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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뷰하는리타 Oct 13. 2021

술 이름에 밤이 들어가면 반칙 : 서울의 밤

그리고 은하철도의 밤

어떻게 이름이 서울의 밤이야


요즘 세상에 네이밍이 중요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나는 네이밍이 특히 중요한 분야 중 하나가 술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살짝 분리가 필요하긴 한데 친구 만나서 신나자고 들이키는 맥주와 소주 이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주류업계의 관계자들이 보면 뒷목 잡을 말이지만.) 실제로 브랜드 네이밍의 중요성 운운하는 자료에서 잘 지은 사례로 처음처럼이 빠지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냥 생활 음주자에게는 정말 중요하지 않다. 나는 참이슬 - 처음처럼 - 진로이즈백 순으로 애착 소주가 변했다. 변화 과정에서 네이밍은 영향을 준 바 없다. 소맥을 제조하려는 용도로 마시는 맥주는 그냥 그 가게에 있는 걸 마신다. 요즘 국산 맥주 중에는 한맥이 괜찮았지만 한맥의 뜻도 모른다. 양꼬치에는 칭따오보다 하얼빈을 곁들이는데 하얼빈의 맛이 더 좋아서이지 하얼빈(도시)을 더 좋아하는 건 아니다.


반면 고심해서 술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갑자기 이름이 중요해진다. 수제 맥주집에 가서 한 잔에 7~8천 원씩 하는 맥주를 고를 때면 가격, 한 잔의 양, 도수, 향도 보지만 이름을 그렇게 열심히 본다. 마트에서 진로이즈백 대신 뭔가 색다른 술이 마시고 싶어 서성일 때도 마찬가지다. 일본주, 증류식 소주, 리큐르주 등은 리뷰를 따로 찾아보지 않는 이상 맛을 예측하기 어렵다. 매실로 만들었다면 매실향이 나겠거니, 꿀이 들었다면 꿀향이 나겠거니 하고 살 수밖에. 이렇게 손에 잡히는 정보가 적을 때 네이밍의 중요성이 빛을 발한다. 그리고 술꾼 특유의 감성도 고개를 든다. 이러한 연유로 집어 들 게 된 술이 서울의 밤이었다. 무덤덤한 이름을 가진 일품진로 옆에, 와닿지 않는 이름을 가진 대장부 옆에, 감성을 뽐내는 디자인으로 새침하게 서 있는데 하필이면 술 이름도 '서울의 밤'이라니.


집어 든 건 네이밍 때문이지만 나는 합리적인 소비자이므로 꼭 제품 상세정보도 살펴보곤 한다. 식품유형 : 증류주(리큐르)ㅣ알코올:25%ㅣ원재료명: 매실(국내산100%)증류원액... 매실? 매실주는 그렇게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 첫 번째로 나와있는 원재료에 대한 미적지근한 선호도도 술 이름 네 글자가 주는 기대감을 밀어낼 수 없었다. 이건 마셔야 해. 맛이 어떻든 적어도 한 번은 마셔봐야 해. 그렇게 처음 만난 서울의 밤을 마셔본 소감은, 괜찮았다. 토닉워터에 타 마시면 맛있다길래 시도했지만 의외로 스트레이트가 나았다. 열광할 정도로 취향을 저격한 건 아니지만 특유의 맛이 선명한 술이라 그 후에도 생각날 때 서너 번 더 마셨다. 맛이 괜찮아 여러 번 마시면서도 예쁜 디자인과 이름을 보면 어쩐지 의구심이 든다. 서울의 밤이라는 이름이 아니어도 마셔봤을까?


