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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뷰하는리타 Oct 05. 2021

섞어 마시는 음료의 생명, 비율 : 하이볼

섞어 마시는 술의 미묘함


예전에 듣고 내내 잊지 못하는 말이 있다. 요리는 상상력으로 한다는 말. 어떤 재료가 얼마만큼 들어가고, A와 B가 섞였을 때 어떨지 상상하는 능력이 있다면 요리를 잘한단다. 요리에 어울릴 만한 새 재료를 떠올리는 것도 상상의 영역이다. 요리는 하다 보면 는다는 말도 상상력으로 채우는 영역을 경험치로 채워 실력이 올라갔다는 의미인 것 같다. 나는 상상력과 경험치가 모두 모자란 탓에 요리를 못하지만 딱히 잘하고 싶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다. 그러다 가끔 종류가 다른 술을 섞어 마셔야 할 때는 요리와 비슷한 능력이 필요한 것 같아 개탄스럽다. 감으로 적정 비율을 찾는 건 내게 묘기나 다름없으니까.


다양한 액체를 섞어 마시는 술이라면 단연 먼저 떠오르는 칵테일은 전문가의 영역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아무나 제조할 수 있으면서도 술자리에서 유난히 손맛이 좋거나 스스로 자부심이 있는 사람에게 맡기는 정도로 만만한 음료의 대표는 역시 소맥이다. 일품진로나 한라산처럼 도수가 약간 높은 소주를 토닉워터와 섞어 마시기는 ○○토닉도 흔해졌다. 맥주는 양주부터 고량주까지 섞지 못할 술이 없고. 섞어 마시는 (알코올) 음료는 전문가의 손길이 없어도 대충 맛있는 편이다. 하지만 경험으로든 상상력으로든 미묘한 비율을 기가 막히게 아는 사람들이 있다.


음료의 비율이란 음식의 염도나 산도처럼 어느 정도는 취향을 탄다. 독한 술을 선호하는가 불호하는가, 술에서 나는 단맛을 좋아하는가 싫어하는가 등은 맛이 있고 없고를 판단하는 중요한 취향이다. 그럼에도 생명과 같은 적정 비율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있다. 섞은 음료는 들어간 재료의 맛이 다 느껴지면 성공이다. 여러 음료를 섞어 나오는 결과물에서 한 종류의 맛이 압도적일 때, 대부분은 인상을 찌푸린다. 맛있는 소맥은 소주 특유의 단맛이 맥주의 씁쓸함을 뚫고 나온다. 들척지근하기만 하거나 소주 냄새만 풀풀 올라오는 진로토닉은 못 먹어줄 맛이다. 토닉의 단맛과 소주의 향, 레몬의 상큼함이 한 입에 다 느껴지게 만드는 사람이 장인의 칭호를 얻는다. 맛있는 경우는 이렇지만, 내가 경험한 최악의 경우는 따로 있다. 바로 결과물에서 그 어떤 맛도 뚜렷하게 느껴지지 않는 경우다.


거기서 거기인 칵테일은 없다


하이볼은 직접 만들어먹는 일이 드물면서도 제조하는 데 크게 전문성이 필요하지는 않은 칵테일이다. 하이볼을 만드는 베이스로 일본의 산토리 위스키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바보다 이자카야에서 흔히 만날 수 있다. 산토리는 하이볼을 띄우기 위한 마케팅을 공격적으로 펼친 끝에 현재의 이미지를 얻었다. 2013년 산토리가 Beam Inc.를 인수하면서 Beam suntory가 된 후, 같이 취급하는 가게가 많아져서인지 요즘은 짐 빔도 자주 보인다. 고급 위스키는 스트레이트나 온 더 락처럼 본연의 맛과 향을 즐기는 방식으로 마시는 게 일반적이라 그 외 베이스는 마주치기 어렵다(바 제외). 독한 술에 탄산을 섞으면 다 하이볼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대중적이고 저렴한 위스키를 편하게 마실 수 있는 대표적인 방법으로 자리 잡은 듯하다.


