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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뷰하는리타 Aug 31. 2021

너네가 마시는 그 술 뭐야 : 캄파리

캄파리를 마셔야 끝이 나는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

익숙한 작가의 작품에 등장한 낯선 술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는 나에게 숱하게 푸시를 보낸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보낸다. 대부분 쓱 보고 옆으로 날려버리지만 수신거부 설정은 안 한다. 따로 알아보기는 귀찮은 신간 정보를 얻기 유용해서다.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도 알라딘 푸시를 받고 들어가 봤다가 구매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이름이 익숙해서 한 번쯤 읽어봐야지 생각하던 작가였다.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은 뒤라스의 작품 중에서 비교적 스토리가 뚜렷해 읽기 쉽고, 프랑스판 부부의 세계라고 소개되어 있었다(정작 부부의 세계는 안 봤다). 책의 만듦새도 예뻤다. 묵히지 않고 후다닥 읽었지만, 결과적으로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을 읽고 감동이나 울림을 느끼진 않았다. 왜 프랑스판 부부의 세계라고 했는지 약간은 이해되는 내용이었다. 부부라는 이상한 관계,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합리화, 한 인간으로서의 자연스러운 욕망. 뭐 그런 것들이 담겨 있었다.


나는 프랑스 여성 작가들이 그리는 나른하고 몽롱하면서도 내면에 사랑의 열정이 있는, 특유의 분위기를 가진 여성 캐릭터에 공감을 못한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나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의 <여명>이 그랬고,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도 어딘가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행동은 하지만 말은 쉽게 꺼내지 않는 주인공이라든가, 심상이 가득한 표현이 너무 개인적으로 느껴진다든가. 하지만 앞의 두 책과는 달리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은 읽은 후 한 가지 아이템을 남겼다. 그게 캄파리다.


도대체 무슨 맛인데!


캄파리는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에서 체감으로 이백 번쯤 등장하는 술이다. 캄파리를 마시자는 제안, 캄파리를 마시겠다는 선언, 캄파리가 좋거나 싫다는 등장인물의 평가까지. 아페리티프(식전주)라는 건 알겠는데 왜 등장인물들은 두 잔, 세 잔씩 마셔야만 직성이 풀리는 걸까? 시간적 배경인 여름휴가, 공간적 배경인 바닷가와 잘 어울리는 술이라서? 아니면 나른하고 몽롱한 분위기와 캄파리의 색이 딱이라서? 읽는 내내 인물 간의 아슬아슬한 감정 교류보다 더 흥미로운 건 캄파리의 맛이었다.


"캄파리 한 잔 더 하고 싶어요, 당신은요?"
"열 잔, 난 열 잔이라도 함께 마시고 싶어요."
그는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물었다.

"그 다음은?"


이런 장면의 극적인 분위기를 상상할 때 두 사람 앞에 놓인 붉은 술의 존재감은 상당하다. 덥고 습한 여름, 유부녀인 여자와 젊은 남자, 술을 마신 두 사람의 얼굴, 굳이 본인은 안 좋아하는 술을 열 잔이라도 더 함께 마시겠다는 남자, 가까워지는 두 사람의 거리, 앞에 놓인 붉디붉은 술, 술잔에 남은 끈적한 입술자국 같은 걸 상상해보자. 이 분위기의 화룡점정인 캄파리의 맛이 점점 더 궁금해진다.


찾아보니 캄파리는 약용 리큐르인 비터스Bitters를 개량해 만든 술이었다. 그래서 각종 허브며 약재, 식물 뿌리 등이 들어가 있다. 같은 기원에서 탄생한 술로 예거마이스터가 있는데, 나는 예거마이스터의 맛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예거마이스터라니, 예거라니! 그렇다면 색이 달라도 맛은 비슷하지 않을까? 약초 맛 술은 별로야, 약초 맛이 좋으면 백초를 먹었지. 얼마 후 대형 마트에 갔다가 작은 용량의 캄파리를 발견했지만 예거마이스터 맛이 겹쳐져 다음 기회로 미뤘다.


걔네가 마시던 그 술의 정체


다음 기회는 책을 읽고 8개월이 지난 후에 갑자기 찾아왔다. 1차로 오징어회에 소주를 마신 7월의 주말, 오랜만에 2차로 바에 갔다. 처음에는 바를 평화롭게 거닐고 다니는 고양이에 시선을 빼앗겨 발견하지 못했다. 두 번째 잔을 주문하려고 메뉴판을 자세히 보니 캄파리가 들어가는 술이 있었다. 네그로니라는 칵테일인데, 베이스로는 진을 활용한다. 진은 별로지만 어차피 캄파리는 리큐르라서 뭐라도 섞어 마시게 될 확률이 높다. 오늘이 그날이다, 도전!


캄파리를 궁금해하는 이유를 들은 바텐더 님은 호기심 많은 고객을 위해 캄파리 원액을 몇 방울 챙겨 주셨다. 그렇게 수개월 묵은 궁금증을 해결하는 순간, 바로 후회했다. 이런 맛인 줄 알았으면 진작 먹을 걸. 분명 특유의 허브향과 쓴 맛이 강한 리큐르지만 단 맛과 끈적한 질감, 화려한 향 역시 엄청난 존재감을 뿜어냈다. 그래서 원액보다 칵테일로 먹었을 때 더 맛있다. 예거마이스터에 비해 과일의 존재감이 훨씬 뚜렷하게 느껴지는 섬세한 맛이다. 


나중에 살펴보니 캄파리는 오렌지 주스와도 섞어 마시고, 탄산수나 토닉워터와도 흔하게 섞어 마신다고 한다. 그냥 '캄파리'나 '캄파리 비터'라고 칭하는 것으로 보아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에서는 스트레이트로 마신 게 아닐까 싶다. 캄파리 원액을 먹는 건 매실청이나 오미자청의 원액을 마시는 느낌과 비슷하다. 끈적하면서 갖은 식물의 응축된 맛과 향을 들이켜는 느낌. 캄파리는 쓴맛의 지분이 꽤 크다는 차이가 있다. 


술잔에 담긴 캄파리의 색을 보고, 맛을 보고, 향을 맡은 후 비로소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을 다 읽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뒤죽박죽 얽힌 시선들이 부딪힐 때마다 집요하게 등장하던 이 술. 그래,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다 계획이 있었구나. 60여 가지의 원재료가 섞여 온갖 복잡한 맛과 향을 내는 술. 설탕의 강한 단맛과 약초의 강한 쓴맛이 공존하는 술. 강렬한 붉은빛을 내는 술. 누군가는 하루 종일 입에 달고 살지만 누군가는 역겨운 맛이라고 말하는 술. 캄파리에는 <타키니아의 모든 말들> 속 온갖 감정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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