성공시킨다. 이는 마치 몇 세기 전 고대와 중세 사이의 모순을 고대적 가치관을 발판삼아 승화시킨 르네상스와 닮아 있다. 이 영화의 배경이 유럽 전역에서 따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유독 이탈리아적 풍경이 강조되는 것도 어쩌면 연관이 있을지 모른다. 


3) 아름다움의 관점에서 다시 보기

 구시대를 해체하고 필요한 것만 남겨 재탄생시키는 법고창신의 복고전략은 성공적이었다. 낡은 유물들을 버리지 못하고 고정적인 미 관념을 수용했던 하울의 모순은 집착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그러한 집착을 덜어내고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소피의 미 관념을 받아들였을 때 이 모순은 봉합된다. 따라서 소피의 자기해체는 중세적 가치관을 파괴시킨 것이 아닌, 되려 진정한 중세정신을 바로세운 것이다. 그렇게 바로세워진 것은 중세와 동시에 하울이기도 하다.



4. 무엇이 우리를 인간답게 하는가

1) 마법의 대가

 영화에 등장하는 두 마법사, 하울과 마녀는 마법을 위한 대가를 치렀다. 설리만에 의하면 마녀의 경우 몸과 마음을 잃었으며, 하울은 몸은 강하지만 마음은 잃었다고 한다. 추후에 소피가 하울의 유년기 시절을 보는 장면에서 그의 반지의 빛이 소멸하고 붉은빛만 휘날리는 장면은 그가 내면을 희생하고 외적 강함을 얻은 것임을 보여준다. 하울은 캘시퍼와 계약을 맺어 생존에 있어 상호 불가분한 위태로운 상태다.


2) 동물적 기생과 인간적 공생

 하울이 자신의 심장을 바쳐 캘시퍼로 하여금 성을 움직이게 한 것은 상호 기생적이다. 기생은 대가를 얻는 대신 희생을 해야 하는 봉건적 특징이다. 영화 초반 소피에게 플러팅하는 군인들로부터 그녀를 구해주는 하울의 마법은 아마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씬일 텐데, 이 장면은 언뜻 보면 하울이 일방적으로 소피를 구원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소피가 군인들을 쫓아낸 하울에게 자신의 목적지까지 알아서 가겠다고 말함에도 불구하고 하울은 자신 역시 누군가에게 쫓기는 상황이므로 좀 같이 가줘야겠다고 말하며 그녀를 반강제적으로 끌고 가기 때문이다. 이는 하울이 소피를 도와줬으니 소피 역시 자신을 위해 도와줘야 한다는 '상호 대가'의 관점이다. 그리고 상호 대가는 동물적인 기생 관계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기생적 마법은 근대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결국 동물적 상호 기생은 인간적 공생으로 대체되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상호 기생과 공생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랑의 정신이다. 소피는 자신에게 노인의 저주를 가한 마녀를 왜 도와주는가? 그것은 바로 그녀가 타인에 대한 연민과 공감, 더 나아가서는 만인에 대한 사랑을 품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는 앞서 언급한 소피의 만물을 애정하는 미 개념으로도 회귀한다. 


이런 관점에서 집적대는 군인으로부터 소피를 구한 하울의 도움은 재해석될 여지가 있다. 둘은 그 비좁은 골목길에서 처음 만났음에도 둘 사이엔 태초부터 서로를 먼저 생각하는 사랑이 있었던 듯하다. 이러한 조건이 충족된다면 그 만남은 기생이 아닌 공생이었다. 


3) 칸트적 자유

 영화에서 '자유' 키워드는 그렇게 많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영화 전체를 지배한다. 동생의 빵집을 떠날 때 동생이 소피에게 '자기의 것은 자신이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自分のことは自分で決めなきゃだめよ!)'라고 말하거나, 하울을 평가절하하는 설리만의 평가에 소피가 회춘하여 '하울은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살려는 것 뿐'이라고 말하는 대목이 그렇다.


 목이 마르다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는 것은 과연 자유로운 행동인가? 칸트는 아마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행동만 보면 자유로워 보이지만 이는 사실 내적 욕망에 구속당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칸트라고 물론 인간의 최소한적 본능을 부정하진 않겠으나, 그가 인간의 고결하고 강인한 정신능력을 신봉했던 철학자임은 사실이다. 


 이러한 칸트적 자유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탐욕이 가득한 마녀는 결코 자유롭지 못한 존재이다. 그러한 탐욕이 마녀를 자기파멸로 이끌었다. 이를 확대하여 해석하면 하울 역시도 자유롭지 못한 인물이다. 비록 그는 마녀와 같은 탐욕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캘시퍼와의 계약을 통한 동물적 기생 관계로서 마력을 취득한 이상 하울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피는 하울의 내면적 불안의 원인이 이 계약 관계로부터 온 것임을 간파하고, 낡은 유물을 버리고 성을 재탄생시켰던 때처럼 하울의 마법을 파괴한다.


