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맛 좋으려고 산을 탑니다
서른 살 이전에 산에 오른 이유는 세 가지다. 첫 번째, 가족 나들이. 자가용이 없는 부모님은 여름이면 지하철로도 쉽게 갈 수 있는 관악산으로 동생과 나를 데리고 갔다. 꽤 많이 산을 올라야 인적이 드문 계곡이 나왔다. 차가운 물에서 헤엄친 뒤 맨밥이 1층, 가게에서 팔던 돼지갈비가 2층, 과일 등 각종 후식과 김치가 3층을 차지한 3단 도시락을 먹었다. 물이 철철 흐르는 계곡을 전세 낸 것처럼 차지하고 평평한 돌에 앉았다 누웠다 하며 주말을 보낸 기억이 선명하다. 하지만 그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등산을 하는 건 싫었다. 산을 오르기 싫다고 징징거리면서 몇 번의 여름을 관악산에서 보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무렵부터는 완고하게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리고 두 번째, 학교에서 한 행사. 꾸역꾸역 올라는 갔지만 요령이 없었던 여고생은 지친 몸을 마구 휘두르며 털레털레 하산한 대가로 무릎이 아파 이틀간 밤잠을 설쳐야 했다. 마지막 세 번째, 회사에서 한 행사. 북한산 백운대를 오르는 여정이었는데 더운 여름날 빨리 올라가고 말아야지 하는 생각에 페이스 조절에 실패했다. 지칠 대로 지쳐 잠시 앉아서 쉬려다가 그대로 퍼져버렸다. 결국 죽을힘을 다해 가까스로 내려왔다. 어쨌거나 자의로 등산이라는 행위를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등산은 너무 힘이 들고, 너무 숨이 차고, 너무 오래 걸렸다. 건강한 덩치에 그렇지 않은 체력을 가진 나는 계단이 무서워 지하철도 피해 다녔다. 서서 가기라도 하면 허리가 아파 주저앉거나, 현기증을 느껴 토할 것 같은 기분에 중간에서 내려야 했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이라도 목적지에 닿을 수만 있으면 버스를 탔다. 가만히 서 있기도 힘든 지경이니 산은 물론이고 모든 신체 활동과 거리가 멀었다. 아픈 몸은 모든 움직임을 두려워하게 만든다.
그렇게 먼 과거까지 갈 필요도 없다. 대충 스물아홉 살의 나에게 누군가가 "너 몇 년 뒤면 주말에 등산 가고 싶어 해."라고 말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올해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약간의 정정은 필요하다. "너 몇 년 뒤면 주말에 술 마시기 전, 미리 등산하고 싶어 해."
2년 전 필라테스로 생존 운동을 시작한 뒤 홈트레이닝을 꾸준히 하며 체력이 조금 붙었다. 숨이 차는 느낌을 예전만큼 혐오하지 않고, 오히려 심박수 오른다(=운동이 되고 있다)며 신나 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나만큼 술을 좋아하는 동반자를 만나는 바람에 지치지 않고 오래 술을 마시기 위해서 건강이 필요했다. 주말에 동반자와 세상에 맛있다는 술이며 음식을 모조리 부시러 다니는 대신 주중에는 운동하고 건강하게 먹으려 안간힘을 썼다. 적게 먹기보다 건강하게 먹기가 중요했다. 드레싱을 뿌리더라도 하루에 한 끼는 샐러드를 먹었다. 고기는 양배추 또는 상추쌈을 싸서 배부르게 먹었다. 근육통이 있거나 너무 귀찮으면 쉬었지만 가급적 주 4회 정도는 운동을 했다. 반면 코로나19 확산 여파로 헬스장을 못 가게 되어 운동을 중단한 동반자의 배는 나날이 둥실둥실해졌다. 고민 끝에 데이트 코스에 산행을 추가한 것이 지난 3월이었다.
