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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량음료 Apr 03. 2023

6호 시설과 더 글로리

오래간만에 늦게 퇴근하는 남편을 기다리던 어느 늦은 밤, 유튜브의 알고리즘이 나를 한 영상으로 이끌었다. 하이머스타드himustard라는 채널의 ‘교대 졸업 후 망가진 아이들을 선택한 별난 선생님의 브이로그’라는 영상이었다. 썸네일에는 연예인 뺨치게 예쁘게 생긴 젊은 여선생님의 얼굴이 보였다.


영상의 배경은 포천에 있는 사단법인 ‘세품아(세상을 품는 아이들)’,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 중 소년원으로 가야 할 만큼 중한 범죄는 아니지만 교화가 필요하긴 한데 이 아이를 돌봐줄 어른이 전혀 없는 경우, 판사가 6호 처분을 내리면 아이가 최소 6개월 동안 세상과 단절되어 몸과 마음과 정신을 회복시키러 가는 기숙학교 같은 곳이다.


아주 어여쁜 그 여선생님의 하루 일상을 브이로그 형식으로 찍은 20분짜리 영상으로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선생님은 작년에 결혼한 새댁이지만 이 일을 위해 주말 부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 교대 출신으로 얼마든지 교육공무원이 될 수 있었겠으나, 대학시절 봉사활동으로 만난 아이들이 눈에 밟혀 부모님의 반대를 뿌리치고 다시 세품아 학교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했다.


그녀는 하루 세끼를 아이들과 함께 먹으며 거친 남학생들과 울고 웃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아이들 검정고시 준비를 챙기고, 다시 세상으로 나가야 하는 아이의 마음을 챙기고, 한 번도 소중한 가치에 대해 가르침을 받아보지 못한 아이들에게 그것을 가르치고.. 6개월의 입소 기간이 지나 이제 세상으로 다시 나가는 한 아이는 그랬다. 자신을 세품아에 머물도록 판결을 내려준 판사님께 감사하다고. 그리고 이곳에서는 잡아주는 어른들이 있어서 괜찮았지만 다시 세상으로 나가면 자신을 제어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고. (그의 아버지는 매일 술을 과하게 한 후 아이에게 폭력을 휘둘렀던 듯하다) 그 얘기를 들은 예쁜 선생님은 이렇게 말한다. 00야,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선생님들에게 와도 돼. 너희들을 도와주는 그 일을 하기 위해 선생님들은 여기 있는 거야.




이것저것 벌여놓은 일이 많아 매우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는 요즘, 그 와중에 너무나 핫했던 드라마 ‘더 글로리’를 보게 되었다. 잔인한 학교 폭력 이야기라 하여 내 마음도 함께 상처입을 것 같아 그간 시청을 피해왔다. 그런데 우연히 보게 된 인스타의 드라마 짤들이 재미있어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퇴근하는 남편을 기다려 밤마다 드라마 시청에 함께 빠져 들었다. 이럴 군번이 아닌데 이러고 있다고 한탄해도 그뿐, 역시 필력 좋기로 소문난 김은숙 작가 작품이라 그런지 한번 보면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시청 전 ‘우리 오늘은 꼭 한 편만 보고 끄자’라고 아무리 다짐해도, 한 회가 어찌나 빨리 끝나던지 틀자마자 끝나는 것 같은 느낌에 ‘하나만 딱 하나만 더’를 외치다 보면 어느새 12시가 훌쩍 넘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아쉽게 리모컨의 오프 버튼을 누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즌 1과 2를 단숨에, 단 며칠 만에 다 보아 버렸다.


저 나쁜 연놈들을 어떻게 죽여놔야 하나 분통을 터트리면서도 가장 맘 아팠던 것은 주인공 동은이 옆에 단 한 명의 멀쩡한 어른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좋은 어른도 아니고 그냥 일반 어른, 정신이 바로 박힌 어른이 그녀의 옆에 단 한 명도 없었기에 소중한 18년의 인생을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모든 복수가 끝난 후 동은이 세명빌라의 주인 할머니에게 편지를 보낸다.

누가 됐든 뭐가 됐든 날 좀 누가 도와줬다면 어땠을까. 그렇게 열여덟 번의 봄이 지났고 이제야 깨닫습니다.
저에게도 좋은 어른이 계셨다는 걸.
친구도, 날씨도, 신의 개입도요.


아마도 동은이 말하는 좋은 어른이란, 어느 차가운 겨울날 강가에 죽으러 간 고등학생 동은이가, 아들을 하루아침에 잃고 죽으러 온 세명빌라 주인 할머니를 구한 후 원망하자, 날씨가 너무 추우니 그날 추운 겨울 말고 따뜻한 봄에 죽자며 함께 울어 주었던 할머니와 학교폭력을 당하는 동은을 도우려 했던 고등학교 양호 선생님을 말하며, 친구란 공장 복도의 어두운 불빛을 의지해 입시 공부를 하는 동은을 배려해 까치발로 걸어 다녔던 공장 후배를 말하며, 날씨란 추워서 핑계짐에 죽기를 미뤘던, 그 추운 겨울 날씨를 말함이며, 신의 개입이란 동은이 못 견디게 힘들 때마다 잠을 재워준 죽은 친구 소희의 영혼을 말함이 아닐까 한다.


