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는 야구를 안 불러도, 야구는 맥주를 부른다
올해로 야구를 본 지 5년이 되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을 따라 야구장에 가서 그대로 평생 팬이 되는 ○린이 출신이 많은 야구팬 특성상 5년은 매우 짧은 경력(?)이라고 할 수 있다. 반전은 내가 응원하는 팀이 kt wiz라는 것. KT는 KBO의 10개 구단 중 막내 구단으로, 2015년부터 1군 페넌트 레이스에 참가했다. 1군에서 경기를 한 시즌이 7 시즌밖에 안 되니 KT 팬 중에서는 나름 오래된 팬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다. 게다가 1군 입성 후 몇 시즌 동안 지독하게 수준 이하의 경기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지지리도 팬이 없다. 그나마 늘었다는 팬도 프랜차이즈 스타가 생기고 성적이 오르면서 유입되었으니, KT를 응원하기 시작한 시간순으로 팬을 줄 세운다면 나는 꽤나 상위번호가 아닐까 싶다.
KT는 창단 후 줄곧 약팀의 아이콘이었다. 2015 시즌 10위, 2016 시즌 10위, 2017 시즌 10위, 2018 시즌 9위, 2019 시즌 6위. 팀이 못하는 데 익숙해진 나는 2019 시즌이 역대급 성적을 보여주는 시즌일 줄 알았다. 이렇게 갑자기 성적이 오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2020 시즌 페넌트 레이스 2위로 첫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고(최종 순위는 3위), 2021 시즌에는 의문의 1위 독주를 하고 있다니. 한 달에 3승 하는 시즌을 실시간으로 봤던 나로서는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시즌을 보내고 있다. 뜻밖의 성적에 자부심이나 가슴이 벅차오른다기보다는 언제 내려갈지 모르니 설레발 떨지 말자는 마음이 지배적이다. 일종의 학습된 무기력이라고나 할까.
팀 성적이 바닥을 벅벅 기어 다니다가 갑자기 1위가 되어보니(안다, 아직 정규 시즌 안 끝났다)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행복한 야구팬은 세상에 없다. 나는 KT가 독보적인 10위를 할 때도, 2위와 어느 정도 게임 차를 벌어둔 채 1위를 유지할 때에도, 야구를 보면 늘 약이 오르고 화가 났다. 야구는 지나치게 섬세한 스포츠다. 1위 팀도 시즌이 끝나고 보면 승률이 6할 정도다. 10위 팀의 승률은 3~4할 정도 된다. 3경기를 하면 아무리 잘해도 1번은 지고, 아무리 못해도 1번은 이긴다는 의미다. 야구는 월요일만 빼고 매일 경기가 있다. 즉, 1위 팀 팬이라도 매일 야구를 챙겨본다면 최소 일주일에 2번은 화가 난다.
그럼 이기는 날에는 화가 나지 않을까? 아니다. 이기는 날에도 화가 난다. 야구팬을 화나게 하는 플레이는 여기에 다 나열하지 못할 만큼 많다. 간략한 예만 들어봐도 이 정도다.
투수를 볼 때
- 왜 볼질이야? (스트라이크 존에 공을 꽂아 넣지 못함)
- 저걸 미련하게 가운데 꽂네 (스트라이크 존 한복판에 공을 꽂아 넣다가 안타를 맞음)
타자를 볼 때
- 저걸 휘두르네? (유인구에 속아서 헛스윙)
- 저걸 놓치네? 뭐 칠래 (치기 좋은 공을 치지 못함)
야수를 볼 때
- 야아아악! (수비 실책을 저지름)
- 아 그냥 안전하게 잡지 (택도 없는 허슬 플레이)
심판을 볼 때
- 아니 볼이잖아 (내가 보기엔 볼인데 스트라이크 판정)
- 뭐라는 거야 완전 들어왔구만 (내가 보기엔 스트라이크인데 볼 판정)
- 저건 아웃이지 (아웃인데 세잎 판정)
- 이걸 세잎을 줘? (위와 같으나 상대 팀 공격 상황)
서술한 상황은 승패와 상관없이 모든 게임에서 일어난다. 야구는 공 1개로 1점이 날 수도 있고, 공 10개로 아웃 하나 못 잡을 수도 있다. 이런 게임 규칙 탓에 모든 야구팬은 광적으로 일희일비를 한다. 시즌 내내 잘 던지던 우리 팀 에이스가 오늘따라 던지는 족족 공이 맞아나가면 그렇게 열불이 날 수가 없다. 리그에서 타율이 가장 높은 우리 팀 간판타자가 승부처에서 병살타를 쳐 이닝을 끝내면 욕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다. '하루쯤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은 경기가 끝난 다음에 가능하다. 실시간으로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는 상황에서는 플레이 하나하나, 공 하나하나에 죽고 못 산다. 하나같이 예민보스가 되어 공과 배트의 움직임에 휘둘린다.
