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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콩 Apr 07. 2022

1인분의 굶주림

이제는 굶주림이 필요하다. 이것이 굶주림에 대한 요즘 나의 단상이다. 더 이상 눈치보지 않고 먹을 수 있는 환경, 어떻게든 뒤지면 먹을 것이 나오는 집안(그것도 맛있는), 어릴 적부터 꿈에 그리던 집에 살고 있다. 작업 테이블위에 접시부터 올려놓고 일을 시작하는 내 버릇은 이제 굶주림을 원한다. 음식을 거절하지 못하며, 먹다가 멈추지도, 예의상 남겨놓는 배려도 못한다.

 ‘버린다’는 동사 앞에 ‘음식’이라는 주어를 절대 붙이지 못하는 엄마이기도 하다. 지금은 배고프다는 신호를 기다리는 것이 하나의 명상이자 미션이 되었다. 풍족한 삶이 주는 이 포만감이 왠지 기분이 나쁘다. 더 맛있게, 더 멋있게 차려먹고 싶어하는 내 욕망과 덜 차리고 덜 수고롭기를 바라는 욕망이 부딪힌다. 밥상에 돈과 시간을 들이기 싫은 오늘, 시장이 반찬이었던 시절의 굶주림을 더듬어본다.  


  내가 태어난 1983년은 20년넘게 지속된 강력한 산아제한 정책으로 대체출산율이 대책없이 떨어지고 있던 시기였다.* 그 쯤 부모님은 사별한 배우자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을 데리고 재혼가정을 꾸리셨다. 대체출산율이 2명을 겨우 도달한 그 해, 나를 시작으로 부모님은 아들 셋을 더 낳았다. 합이 일곱명이 된 자식 수는 시대감각을 떠나 당시 농촌에서도 보기 드물게 많은 숫자였다. 아이들은 커가는데, 정부의 시장개방정책으로 농산물가격은 폭락하면서 집안사정은 더 어려워졌다.


농사와 바닷일을 거들어야 했던 우리들은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팠다. 곳간을 뒤져서 나오는 쌀과 밀가루로 수제비부터 쌀튀김까지 원푸드 간식을 만들어 배를 채웠다. 반대로 정부정책에 힘입은 대기업은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오빠와 큰언니가 그들의 생산라인에 취직을 하고 내가 중학생이 되자 우리집 살림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아기때부터 엄지손가락을 자주 빨았다. 수저를 쓰게 되면서 손가락을 안 빨게 되자 이제는 밥을 빨아먹었다. 씹지 않고 입안의 밥물을 쭉쭉 빨아먹다가 삼켰으니 내 밥 먹는 속도에 엄마는 속이 터졌다. 할머니까지 앉으면 열식구가 함께 밥을 먹으니 밥상들은 늘 좁았다. 국그릇 놓을 자리가 부족해 두 개의 밥공기 가운데 국 하나만 놓았고 두 사람이 같이 먹어야 했다. 옆사람과 같이 떠먹고 다 먹으면 더 퍼준다고 해도 밥공기1개, 국1개를 차지하겠다고 떼를 쓰고 고집을 부린 사람이 나였다. 내 국그릇에 다른 숟가락이 들어오는 걸 참지 못했다. 덕분에 나는 1인분의 국을 독점하는데 성공했지만 ‘식탐 많은 아이’가 되었다.


  모든 구성원들이 한 아이에게 그 속성만 호출하기 시작하면 정체성이 되버린다. 식탐이 많은 아이는 사춘기에 이르러 보기좋게 살집이 붙어 약간의 과체중이 되었다. 마른 몸을 가진 구성원들은 나를 부를때 ‘뚱’이라는 글자를 덧붙이기 시작했다. 뚱순이, 뚱땡이, 뚱쓰, 뚱이. 아버지가 물려준 성 말고 새로운 성(姓)이 생겼다. 내 배고픔은 늘 식탐이라고 오해받았고 뚱뚱한 아이는 배가 고파서 먹는 게 아니라, 식탐이 많아서 먹는 것이 되었다. 내가 ‘뚱’이라는 성을 떼버리고 싶어할수록 내 몸은 굶주려야 했다. 열아홉살이 되어서야 가족들의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독립을 한 것이다.