상암에서 회사를 다닐 때 레몬, 진저, 매실 등의 선택지가 있는 이자카야를 자주 갔다. 그곳에 가면 꼭 하이볼을 종류별로 격파해야 직성이 풀렸다. 엔빵을 해도 기가 차는 금액이 나왔지만 이상하게 그 집만 가면 그렇게 하이볼을 마셔댔다. 이제 와서 추측하는 거지만 사장님이 비율 장인이라 유난히 하이볼이 맛있었던 것 같다. 부담 없이 맛있기도 하고, 탄산수(사용하는 탄산수의 당도는 가게마다 다르기도)를 사용하기 때문에 느끼한 음식에 어울려서 다른 곳에서도 종종 하이볼을 마셨다. 하이볼의 맛은 어느 가게를 가도 편차가 크지 않았다. 여기는 위스키를 좀 아꼈네, 여기는 레몬을 안 넣어주네 정도의 차이랄까. 애초 하이볼에 엄청난 맛을 기대한 적도 없었다.


무난한 경험과 뻔한 맛에 균열이 간 건 작년이었다. 언제나 사람들이 줄을 서있던 양고기 집에 처음 방문한 날, 첫 잔으로 하이볼을 주문했다. 양고기는 느끼하니까 보나 마나 하이볼이랑 잘 맞겠지. 하지만 이 날의 하이볼은 등장 타이밍도 별로였다. 반주는 항상 음식보다 먼저 나와 식도를 촉촉하게 만들어주는 게 인지상정이거늘. 조금 구시렁거리긴 했어도 급한 건 나니까 빨리 한 모금. 동반자와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서로를 쳐다본 뒤 충격이 남아있는 표정으로 손에 든 잔을 내려다봤다. 와, 이 맛없는 하이볼은 대체 뭐지?


한없이 무맛에 가까운 하이볼


이후 그 가게를 방문하지 않았기 때문에 맛없음의 원인은 여전히 모른다. 흔한 산토리 하이볼이었으니 베이스의 문제는 아니겠고, 제조자의 컨디션이 나빴을까? 하여튼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처음 먹어보는 맛이었다. 위스키가 많이 들어갔다면 술맛이 강하게 나겠지만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탄산수가 많이 들어갔다면 좀 싱겁거나 달았겠지만 충격에 빠질 일은 아니다. 형용하기 어려운 그 하이볼의 맛을 굳이 표현하자면, '위스키를 우려내거나 헹궈낸 탄산물'이랄까. 어떤 재료도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위스키도 아니고 토닉워터도 아니고 하이볼은 더더욱 아닌 그 무엇. 위스키 맛도 없고 탄산의 존재감도 없고 단맛도 미미한 이 3無 음료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날의 식사는 바로 소주로 갈아탄 뒤 무난히 마쳤다. 하지만 이때의 충격은 처음 방문하는 가게에서 하이볼을 주문하면 첫 모금을 마시기 전에 약간 긴장하는 습관을 남겼다. 이후 경험한 하이볼은 다 적당히 맛있었는데, 그날의 '그것'은 뭐였을까? 세상에서 제일 맛없는 하이볼을 마신 뒤 나는 진심으로 깨달았다. 모두가 소맥의 생명은 비율이라고 외치지만 사실 모든 섞어 마시는 음료의 생명은 비율이다. 얼마 전 CU에서 엉겁결에 눈이 마주쳐 구매한 캄파리도 같은 교훈을 남겼다. 내가 만들고자 한 것은 캄파리 오렌지였다. 캄파리와 오렌지 주스를 1 대 2 비율로 섞는 간단한 레시피였지만, 술에 취해 눈대중으로 때려 부었다. 결과는 쓰디썼다. 아무 맛도 안 나는 최악의 결과는 면했지만, 전문가의 손길을 탄 네그로니에서 느껴지는 캄파리와는 향도 맛도 전혀 다른 술이었다. 그래 내 손으로 뭘 만들어. 그냥 사 먹자.


섞어 마시는 술의 비율은 생각보다 아주 많이 중요하다. 그러니 장인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술잔을 맡기시길. 그 사람의 눈에는 없는 선도 보일 것이다. 컵라면 안에 물 붓는 선처럼 선명하게. 반복 경험으로 소맥에 생명을 부여하는 방법을 체득한 경험 파라도 좋고, 처음 섞어보는 술도 기가 막히게 적정선을 예측해내는 상상력 파라도 좋다. 나는 덜 움직이고 더 맛있는 술을 마실 수 있는데 이유가 다 무슨 상관인가. 금손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한잔, 두 잔 받아마시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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