 그래서 영화의 엔딩씬에서 하울의 성은 마법이 아닌 프로펠러와 날갯짓에 의해 가동된다. 혹자는 이를 두고 중세의 마지막 유물이던 마법마저 무너지고 근대적 기계장치에 의해 성이 가동되는 것이 아니냐며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외면적으로는 근대기술의 원조를 받고 있을지 몰라도 그들이 보존시킨 진정한 아름다움과 사랑은 전혀 흠이 가지 않았다. 따라서 이는 옛것만을 추종하고 고집스럽게 새로운 것을 부정하는 고루한 가치관이 아닌, 새것을 받아들이면서도 구시대의 정신을 잃지 않는 과도기적 본보기이다. 결국 마력에 대한 대가로 지불했던 하울의 정신은 마법을 포기함과 동시에 치유되며, 그의 내면은 소피가 보낸 진심어린 사랑의 메시지로 가득 찬다. 이는 사랑을 통한 진정한 자유의 회복이다.


 자유로워진 것은 하울만이 아니다. 캘시퍼 역시도 난로라는 공간적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었다. 흥미로운 것은 구속을 벗어던진 캘시퍼가 처음에는 이동성의 자유에 신나하며 하늘을 향해 멀리 날아갔다가, 결국 다시 그들에게 되돌아온 것이다. 하울과 소피, 마르크르와 허수아비, 늙은 마녀와 강아지 힌까지 그들 모두는 저주를 받았거나 어딘가에 구속된 측은한 인물들로서 하나의 대안적인 가족관계를 형성해 왔다. 그러한 유대감과 진정한 의미의 사랑은 캘시퍼가 진정으로 아끼는 것이었다. 목줄이 끊어진 뒤에도 집밖으로 도망치는 것이 아닌, 마당을 항상 기웃거리는 시골의 똥개처럼 캘시퍼의 자기구속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칸트적 자유이다.



5. 소피의 숙녀성

 노인이 되는 충격적인 사건 이후 이를 수용하는 소피의 태도는 정말 성숙하고 본받을 만하다고 생각된다. 마녀에게 저주를 뒤집어쓴 직후 놀란 마음을 감출 수 없음에도 '침착해야 해'라고 말하는 모습이 우선 그렇다. 다음으로 그런 놀람이 가신 이후에는 거울을 보며 '건강해 보여'라던지, '노인이 되면 잘 놀라지 않는다'며 긍정적인 부분을 찾는 것도 그렇다. 더 놀라운 건 그런 긍정적 마인드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변해버린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본래의 모습을 찾기 위해 위협을 무릅쓰고 산을 오른다는 것이다. 침착성긍정적인 마인드, 그리고 용맹함이 합쳐져 그녀의 숙녀성을 구성한다.



6. 미장센

 이 영화의 아름다운 작화에 대해서는 두말하는 것이 무의미하다. 캐릭터 역시도 하나같이 사랑스럽다. 그중에서도 내가 유독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우선, 설리만 선생에게 반발하는 노인 소피가 일시적으로 회춘되는 장면에서 작화뿐 아니라 성우진까지도 교체되는 장면이 그랬다. 급격한 변화가 어색하지 않도록 젊은 성우로 바뀌었음에도 처음에는 노인의 목소리를 모사하다가 점차 소녀스러운 목소리가 나오는 변화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또한, 영화 초반 노인이 된 소피는 허리가 구부정하게 다니는 경우가 많은데, 화장실 청소 문제로 하울과 다툰 소피가 비를 맞으며 우는 장면에서 소피는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있으며 우는 목소리까지도 젊은 성우에 의해 녹음된 듯하다. 특히 이 장면에서 그녀의 뒷모습만을 잡는 구도를 택한 것은 그녀의 늙은 얼굴을 가리기 위함이다. <탑건: 매버릭>이 불가피하게 늙어버린(물론 톰 크루즈니깐 그정도밖에 안 늙은거지만) 매버릭의 청년성을 강조하기 위해 그림자의 명암을 잘 조정한 것과 비슷한 효과이다. 


 또 결말부에서 소피가 하울의 유년기로부터 멀어지는 장면에서 재회를 기약하는 것은 <너의 이름은>의 큰 모토가 된 듯하며, 이때 드러나는 유성의 연출역시 마찬가지다. 또한 직후에 나오는 추락 장면 <날씨의 아이>에서 크게 오마주한 듯하다. 신카이 마코토가 미야자키 하야오를 계승하려 노력한다는 부분이 잘 드러내는 연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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