 먹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굶주려야 하는 까닭이 있을 뿐이고, 더 희소하게는 먹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쁜 사람이 있을 뿐이다. 에너지원을 주기적으로 입속으로 넣지 않는 이상, 배가 고픈 것은 자연스럽다. 배가 고파올 때, 아, 배고파라는 말을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한다. 직장 다닐때는 점심 때, 배고프다! 밥 먹으러 가자~라고 말하기 전에 늘 망설였다. 배가 아픈데 배가 고프다고 착각한 건 아닐까? 점심땐데 왜 나만 배고파하지? 뚱뚱해서 더 빨리 배가 고픈걸까? ‘배고파’가 ‘욕심’으로 점철되었던 어린 시절 죄의식은 배고픈 나를 긍정하지 못하게 했다. 많이 먹는다는 얘기를, 식탐 많다는 말을 더이상 듣지 않는 몸을 만들기 위해 굶주리며 20대를 보냈다.  


  아직도 사람들과 식당에 가면 한 그릇 메뉴가 마음이 편하다. 피자나, 찌개 따위를 시켜 나눠 먹어야 하는 메뉴는 곤혹스럽다. 식사속도도 다를 뿐더러, 습관적으로 열심히 먹다보니 더 많이 먹게 되고, 상대방을 위해 남겨놓는 배려를 미처 하지 못하고 마지막 한줄기까지 먹고 만다. 그런 내 자신을 잘 알기에 모처럼 의식하며 먹는 날은 맛있는 걸 먹어놓고도 ‘먹었다’라는 동사앞에 ‘잘’이라는 부사를 붙이지 못했다. 1인분 한 메뉴를 독점하며 정성껏, 남기지 않고 깨끗히 먹는 것이 내게 가장 편한 식사다.


20년동안 많이 나아졌지만 어린시절 식탐과 식습관은 아직도 나를 끌어당기고 있다. 지구를 포함한 행성들은 태양의 거대한 중력에 이끌려 공전한다. 화성이나 금성같은 다른 행성들이 갖는 중력이 없다면 지구의 궤도는 시소처럼 한쪽으로 치우쳐서 흔들리고 비틀거렸을거라고 천문학자는 말한다. 다른 행성들의 중력 덕분에 지구를 태양의 궤도에 안정적으로 붙잡아 놓을 수 있다고 말이다. 가장 큰 행성 목성은 지구의 ‘보호자’, ‘엄마’라고도 불린다.(아빠이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지구에게 돌진하는 혜성이나 소행성들은 목성의 강한 중력에 붙들려 지구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 목성이 가장 많은 위성을 가지고 있는 까닭이다. 


 지구는 이처럼 주변 행성들의 유기적인 도움을 받아 온갖 생명체가 발현된 별이 되었다. 그 때의 식구들은 각자 다른 굶주림으로 나름의 중력을 느끼며 살고 있을 것이다. 어린시절 공전했던 태양계는 전체를 조망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만큼 멀어졌다. 과거라는 중력이 서로 뒤엉켜 발현된 유기물인 나를 바라본다. 과거의 굶주림이 지금의 나를 어떻게 만들는지 마주하고 나서야 그 중력에서 놓여났다는 걸 깨닫는다. 비틀거리고 흔들거리긴 했지만 분명히 내 우주는 확장되었다. 굶주렸던 감각이 깨어날 때마다 내 앞의 1인분을 소중하게 먹기 위해 배고픔을 기다린다. 굶주릴까봐 배려하지 못했던 내 앞의 관계에도 마음껏 빠져들고 싶다.


* 한국의 출산율은 1960년 이후로 감소해왔는데, 강력한 산아제한 정책의 영향으로 1983년 2.06명을 기록하면서 처음으로 인구유지가 가능한 대체출산율 2.1을 하회하였고, 1984년 1.74명으로 처음으로 1명대에 진입하였다.(출처:위키피디아)



2021년 12월 26일 마지막으로 고치고

2022년 4월 7일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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