동반자의 고향인 서산은 바다가 가깝고 오밀조밀 귀여운 산도 많다. 산린이가 기초를 닦기 딱 좋은 동네 뒷산 수준이다. 우리의 첫 산은 그중 하나인 황금산이었다. 156M라는 만만한 높이지만 바다가 훤히 보이는 특별한 뷰, 코끼리 바위, 몽돌 해변이 같이 있는 산이다. 얕아도 완만한 구간이 거의 없고 등산로도 잘 닦인 편이 아니라서 마냥 편하지는 않았다. 산을 오르고 주변까지 다 둘러보는 데 90분밖에 안 걸렸고, 약간 지쳤지만 가뿐한 마음으로 쉬다가 단골집에 삼겹살과 소주를 먹으러 갔다. 이 날은 환상의 술맛을 경험한 역사적인 날이 되었다. 처음 방문한 집이었다면 비교 대상이 없어 확신까지는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에겐 비교할 날이 너무 많았다. 고기의 질은 매번 편차가 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매번 밑반찬으로 나오는 갈치속젓, 명이나물, 청국장이 이렇게 감동적일 게 뭔가. 땀을 좀 뺐으니 벌컥벌컥 들이켤 게 필요해서 소맥으로 시작했을 뿐인데 왜 이렇게 달고 시원하단 말인가. 그날 동반자와 나는 술맛에 연신 감탄하다가 소주를 6병쯤 마시고 기절했다.
등산 후 술맛을 본 술꾼은 점차 계획이 있는, 점점 더 치밀한 계획을 짜는 술꾼으로 진화했다. 매주 서산 주변의 작은 산을 찾아 지도를 뒤지기 시작했다. 하산 뒤 방문할 맛집과 이어지는 저녁 안주까지 촘촘하게 계획을 세웠다. 서산 시내의 부춘산을 다녀온 날은 점심에 경양식 돈가스를 먹고 저녁에는 좋아하는 노포의 굴보쌈에 소주를 마셨다. 옆동네의 가야산을 다녀온 날은 하산 후 덕산 온천에서 몸을 지지고 예산의 갈빗집에 가서 소맥을 마셨다. 또 다른 옆동네의 아미산을 다녀온 날은 제철이었던 꽃게를 잔뜩 쪄서 바지락탕을 곁들여 소주를 달렸다. 가야산 옆 용봉산을 다녀온 날은 산 아래 식당에서 도토리묵에 막걸리 두 잔을 마시고 조금 쉬다가 저녁에 제철 대하를 찌고 전어회 한 접시를 사다가 소주를 곁들였다.
인간은 학습의 동물, 몇 번 반복하니 등산과 술맛의 상관관계가 완벽하게 학습됐다. 등산 가는 날은 무조건 좋은 날이다. 숨을 헐떡이며 엉덩이나 허벅지를 부여잡고 멈춰서는 순간에는 '이게 다 무슨 짓인가' 싶다가도, 주차장으로 돌아와 앞으로 먹는 일만 남았음을 인식하면 내적 댄스를 멈출 수 없다(가끔 외적 댄스로도 발현된다). 열기가 남아있는 지친 몸에 차갑고 찌릿한 알코올을 부어 넣는 바로 그때, 그 순간마다 다음 등산을 위한 동기가 100% 충전된다. 산행을 몇 번 반복하니 평지에서는 만나지 못하는 탁 트인 풍경도 산을 오르는 동기로 자리 잡았다. 흐린 날에는 모든 풍경이 세계 멸망 직전처럼 보이지만 맑은 날이면 언제 다시 이런 풍경을 볼까 싶도록 아름답다. 하지만 다른 산을 오르면 그만큼 좋은 풍경을 금방 다시 만난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벅차오른다.
90분으로 시작한 첫 산행 이후 조금씩 욕심을 내기 시작해서 지금은 3시간 내외의 코스로 다니곤 한다. 한여름에는 날씨 탓에 주춤하지만 틈틈이 지도를 살피고 다음 산행지를 노리며 즐거워한다. 이번 주말에는 가야산 옆의 또 다른 산인 일락산을 점찍어 두었다. 일락산 옆에는 산수가야가든이라는 유명한 파김치 장어집이 있다. 아니면 웨이팅이 부담스러워 미뤄놓았던 해미읍성의 북경반점에서 간짜장에 탕수육을 안주 삼아야 할까? 안주 선택에는 항상 진심이지만 그날은 뭐든 상관없다. 음주 전 등산을 해놓은 날은 실패하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