그래서 야구를 보면 물리적으로 가슴이 뜨거워지곤 한다. 열정이나 투지로 불타는 게 아니라 명치 부근이 화로 불타고 있음을 생생하게 느낀다. 흔히 화병이라고 부르는 증상이다. 이깟 공놀이, 이것도 프로 리그라고, 저것도 프로 선수라고 등등 야구를 보는 내내 땔감은 계속해서 생겨난다. 이때 명치의 온도를 낮추기 위해 시급히 투여하면 좋은 술이 맥주다. 야구는 짧으면 2시간 반, 길면 4시간이 넘게 경기를 한다. 소주를 마시면서 보기에는 경기 시간이 너무 길다. 화가 날 때마다 소주를 마셨다가는 경기를 끝까지 보기 어렵다. 화를 내리기에 한 잔의 양이 적다는 단점도 있다.
반면 맥주는 화병 난 야구팬을 위한 음료라고 해도 무방하다. 시원한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켤 때, 그 순간만큼은 명치가 시원해짐을 느낀다. 일부러 맥주 캔을 바닥에 탁 소리가 나게 던지듯 내려놓는 행위도 분노 해소에 도움을 준다. 물론 야구를 볼 때마다 맥주를 마시지는 않는다. 맥주를 마실 때마다 야구를 보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야구를 보면서 한창 약이 오르는데 냉장고에 마침 맥주가 있을 때면 늘 맥주를 꺼내 마신다. 그러니까 없는 맥주는 참을 수 있지만 있는 맥주는 못 참게 만드는 정도로 보는 사람 약을 올리는 스포츠인 것이다, 야구는.
올해 SK 와이번스가 SSG 랜더스가 되면서 야구팬들이 한바탕 웅성웅성거린 적이 있다. 워낙 의외의 사건이기도 하고, MLB 커리어가 좋은 추신수 선수를 영입하면서 더욱 화제가 되었다. SNS를 활발하게 하는 구단주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기사화되었고, 시즌 초반 SSG 랜더스의 성적도 나쁘지 않아서 기대를 모았다. 그러던 중 진심인지 농담인지 모를 구단주 맥주 출시 소식을 듣고 내심 기대했다. 이마트는 워낙 PB 상품 잘 만들기로 유명하고, 구단주는 야구팬이니 야구를 보는 자들에게 어떤 맥주가 필요한지 잘 알지 않을까? 야구를 볼 때는 향기롭고 맛이 풍부한 맥주가 필요 없다.
소문을 들은 후 한참이 지나서야 맥주가 출시됐고, 우연히 이마트 24에서 마주쳤다. SSG 랜더스 라거, 슈퍼스타즈 페일 에일, 최신맥주 골든 에일. 3종이나 내주다니 이렇게 고마울 데가 있나. 에일보다 라거 취향인 나는 랜더스 라거를 마시고 무릎을 쳤다. 역시 SSG 랜더스 구단주는 야잘알이야. 랜더스 라거는 어느 하나 튀는 부분 없이 무난하고 청량한 맛의 라거다. 흔히 마시는 카스나 하이트, 테라보다는 '맛'이라는 게 훨씬 많이 존재하지만 마구 들이키기 좋은 딱 그런 맥주다. 향이나 도수가 강하거나 쓴맛이 있는 맥주는 두세 모금 마시고 나면 목구멍에서 주저하는 느낌이 든다(보통 에일류가 그렇다). 반면 랜더스 라거는 탄산의 쓰라림을 식도가 견뎌주는 선에서 몇 모금이고 밀어 넣을 수 있을 것 같은 맛이다.
사실 2020 도쿄 올림픽 이후로 야구를 잘 보지 않게 됐다. 좋아하는 마음만큼 실망하는 마음도 큰 법이다. 몇 년 야구를 보면서 한국 프로야구의 경기력이 의문스러웠는데, 국제 대회에서 의문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야구를 보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보이콧이라거나 하는 거창한 뜻은 없다. 잘하길 바라고 이기길 응원하는 마음조차 아깝게 느껴질 정도로 실망한 탓에 다시 애정을 모으는 중일뿐. 야구를 끊기에는 그라운드 안에서 일어나는 드라마를 너무 많이 지켜봤다. 성장하는 선수를 기다리는 재미, 팀이 실력을 키워가는 즐거움도 알아버렸다.
풀어줄 이도 없는 서운함이건만 오늘도 중계를 켜지 않고 힐끗힐끗 스코어만 훔쳐본다. 지고 있으면 핸드폰을 던져버리고 이기고 있으면 가만히 내려놓는다. 이처럼 야구팬다운 마인드와 행동은 꾸준히 유지하는 중이다. 이렇게 열 받는 스포츠가 있냐고 한참을 툴툴거렸어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나는 속상함을 떨쳐내고 다시 야구 중계를 보며 맥주 마실 날을 기다린다. 정신건강에 해롭다고 끊기에 야구는 너무 재미있고, 신체건강에 해롭다고 끊기에 맥주는 너무 맛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