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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량음료 Feb 01. 2024

백 년 동안의 고독

고독 속에 자신을 내버려 둔 죄

몇 년 전, ‘백 년 동안의 고독’의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작품을 읽은 적이 있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 그것이다. 읽는데 시간이 매우 오래 걸린 그 책을 완독 한 후 며칠 뒤, 갑자기 남자 주인공에 대한 지독한 미움이 뒤늦게 내 마음에 밀려와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강렬하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의 저자가 ‘콜레라 시대의 사랑’ 저자와 동일인이라는 걸 알지 못하다가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후, 잠시 이 책을 읽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했다. 그만큼 ‘콜레라 시대의 사랑’에 대한 찝찝함(?)이 내 맘에 남아 있었나 보다. 짧은 고민을 뒤로한 채 이 책을 다 읽은 지금, 충격과 찝찝함으로 내 마음이 또다시 묘하다. 읽으면서도 내가 지금 무엇을 읽고 있나 내 눈이 의심되었는데,  아무래도 남미 문학(마르케스는 콜럼비아인)을 거의 접해보지 못한 나로서는, 그들의 세계관이 익숙하지 않아서 읽는 작품마다 이상한 기분이 드나 생각해 보기도 했다.




이 작품은 100년 동안  7대에 걸친 부엔디아 가문의 이야기이다. 내가 이 책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계속 손가락을 끼운 채 놓지 못하고 있었던 페이지가 바로 이 집안의 가계도이다. 이 가문 사람들의 이름이 서로 너무나 비슷하고, 반복해 사용되는 바람에 헷갈리기 때문이다.


부엔디아 가문의 남성에게는 호세, 아르카디오, 아우렐리아노 이 세 이름이 따로 또 같이 주어지며, 여성들에게는 우르슬라, 레메디오스, 아마란타라는 이름이 따로 또 같이 전해내려 진다.


예를 들어 호세 아르카디오, (그냥) 아르카디오, 아우렐리아노 호세, 아우렐리아노 세군도 등 세 이름 중 하나만 차용되거나, 두 개가 차용되거나, 저 이름에 다른 이름이 덧붙여지는 식이고, 2대째에 아우렐리아노가 있었다면 6대에 또 다른 아우렐리아노가 있는 식이다.


여성도 마찬가지이다. (그냥) 우르슬라, 우르슬라 아마란타, 레메디오스, 미녀 레메디오스, 그리고 레메.. 이 지경이니 가계도에 손가락을 끼운 채 계속해서 가계도를 참고하여 이야기를 따라가지 않으면 길을 잃기 십상이다.


끝까지 내 손가락이 끼워져 있던 페이지


그런데 이렇게 이름이 헷갈리게 계속해서 반복하여 사용한 것은, 독자들을 헷갈리게 하기 위한 작가의 의도가 있다고 하며, 헷갈리는 게 당연하다고 한다.  작가가 이렇게 같은 이름을 계속 반복하여 사용한 이유는 부엔디아 집안의 운명이 서로 비슷하며, 그들의 운명이 수레바퀴를 돌 듯 순환적으로 대물림되어감을 표현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아르카디오란 이름을 가진 사람들끼리, 아우렐리아노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끼리, 레메디오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끼리 비슷한 성향과 숙명을 가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부엔디아 가문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유전병이 있다. 바로 고독 속에 침잠하는 병이다.

첫 번째 세대주인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는 괜찮은 남자였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 마을을 세우고 마을 사람들이 질서 있게 생활할 수 있도록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할 줄 아는 사나이였다. 그러나 집시 무리들을 만나 새로운 문물을 접하자 그만 그 신문물에 빠져버린 나머지, 반미치광이처럼 되어 기구들을 사들이고, 연금술사 노릇을 한다며 자신만의 실험실에 박혀버린다. 아내와 아이들의 고생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금을 만들어 내리라는 꿈이 좌절된 후 결국 스스로 고독과 고립을 선택한 그는 오랫동안 나무에 묶여 살다가 비참하게 생을 마친다.


호세 아르카디오의 그런 히키코모리적인 성향은 그의 아들 아우렐리아노 대령에게,  딸 아마란타에게, 양딸 레베카에게, 그리고 6대손 아우렐리아노에게 극대화되어 나타난다.  이들은 각각 혁명의 실패, 사랑의 실패, 꿈의 실패를 경험했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를 세상 속으로 단절시키며 고독 속에 침잠하여 ‘삶 속의 죽음’을 구현한다.


