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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뷰하는리타 Jun 03. 2021

술의 돈값 : 글렌모렌지 시그넷

비싼 건 다 이유가 있다니까


어떤 세계에나 가성비 갑의 지위를 차지하는 물건이 있지만 대부분의 물건은 돈값을 한다. 싸면 어딘지 모르게 싼 티를, 비싸면 비싼 티를 풍기기 마련이다. 나는 먹을 것이라면 더욱 그러하다고 믿는다. 특히 천연 상태에 가까운 식재료인 생고기, 해산물, 과일과 술은 확실히 그러하다고 믿는다. 가성비 따지지 않고 비싼 식재료를 고르면 그날 저녁 식탁에서 감동할 확률이 높다. 그나마 술은 맛과 향마다 취향이 있어 취향에 맞는 술을 적당히 마시면 된다고 생각했건만. 글렌모렌지 시그넷을 만나고 술의 돈값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시그넷 이전의 위스키


동반자는 20대 중반에 위스키에 눈을 떠서 나름 이것저것 맛을 본 위스키 덕후다. 하지만 도수가 높고 가격이 비싸서 날름날름 마시기 어려운 술이기도 하고, 워낙 넓고 깊은 세계라 덕후라고 해도 동반자의 경험이 아주 풍부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행히 동반자는 관심사에 한해 비상한 기억력의 소유자라 먹어본 위스키의 특색을 잘 기억한다. 연애 초기부터 동반자는 다양한 술이나 위스키의 맛을 내게 알려주려고 노력했다. 바에 가서 헨드릭스 진을 바틀로 시키기도 하고 스픽이지바에 데려가서 본인이 시킨 위스키를 한 입 주기도 하면서 말이다. 우리는 서로의 미각에 무한 신뢰가 있어서 맛있다고 여기는 음식을 안내하는 데 특히 열정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반자의 무던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헨드릭스 진에서 석유 냄새를, 위스키에서는 각목의 맛을 느꼈다.


사람마다 냄새에 호불호가 다르기 마련인데 나에게 위스키 고유의 오크통 냄새는 불호다. 산에서 들에서 나는 온갖 씁쓸한 풀은 좋아하면서 고수는 여전히 마뜩잖아하는 것처럼, 술이라면 다 찍먹이라도 하고 싶어 하지만 위스키에서 나는 각목에 정로환을 더한 듯한 냄새는 못 견디게 싫다. 정로환은 원래 배탈, 설사 등을 겪을 때 먹는 용도의 약이다. 하지만 과거 무좀에 좋다는 낭설이 있었다. 내가 어린 시절부터 무좀으로 고통을 겪던 아빠는 주기적으로 식초에 정로환을 풀어 발을 담갔었다. 한 번 일을 치르고 나면 시큼하고 꿉꿉한 냄새가 며칠 동안 집 안에 머물렀다. 그 기억 덕에 정로환의 꼬름한 냄새를 생각하면 자꾸 발도 같이 연상된다. 정로환 냄새가 곧 발 냄새로 여겨진다는 말이다.


이런 사정도 있고 하니 나는 위스키를 좋아하지 못하리라 여겼다. 그러다 위스키 싫어하는 사람은 이 술을 일단 먹어보라고 추천하는 글을 접하게 됐다. 이 술이 바로 글렌모렌지 시그넷이다. 글쓴이는 몰트에 독특한 처리를 해 엄청나게 풍부한 향이 나면서도 부드러운 위스키이니 글렌모렌지 시그넷만큼은 다른 위스키와 다른 맛과 향을 보여줄 것이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글쓴이 혼자만의 주장이라면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을 텐데 글 아래 경험자들의 간증 댓글이 여럿 달려있었다. 즉시 동반자에게 물어봤더니 먹어본 술이라고 하면서 맛을 상상하고는 침을 뚝뚝 흘리는 이모지를 보냈다. 이 비싼 술을 어떻게 하면 적당한 이유를 붙여 먹을 수 있을까 고민한 끝에 2021년 동반자의 생일 선물을 글렌모렌지 시그넷으로 정했다. 본인이 궁금한 술을 왜 남의 선물로 정하냐고 해도 다 이유가 있다. 오랜만에 기억 속의 맛을 떠올린 동반자도 시그넷을 몹시 그리워했기 때문이다.