주재료가 배이긴 하지만 역시 매실이 들어갔다는 오매락은 한 번도 마셔볼 생각을 안 했다. 서울의 달 주변에 자주 보이는 한산 소곡주나 문배주를 마셔보고 싶었던 적도 없었다(마셔는 봤지만). 서울의 달은 그냥 이름이 서울의 달이라는 이유로 첫 만남이 성사됐다. 재구매부터는 구매의 이유에서 술 이름의 지분이 급격히 줄어들었지만, 첫 구매가 있어야 재구매도 있는 법이다. 다시 생각해봐도 도리가 없는 선택이었다. 술꾼에게 밤이라는 단어는 낭만 그 자체니까. 낮술도 나름의 재미가 있다지만 훤한 낮에 붉어진 얼굴, 풀린 눈으로 대로를 돌아다니는 건 내키지 않는다. 반주 삼아 마시거나, 집에 숨어서 마시거나 하는 게 아니라면 낮술은 내가 원하는 술자리의 느낌이 없다. 적어도 해가 떨어지기 시작하는 시간이어야 술꾼의 감성이 촉촉해진다. 


이름 뒤에 숨은 낭만


그래서 술꾼은 밤이라든지 달이라든지 별이라든지 하는 게 술 이름에 들어가면 자꾸 흔들린다. 제품 상세정보를 살피려는 시도인 척 하지만 사실 한 번 집어 들지 않고는 견디지 못한다. 작년 이자카야에서도 완전히 똑같은 경험을 했다. 오늘은 일본주나 마셔볼까! 하고 주류 메뉴판을 펼 쳐들자 생전 처음 보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술이 있었다. 무려 '은하철도의 밤'이었다. 메뉴판에 작게 넣어둔 이미지 속 디자인도 이름을 그대로 구현한 듯했다. 밤이 가진 특유의 푸른빛을 극대화한 것 같은 색의 유리병이었다. 다시 한번 반복한다. 이건 마셔야 해. 맛이 어떻든 적어도 한 번은 마셔봐야 해. 그렇게 은하철도의 밤을 주문하고 병이 나오자마자 홀딱 반해서 끌어안고 사진까지 찍었다. 장난감 선물 받은 어린이가 따로 없지 뭐야.


은하철도의 밤은 일본의 이와테현에 있는 사쿠라가오 주조의 술이다. 이와테현은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에 모티브를 제공했다고 알려진 <은하철도의 밤> 저자 미야자와 겐지의 고향이다. 사쿠라가오 주조에서 원작 소설을 기념하기 위해 동일한 이름을 가진 술을 빚은 것이다. 푸른 병에 붙은 라벨은 1934년에 나온 초판본의 표지 디자인 요소를 많이 차용했다. 밤하늘과 빛나는 별, 별 사이를 이으며 밤하늘을 수놓은 별자리 같은 것들. 어린 시절 은하철도 999 좀 본 이력을 가지고 있으며 술을 좋아하는 어른으로 자란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치지 못할 요소를 잔뜩 가지고 있는 술이 아닌가. 은하철도의 밤이 다른 이름, 다른 디자인으로 메뉴판에 있었다고 상상해봤다. 제조사가 사쿠라가오 주조이고, 등급이 준마이긴죠이고, 정미율이 50%이고, 알코올 함량이 14%라는 다른 정보로 내가 이 술을 선택했을까? 그럴 리가.


지금은 아무리 노력해도 은하철도의 밤이 어떤 맛이었는지 떠오르지 않는다. 별다른 불만도, 인상도 남아있지 않은 걸 보면 흔한 일본주의 맛이었겠거니 싶다. 그럼에도 이자카야에서 다시 은하철도의 밤을 마주친다면 기꺼이 주문할 것이다. 술을 마시기 전부터 온통 푸른 술병을 보며 촉촉하게 감상에 젖어들 테고, 충만하게 오른 감성이 부추긴 그날의 술맛은 틀림없이 좋을 테니까. 서울의 밤도 은하철도의 밤도 그저 이름일 뿐 서울이랑도, 밤이랑도, 은하철도 999랑도 전혀 상관없지만 뭐 어때. 상술이 나를 설득하고 매료시킬 정도라면 기쁘게 넘어가 줘야 한다. 그래야 상술을 고안한 일꾼들도 보람차고, 앞으로도 술에 돈 쓸 이유를 계속 만들어줄 테니 나도 좋고. 그렇지만, 그렇긴 하지만, 술 이름에 밤이 들어가는 건 너무 빠르고 쉽게 술꾼을 설득하는 길이다. 그런 의미에서 술 이름에 밤이 들어가는 건 반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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