드라마라 저렇게 아름답게 편지글로 적어놓아서 감동적이지, 만약 진짜 나를 살린 게 겨우 실낱 같은 저런 인연들 뿐이라면 얼마나 끔찍한지.




내가 6호 시설에 관심이 생겼다는 것을 알아버린 유튜브 알고리즘은 관련 동영상을 몇 개 더 보내어주었다. 그 유튜브 영상들을 보며 세품아와 같은 6호 시설이 전국에 몇 군데 더 있다는 것과, 내가 예쁜 선생님의 하루 일상 브이로그를 통해 알게 된 것은 극히 일부분 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상상한 건, 언제든 교화될 준비가 되어있으나 기회를 얻지 못했을 뿐인 청소년들이 좋은 선생님들과 봉사자들을 만나 빠른 시간 내에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6개월의 보호시설 생활을 즐겁게 잘하다가, 때가 되었을 때 아쉽지만 희망찬 마음으로 다시 세상에 나아가서 사회의 건실한 일원으로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장밋빛 이야기였다. 그런데 아쉽게도 늘 그렇듯, 현실은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여러 문제들이 있지만 한 가지만 꼽자면, 수요는 넘쳐나는데 공급이 모자란 법칙이 여기에서도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를 일으킨 청소년 중에서는 정신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아이들도 많이 있는데, 이런 아이들을 수용할 전문 병원 시설이 전국에 한 군데밖에 없어 자리가 너무 부족하고, 정신 치료를 함께 받아야 할 아이들이 6호 시설로 들어가는 바람에 적절한 관리를 받지 못하여 그곳에서도 폭력과 같은 문제를 많이 일으킨다는 것이었다.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보면서 사실은 그리 크지 못한 나의 마음 그릇이 더욱 쪼그라듬을 느꼈다.


예쁜 선생님의 브이로그 영상을 본 직후에 내 상상 속의 나는 이미 폐교를 구입했다. 그곳을 예쁘게 리모델링하여 갈 곳 없는 청소년들을 불러 모아 그들을 따뜻하게 돌보고 있었다. 가끔 힘든 일도 있었겠지만 나의 선한 마음을 꺾을 정도는 아니어서 가뿐히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나의 수고를 먹은 청소년들은 과거를 딛고 멋지게 세상에 나아갔다… 그런 나의 미래를 꿈꾸었다. 한번 꽂히면 끝 간데없이 맹랑한 상상력을 펼치는 나답게.


그런데 현실적인 영상들을 보다 보니 나의 장밋빛 상상에 금이 간 것이다. 내가 과연 내 눈앞에서 싸움박질을 하는 덩치 큰 청소년들을 감당하고 선도할 수 있을까. 편견 없이 저들을 대하며 그들이 저지른 죄를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을까. 어쩌면 저들의 괴롭힘으로 심하게 상처받았을 누군가를 생각하며 나도 피해자처럼 저 아이들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쏟아부을 진심과 성의와 희생과 사랑에 비해 그 모든 것이 상대방을 전혀 변화시키는 것 같지 않을 뿐 아니라 돌아오는 것이 오히려 불신과 적대뿐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

사실 이는 나중에 어떤 방식으로든 어려운 이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이 착한 마음을 가로막는 생각이기도 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배은망덕(?)한 이들에게까지 사랑을 베풀 만한 마음그릇을 가지기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폐교를 사들여 예쁘게 고치는 일은 나에게서 멀어지는 듯했다. 이렇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니.




어느덧 아쉽게도 더 글로리 마지막 회를 보는 날이 왔다. 패륜아 5인방은 모두 벌을 받거나 죽었는데, 그 폐허 위에 승리를 거두고 홀로 서 있는 동은이가 말할 수 없이 가여웠다. 너무 불쌍하여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래, 폐교 개조는 못하더라도 동은이 같은 처지의 아이들은 만들지 말자. 자살 시도에서 구해준 어른, 끝까지 도와주지 못하고 포기한 양호 선생님, 18년 동안 따라다닌 소희의 영혼 정도를 은인으로 생각해야만 하는 그런 가여운 아이들은 없게 하자. 좋은 어른까지는 못되더라도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 옆에 있는 일반 어른쯤은 되자. 다시 소심하게 결심했다.


일상을 살다 보면 이 결심이 희미해질 가능성이 클 것이다. 남편의 장담대로 폐교를 살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울 것이며, 동은이 같이 외롭고 힘든 아이들을 바로 옆에서 도와줄 수 있는 가능성은 글쎄, 얼마나 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착한 마음을 가지는 걸 포기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유지하기도 힘든 결심을 실행까지 해내신 착한 선생님들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6호 시설의 청소년들이 건실하게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게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선생님들의 노고가 그 아이들에게도 전해지길, 그래서 변화되길, 그 변화들이 착한 선생님들의 헌신을 이어갈 수 있는 동인이 되길, 언젠가는 나도 어떤 방식으로든 그 노고에 작은 보탬이 될 수 있게 되길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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