사실 이 가문의 비극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가문의 아담과 이브 격인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와 우르슬라 이구아란은 사촌지간, 즉 근친상간의 관계였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잘못 끼워진 단추가 끝까지 옷매무새를 흐트러트리듯, 그들의 자손 또한 근친상간, 즉 잘못된 성관념이라는 유전병에서 자유롭지 못한 모습을 보인다. 욕정에 휩싸여 사촌 누이와 관계를 맺고, 한 여자를 두고 두 형제가 번갈아 자손을 남기며, 9살짜리 어린 여자아이에게 반해 결혼을 하고, 17명의 배다른 자식을 낳고, 고모와 조카가 불장난에 빠져들고, 종국엔 이모와 조카가 맺어져 돼지꼬리가 달린 자녀를 낳는다.


이  소설의 마지막은 6대손 아우렐리아노가 100년간 전해 내려오던 마법사의 양피지 문서를 해석하는 장면이다. 그 양피지 문서에는 부엔디아 가문의 역사, 시작과 종말을 예언하고 있다. 한때 지상 낙원이었던 마콘도가 몰락과 쇠락을 거듭하다 어느 날 갑자기 불어닥친 거대한 회오리바람에 휩싸여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있는 한가운데에서 아우렐리아노가 문득 해석하게 된 그 문서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역사의 시초는 나무와 연결되어 있고, 종말은 개미들에게 먹힐지니라.’


가문의 시초였던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는 고독에 침잠하다가 미치광이가 되어 나무에 묶여 생을 마쳤다.  6대손 아우렐리아노와 그의 이모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돼지꼬리가 달린 기형으로 태어난 데다, 아이의 어머니가 아기를 낳다 극심한 하혈로 세상을 떠나자 슬픔에 잠긴 나머지 아버지가 아기를 돌보지 않은 사이에 집안 전체에 득시글거리던 개미 떼에 물려 아기가 죽음으로써 저주는 완벽히 실현된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이 비극은 결국 고립과 고독을 자처한 결과이다. 유전자마저도 자폐적으로 순환시켜 결국 돼지꼬리가 달린 아이가 태어나고, 그 아이마저 개미에게 물려 죽어 가문이 멸망하는 비극으로 치달은 것이다.




마르케스가 이 독특한 소설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워낙 읽기 어려운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 잠시 해 본 구글링에 따르면, 마르케스는 ‘백 년 동안의 고독’에 남미대륙의 운명을 담아내고자 했다고 한다. 평화롭던 마을에 현대 문명이 들어와서 야기된 혼란, 바나나 농장으로 대표되는 노동자 착취 문제, 노동자들의 시위를 무자비하게 탄압하여 3000명이나 숨지게 만들고도 감쪽같이 언론을 통제하여 국민들을 속이던 정부.. 어느 나라 건 힘없고 연약한 민초들에게 벌어졌던 외부적인 폭력은 콜롬비아 역사에서도 자행되었던 모양이다. 사실 머나먼 남미대륙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네 인생 또한 끊임없는 외부적인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꼭 국가적인 폭력이 아니더라도 우리 삶의 안정과 번영을 방해하는 많은 요인들은 당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폭력으로 느껴지니.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수많은 폭력으로부터 살아남는 것과 다르지 않다. 개개인의 운에 따라 폭력의 강도가 더 강하거나 상대적으로 덜할 뿐, 우리 마음을 상처 입히는 일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이 문제에 대해 ‘백 년 동안의 고독’에서 엿볼 수 있는 해답은, 외부적인 공간이든 내면적인 공간이든 안으로만 파고들면 결국 망하게 되며, 삶이 우리를 속일수록 더욱 바깥으로 뛰쳐나가 새로운 사람들과 유대하고, 나의 공간 안에 새로운 피를 수혈하며,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힘을 합쳐 나의 고독과 우울을 이겨내는 것일 테다.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실패할 수 있고, 좌절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신을 외부 세상으로부터 가두는 순간 마법사 멜키아데스의 양피지에 적힌 부엔디아 가문의 운명이 나에게도 적용될지 모른다.


‘100년 동안의 고독에 시달린 종족은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날 수 없다’는.


제각각 달라 보이는 인간의 운명이지만, 삶의 고비마다 비슷한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운명은 부엔디아 가문의 사람들처럼 비슷한 숙명을 지닐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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