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량음료 Jan 22. 2024

언어를 잘 안다는 것

친애하는 나그만

지난 토요일, 3주간의 크리스마스 방학을 마치고 한국학교로 다시 출근을 했다. 내 책상 위를 보니 분명히 마지막으로 퇴근할 때는 없었던 초콜릿 상자와 하얀 편지 봉투가 있다.

‘최미선께’

옆 선생님에게 묻는다.  

선생님, 이 어색한 ‘최미선께’는 뭘까요?"

“아, 그거 나그만이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준거예요. 그걸 이제야 본 거예요?”


12월 23일 작년 마지막 출근날, 한국행 비행기를 타야 했기 때문에 양해를 구하고 평소보다 두 시간 일찍 퇴근을 했다. 그런데 내가 퇴근한 후  나그만이 미리 준비한 선물과 편지를 내 책상에 올려놓은 모양이었다.




나그만은 우리 학교에 실습하러 온 대학생이다. 아랍계 독일인 남학생이고 20살 즈음이라 했다. 평일에는 김나지움에서 한국어를 가르치시는 교장 선생님의 옛 제자이고, 그 인연으로 이곳에서 실습까지 하게 되었다고 했다.  

사실 좋게 표현해서 실습이지, 황금 같은 토요일 오전 개인 시간을 내어 선생님들의 업무를 돕고, 학교의 잡일을 한다. 정해진 시간 외에도 유치부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의 수업을 돕기도 한다. 이 모든 일을 매주 무급으로 한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취미 삼아 잠시 배웠던 한국어가 꽤 마음에 들었나 보다. 한국에 대해 지대한 관심이 있고 나중에 한국에서 공부도 해 보고 싶어 한다고 했다. 학창 시절에 공부도 잘했는지, 괴테 대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만 갈 수 있다는 학과에(어느 과인지 들었는데 정확히 기억이 안 난다) 재학 중이라고 했다.

그가 참 신기했다. 왜 한국이 좋은지, 어떤 면에서 관심이 많이 가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몇 주 전 나그만이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선생님, 잠깐 시간 있어요?”

다가가보니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나에게 올바로 전달하고자 깨알같이 적어놓은 한국어 문장들이 책상 위 종이에 빼곡하다. 고등학교 시절에 잠시 한국어를 배웠을 뿐이었기에 당연히 그의 한국어 실력은 초급 수준이다. 간단한 업무 도움 요청을 하기 위해 꽤 오랜 시간 끙끙대며, 사전을 찾아가며, 머릿속으로 독일어를 한국어로 옮기기 위해 애썼을 그가 그려졌다.

안타깝게도 내가 그의 한국어를 온전히 알아듣지 못해 구글 영어 사전까지 동원되어야 했지만, 어쨌든 어색한 한국말로 가득했던 그의 종이가 매우 인상 깊었다.


나그만이 교무실에 머무는 오전 시간에 나는 수업에 들어가야 하니 실질적으로 얼굴을 맞대는 시간이 적고, 만난다 하더라도 어색한 미소를 띠며 인사하고,  ‘잘 지냈어요?’ 따위의 짧은 안부만 주고받긴 하지만, 나에게 그는 참 괜찮은 사람으로 비추어졌다. 때로는 학교의 정식 직원들보다 더 성실하게 일하는 듯한 모습을 보며, 사람 됨됨이가 정말 좋구나, 부모님이 아들을 잘 키우셨네 생각했더랬다.


그런 그가 잊지 않고 나를 챙겨준 것이다.  그의 편지를 읽고 얼마나 놀라고 감동적이었는지 모른다.  20살짜리 외국인 남자가 쓴 편지라고는 믿기지 않게 길고, 다정하고, 진심 어린 글이었다(남자아이들을 키우는 나는, 남자아이가 글을 길고 감성적이게 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다). 작년 연말 그로부터 이미 선물과 편지를 받은 교무실 선생님들과 함께 왁자지껄 나그만 칭찬을 잠시 꽃 피웠다.


패셔너블과 진심으로에서 너무나 웃었다




한때 러시아어 동시통역사를 꿈꾼 적이 있다. 허황되었던 꿈으로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어렸을 때는 최고의 동시통역사가 되기 위해서는 러시아인들이 쓰는 모든 단어와 표현들을 마스터하면 될 줄 알았다.


세월이 많이 지나고 나니 깨닫게 된다. 유려하고 고급진 표현을 몰라도, 말이 조금 어눌하고 적합한 단어를 선별하여 쓰지 못해도, 말하는 사람의 내면에 잘 배운 다정함과 예의와 상대를 향한 관심 등 귀한 것들로 채워져 있다면,  모든 언어적 한계를 뛰어넘어 그 마음이 상대방에게 전해진다는 사실을 말이다. 내 마음을 표현하는데 언어적인 실력은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선생님도 잘 지내셨어요?”라는 어눌하고 짧은 한국어 뒤에 진하게 배어져 나오는 진심이 느껴진다면, 발음이 좀 어색한들 아무렴 어떤가.


나그만에게 답장을 써야겠다. 이슬람 전통에서 자란 그가 꺼려하지 않을 만한 한국 과자도 선물로 준비해야겠다.

안녕하세요, 나그만.

지난 연말에 나그만이 저에게 준 선물과 편지를 이제야 발견했네요.
감사 인사가 늦었습니다.
나그만의 편지와 선물 덕분에 큰 감동을 받았고, 그날 하루종일 기분이 좋았답니다.

언제나 성실하게, 열심히 일하는 나그만의 모습이 참 보기 좋아요.  나그만은 이미  훌륭한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네요. 그래서 앞으로도 나그만에게 주어진 현재와 미래를 멋지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나그만이 바라는 모든 좋은 일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어요.
2024년 한 해도 행복하고 건강하세요.

최미선 드림





매거진의 이전글 사춘기 일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