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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콩 Dec 23. 2020

엄마가 짠 계획은 모두 엉터리야

내가 짠 계획보다 그 씨앗 안에 들어있을 계획이 더 중요하다.

  길 위로 달리기를 시작한 지 두 달이 넘었다. 1분 뛰고 걷고, 5분 뛰고 걷고, 10분 뛰고 걷다가 이제 멈추지 않고 6Km를 뛸 수 있게 되었다. 한 달만 연습한다면 5km, 약 30분 정도는 보통 어른이라면 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달리는 길은 도중에 건널목도 없어서 멈출일이 없는 완벽한 산책로다. 그 산책로는 공원을 옆에 끼고 있으면서 왕복 7km를 뛰어넘는 길이로 신도시를 가로지르고 있다. 도시설계자가 운동이 부족한 현대인을 배려해 자전거 금지 표지판까지 붙여가며 길을 계획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마음에 든다.

공원과 도심인도로 이어지는 하천산책로, 하천옆으로 편도3km 산책길이 조성되어있다.

오늘은 음악을 듣지 말고 조용히 달려보자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내가 지난주에 쓴 글들을 천천히 머릿속으로 천천히 다시 읽어본다. 그 글이 진실인지, 털끝만큼의 합리화, 핑계, 남의 눈치가 들어가지 않았는지 되새김질해본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시간은 분명 보통 어른의 삶과는 다르게 흘러간다. 내가 그 시간을 고통으로 기억할 때 그 시간에 온전히 머물러있지 못했다고 단언한다. 그럼 신은 내게 왜 그 시간을 주었는가? 그 안에서 내가 발견하지 못했던 목적은 무엇인가? 나는 테드 창이 내게 남겨준 물음을 길을 달리면서 해본다.


지금을 살 수 있는 기회


<달리기와 존재하기>를 쓴 조지 쉬언이 말한다. 아이와 시인, 성자와 운동선수들은 몸과 마음, 정신이 살아있는 사람들인데 그들에게 시간이란 늘 지금을 뜻한다고.

그들은 영원히 지금을 살아간다. 격렬하게, 헌신적으로, 지금 이 순간 속으로 뛰어든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곳은 바로 여기이며,
가장 중요한 시간은 바로 지금이며,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앞에 있는 사람이다.  


아이를 낳기 전 내 머릿속은 초 단위로, 분단위로 쪼개져서 돈 버는 일에, 다른 사람에게 맞추는 일에 찌들어있었다. 휴식을 원하면서도 성공적인 도시인의 삶을 위해, 멋지게 살게 될 앞날을 그리며 일터에 매달렸다. 결혼 후 일에 파묻혀있을 때 내 몸에 찾아온 첫 생명을 한 달 만에 빨간 피로 내보기도 했다. 그리고 아이 셋을 낳았다.


'지금을 살아갈 기회'를 준 것이 출산이 아니었을까?

아이들은 지금 현재에 산다. 이 순간에 모든 것을 건다. 먹고 싶은 건 먹어야 하고 이 곳에서 놀 때는 이곳의 즐거움만 머릿속에 가득하다.먹는 것도 미루고 추운 줄도 모르고 해가 지든 말든 걱정 없이 논다. 이 아이들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은 축복이 아닐까?아이들은 내게 8년 동안 말하고 있었다.

'네가 짠 계획은 모두 엉터리야, 난 여기가 좋으니 네가 만든 다음 일정이 뭐든 여기서 질릴 때까지 놀 거야'

이것을 받아들이면 가장 편한 육아가 된다. 문제는 아이의 시간이 자꾸 어른들의 시간과 부딪힌다는데 있다. 나는 그걸 피하려고 일을 관둔 것이 아닌가?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불안해서 남들이 정한 시간에 맞추고 놀이를 끝내고 억지로 재우고 끌어내면 아이에겐 그날 하루는 아무것도 되지 못한다. 내 인생에서도 아이 인생에서도


봐! 넌 지금 너를 방해하는 수많은 규칙들과
너를 두렵게 만드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으로
네 지금 현재를 고스란히 바치고 있어.
그런 것들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네 아이들이 네게 말하잖아.
얼마나 좋으니, 아이 키운다는 목적으로
자본을 위해 네 시간을 바치지 않아도 돼.
이게 신이 너를 위해 준비해둔 생의 일부분이야.
이 너른 숲에 뛰어노는 아이들 틈에
너만 뛰어든다면 이 시간은 네 거야!


그렇게 내 생각들은 고르게 깔아놓은 산책로를 따라 리듬에 맞춰 나아갔다. 저 멀리 내가 올라야 할 첫 번째 언덕이 보인다. 어제도 올라갔고 지난날에도 오른 언덕인데도 두렵다. 저 언덕을 넘을 때 숨이 차올라 힘들까 봐 두렵다. 헐떡거리면서 다음에 나올 언덕을 포기할까 봐 겁이 난다. 저 언덕이 내 페이스를 늦추는 것이 싫다. 내 달리기가 어제보다 나아지지 못할까 봐 걱정된다.


그 말은 내가 고통과 싸운 적이 없다는 뜻이다. 그 말은 내가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마음을 괴롭히고 있다는 뜻이다. 그 말은 내가 아직도 내 삶을 사람들에게 진열하고 싶다는 뜻이다. 아직도 내 흐름보다 다른 사람의 흐름을 따라가고 있다는 뜻이다.

많은 책들을 그렇게 읽으면서 행동하지 못하는, 앎이 삶이 되지 못하는 내가 부끄러웠다.하지만 나는 내 불편함과 먼저 맞서지 않으면 안 된다.쉰 살이 넘어서도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던 조지 쉬언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신과 싸운다.신이 내게 부여한 한계와 싸운다. 고통과 싸운다. 나는 굴복하지 않는다. 나는 이 언덕을 정복할 것이다. 그것도 혼자서!

오늘 처음으로 6km를 달렸다. 언덕을 올랐음에도 페이스도 어제와 비슷했다. 다음에 나오는 언덕을 뛰어서 올랐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달렸다. 얼굴을 뒤덮은 땀을 닦는다. 달릴 때 떠오르던 생각들이 달리기를 끝내고 나면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한 글자도 써 내려가지 못했다.다른 사람들과 연결돼있는 달리기 어플의 모든 알림과 소리를 끄고 이어폰도 끼지 않고 달리니까 그 생각들을 글로 적을 수 있게 되었다.


아이들은 내가 정성 들인대로 자라주지 않는다. 똑같은 잔소리를 하고 키우는데도 아이 셋의 식습관, 생활습관이 다르다. 그들은 이미 그렇게 새겨진 채로 나오는 것일 테고 오로지 미래의 것이다.

모래알 같은 아주 작은 상추 씨앗들을 흙에다 심어놓으면 그 작은 씨앗들 거의가 싹을 틔운다. 속도도 모양도 키도 제각각이다. 2년동안 상추를 키우면서 놀랐던 것은...99%씨앗이 싹을 언젠간 틔웠다는 사실이다. 렇게 작은 씨앗에도 어른 상추 기억이 들어있어서 싹을 틔우는데 인간은 어떻겠는가. 그러니 내가 짠 계획보다 그 씨앗 안에 들어있을 계획이 더 중요하다.

베란다텃밭에 씨앗을 뿌렸더니 어김없이 자라고 있는 상추들.


2020년 11월 12일 처음 쓰고 12월 23일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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