시그넷 이후의 마음가짐


생일을 기념하며 처음 먹어본 시그넷은 위스키의 신세계였다. 술에서 나는 향을 이 정도로 풍부하게, 온 감각을 동원해 느낀 경험은 아마 처음이었던 것 같다. 다크 초콜릿 향이 난다더니 진짜 나네? 커피 향이 난다더니...  진짜네? 오렌지 향이 난다더니 정말 느껴지잖아? 게다가 놀라울 정도로 부드러운 질감을 지닌 위스키였다. 알코올 도수가 높으면 고량주처럼 입안과 목을 할퀴는 강력함이 있기 마련인데 시그넷은 46% ABV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가볍고 부드럽게 입안에 머물렀다. 물론 글렌모렌지 시그넷도 위스키라 오크 향이라고 칭하는 특유의 각목 맛과 피트 향이라고 부르는 꼬름한 정로환의 향기가 있다. 그래도 워낙 다른 향이 풍부해서 피트 향은 많이 묻히는 편이다. 술을 마시면 점차 숨에서 술 냄새가 묻어나는데, 마실 때는 시그넷이 가진 다양한 향기에 가려져도 내쉴 때는 역시 피트 향이 이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냄새 덕분에 나는 취하기 전에 본인의 숨 냄새가 싫어져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나마 저렴하다는 남대문 시장 주류 상가까지 가서 구매했지만 28만 원이다. 가기 전에 검색해서 알아본 바로는 22~23만 원 정도였다. 남대문 시장 주류 상가의 가격은 워낙 수요에 민감하게 반응해 변동이 심한 편이다. 당시에 시그넷의 인기가 많아 수요도 많아졌고 물량 확보도 어려웠다고 한다. 여러 가게에 들러 가격을 물어보았는데, 아예 보유한 물량이 없다는 가게도 많았다. 반면 같이 구매했던 아드벡 10년은 8만 원 정도였다. 글렌모렌지 시그넷 1병은 아드벡 10년을 3병 사고도 4만 원이 남는 가격이다. 하지만 아드벡을 마셨더라면 위스키에 대해 생각을 고칠 일은 영영 없었을 거다. 심지어 아드벡은 피트 향이 강력하기로 손에 꼽히는 위스키이니 고문 당하는 기분이었으리라 본다.


그래서 28만 원에 비할 경험이었냐고 묻는다면, 그렇다. 위스키는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적게 경험했지만 일단 맛있는 위스키가 평생 처음이었다. 왜 사람들이 고작 액체 따위에 단위가 다른 돈을 쓰는지 이해가 갔다. 하지만 28만 원을 주고 다시 경험하겠냐고 하면, 모르겠네 싶었다. 28만 원의 가치가 없다기보다 28만 원이면 이 정도로 맛있는 술이 또 없겠나 싶은 생각에. 하지만 그 후 공병이 되어 방 한 구석을 차지한 시그넷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시그넷의 맛이 그리웠다. 위스키 안티가 위스키를 그리워하게 만들다니 이것이야말로 진짜 돈값하는 결과가 아니냔 말이다. 어떻게 다시 마실 일 없나 고민하다가 2021년 10월 제주도를 다녀오는 길에 제주공항 면세점에서 한 병 업어왔다. 28만 원을 주고 샀을 때에도 돈값한다고 생각했는데, 19만 원이면 안 사는 게 손해지. 어차피 살 거면서 꼭 이렇게 자기 합리화를 하고 넘어가야 술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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