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바다다. 풀이 무성한 길 사이로 잘 밀어놓은 시멘트길 모퉁이를 돌자 사방이 툭 트인다. 하얗고 파란 물감만 풀어놓은 듯한 풍경에 눈이 부시다. 작고 동그란 자갈들이 가득한 해변이 물기를 머금은 채 바다를 맞는다. 고향섬에 맞닿은 바다중에 가장 예쁜 바다였다. 오늘은 특히 멋진데. 우리 마을에 이런 곳이 있어, 친구들에게 보여줘야지.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파노라마로 찍으려면 어디로 들어가야하지? 노출이 심해 파란색이 잘 담기지 않는다. 저 끝으로 고등학교 친구들 뒷모습이 보인다. 학교를 가는 길이리라. 올 때는 나랑 같이 와놓고 갈 때는 인사도 없이 가버리다니. 어차피 난 지금 학교에 안다니니까. 서둘러 따라갈 필요가 없다.
바다가 나를 품에 안아준다. 줄곧 내 문장은 바다가 주어였다. 나는 늘 그것이 주체인냥 말했다. 바다는 알고 있다. 나도 친구가 있어. 하지만 11시밖에 안됐다. 그 친구는 지금쯤 자고 있을 시간이라 전화를 하면 안 돼. 왔던 길을 다시 되짚어 길을 걷는다. 어찌됐든 나란 사람은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오른편의 마을이 왼편의 밭을 마주보며 그 사이로 길을 내었다. 그 길로 소 한마리가 나타난다. 코뚜레를 한 소는 주인이 잡은 줄을 뒤로 하고 앞서 가는 중이다. 소가 아무리 무거운 멍에를 지고 있어도 주인은 소보다 먼저 걷지 않는다. 그것은 위험한 일이다. 크고 휘어진 뿔을 한 그 소가 나를 쳐다본다. 주춤 주춤 밭 가장자리 울타리에 붙어 발걸음을 옮기는 나와 집쪽으로 붙어 가는 소. 주인은 한 손에 전화기를 잡고 이야기하느라 줄을 잡은 손까지 신경쓸 겨를이 없다. 두 척이 좀 넘는 소와 나 사이의 거리감이 안심된다. 안다. 소는 사람에게 뿔을 들이대지 않는다는 걸. 어릴적 좁은 골목에서 마주오던 소가 코를 내 얼굴에 문지르려고 해서 비명을 지르고 달아난 적이 있다. 소의 침은 강력한 점성을 지녔기에 한번 묻으면 잘 지워지지 않는다. 한마리를 겨우 보냈는데 또 한마리가 온다. 줄도 없이 혼자다. 자세히보니 뿔이 아직 다 자라지 않았다. 그 작은 뿔이 울타리 말뚝을 잇는 줄에 걸려서 성이 나있다. 소는 대각선으로 길을 막고 뿔을 빼보려 머리를 비튼다. 어쩔수 없다. 울타리를 넘어가 밭을 밟고 돌아가기로 한다. 파종 전인지 밭이 부드럽게 갈려있다. 다리가 푹푹 빠질 정도다. 하필 더 기름져보이는 까만 흙밭으로 손에 든 것을 놓쳤다. 구모양의 작은 철제통 위에 달린 손잡이를 겨우 찾아내 꺼내어 흙을 털어낸다. 이런 벌써 까매져버렸다.
밭주인은 허리까지 밭에 빠뜨린채 일을 하고 있다. 내 인기척을 듣고 큰 솥단지 같은 것을 꺼내놓는다. 침이 고인다. 저기 저 소들 때문에 어쩔수 없이 들어오게 됐어요. 밭주인 얼굴을 자세히 보자니 낯이 익다. 그을린 얼굴에 짧고 투박한 머리. 눈 코 입이 대체로 무난하여 썩 잘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애써 웃음을 흘리지 않는 익숙하고 안전한 얼굴이다. 어? 어제 이사람 집에 다녀온 것 같은데? 운동복 차림을 하고 있었지. 혹시 달리기 하지 않으세요? 나 어제 달리다가 그쪽 만난 것 같은데. 갑자기 밭주인은 곤란해한다. 당신은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다고 우리 집안 사람들이 당신을 만난 걸 알면 놀랄 거라고 한다. 그걸 알고 있느냐고 내게 묻는다. 내가 그걸 어찌 아냐고 답하는 얼굴이 웃고 있다. 어떤 걸 좋아하는지 내게 물어온다. 동그라미 나는 동그라미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어떤 아주머니가 울타리에 턱을 괴고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팔자 주름이 깊은 아주머니 얼굴에 해가 들고 긴 치맛자락이 바람에 날리며 선을 구부린다. 신이 만든 것들은 모두 곡선의 파도를 갖고 있다. 직선은 인간이 만든 것. 아주머니, 이 사람은 언제 이 마을 사람이 되었어요? 집은 어디래요? 아침마다 이 길을 달리는 거 보셨어요? 이것 저것 묻는다. 답이 없다. 나도 서두르지 않는다. 아주머니는 화장실에 가야 한다며 자리를 떠난다. 밭주인을 슬쩍 쳐다보는 아주머니 얼굴이 희미하게 웃는다. 나는 이 밭을 떠나고 싶지 않다.
* 어제는 흐리다가 맑아졌고 오늘도 맑다가 비가 왔는데 그것만으로 하늘의 변화를 설명하기에 늘 부족함을 느낀다. 그래서 카메라 파노라마 기능을 켜 많은 걸 담고자 찍으려고 하면 오래된 벗들은 떠난다. 있는 힘껏 걸어서 멀리 나왔는데 결국 원래 나에게 돌아온다. 나는 내가 좋아서 끌어당기는데 나는 내가 못미더워 멀리 달아난다. 다시 돌아올 때마다 이제는 고개를 들고 환대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