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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천사람 Mar 12. 2024

신발,어차피 내 몸에 하루 하나.

함께 늙어가는 신발, 그리고 비움에 관하여.

자타공인 신발 매니아.

신발을 모으다 가장 좋아하는 브랜드에 입사까지 한 사람.


모두 저를 설명하는 말들입니다.

그만큼 신발에 굉장히 진심이고,

뉴발란스 신발로만 신발장에 100족을 채울 정도로

주변 사람들 모두가 아는 신발 매니아입니다.


뭐가 그리 좋아서 회색 신발을 모았을까요.


학창 시절의 로망, 이루고 싶은 꿈

모든 것들이 투영되어 있고

신발은 그 시대의 시대상과 기술력을 담아내기에

유독 신발에서 큰 매력을 느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모으다 보니 회의감이 들기도 하고,

이제는 그 단계를 넘어 "꼭 필요한 것만"

남기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자, 초장에 문제.

얼핏 보기에 똑같아 보이는 회색 신발.

디테일 차이는 있지만,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을까요?


모을 당시에는 몰랐지만

결혼을 하고 30대에 접어 드니

조금 더 실용적이고 현명한 소비에 눈 뜨게 됩니다.


용도와 상황.

TPO에 맞출 수 있는 신발 1족만 남기면

얼추 그 상황들은 그 1족으로 커버가 된다는 걸 경험합니다.

갈수록 늘어가는 결혼식에

항상 같은 셋업, 같은 신발을 신고 갈 때마다 느끼게 되더라고요.



스티브 잡스의 신발로 유명해진 992.

사실 이 992도 뒤축이 계속해서 터지기에

수선을 3번 하면서 신었습니다.


결국, 아무리 비싸고 잘나고 좋은 신발이더라도

소모품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아내가 여자친구일 때 신었던 991.

그리고 제가 가장 아끼는 990v2.


990v2는 연애 시절, 친한 친구와 함께

뉴발란스 홍대 매장에 새벽 4시에 도착해서

캠핑 아닌 캠핑을 해서 구매했던 모델입니다.


그만큼 오래 기다렸고, 제가 신발을 고르는 기준에

가장 잘 부합하는 모델이기에 열심히 신고 있죠.

유명하고 비싼 모델들을 많이 모아봤지만,

결국 몸에 맞고 만족도가 큰 모델은 정해져 있더라고요.


입사 당시 여자친구(현 와이프)가 만들어준 케익.

신발을 뭘 넣을지 혼자 고민했다는데,

그림으로 넣을 990도 v2로 넣어줬었어요.


v2신고 만난 날 깜짝 이벤트로 케익을 챙겨줘서,

990v2를 신을 때 이 날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사진은 참고용. 저 아닙니다.)


옆에서 보면 중창에 꽃빵 박힌 것 같다고 하는데,

저는 그래서 v2가 맘에 듭니다.

(구) 담당자로서는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던 v2라

마음은 아프지만 한 편으로는 좋았죠.


저만 신고 다니면 되니까요.


입사 후 첫 행사 때도 990v2를 신었네요.



같이 캠핑했던 친구랑 나란히 v2 신고 갔었죠.


그만큼 저에게는 뗄 수 없는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비주류다, 못생겼다 하지만

저에게는 최고의 신발이니까요. (솔직히 992보다 낫습니다)


함께 늙어가고, 제 시간을 기록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모델입니다.




신발 신고 사람을 만나는 것.

신발을 기억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죠.

저는 그 시간 대부분을 아내와 보냈습니다.


연애기간이 짧아서인지,

항상 신발들을 보다 보면

'그날 이걸 신었었지'

'이거 신고 어디를 갔었지' 하는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게 좋더라고요.


사진을 정리하다 보니,

사계절 내내 990v2를 신고 있었네요.


신발 관리에는 일가견이 있는 터라

오래 신고 막 신어도 새 신발 같기는 합니다.


입사 후 처음으로 맡았던 신발들.

폭염이 기승이던 때에

어렵게 돌고 돌아 구매했던 신발이네요.


테디 샌티스가 990 컬렉션을 처음 맡았던,

첫 시즌의 첫 제품들이에요.


이날 샀던 990v3도 990v2만큼이나

굉장히 잘 신게 됩니다. 안 샀으면 후회할 뻔했어요.


이리 잘 신고 다니는데.

지금은 중창이 다 벗겨져서 너덜너덜합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열심히 신고 있어요.

신발은 신으라고 있는 거니까요.


시간을 기록하는 또 다른 신발이 됐습니다.



셋업에는 습관적으로 그레이 슈즈를 신습니다.

오히려 색이 들어간 걸 신으면 애매하더라고요.


이제는 경조사 공식처럼 돼버린

러프사이드 클럽 셋업 + 그레이 슈즈.


이럴 때 990v2나 v4를 신곤 합니다.


컬러별로 맞추는 것도 무시할 수 없죠.

회색만 너무 많다 보니

블랙/네이비에 적절한 것들을 하나씩 맞추고

상황에 따라 잘 신었던 것 같아요.


같은 컬러를 굳이 의미 부여하며

여러 족 모아두는 게 낭비로 느껴지더라고요.


그리고 세상엔 좋은 신발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신혼여행으로 유럽을 갔었는데,

일주일 내내 살로몬 xt-6만 신었어요.

그만큼 지형에, 상황에, 룩에 잘 맞고

하루종일 신고 걸어도 정말 편했어요.


여름에는 시원한 신발이 최고죠.

무지티를 자주 입기에 신발로 포인트를 줍니다.


30년 평생 살면서

여름에 프레스토를 이기는 걸 못 신어봤네요.

같은 걸로 한 족 더 사고 싶을 정도입니다.

날씨에 맞는 신발은 정해져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예쁜 신발은 계속 나옵니다.

단화류와 뚱뚱한 신발을 안 좋아하기에

날렵한 로우프로파일에 착용감이 편한 신발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죠.


필드 제너럴은 근 10년간 샀던 것 중에

가장 맘에 드는 나이키 신발이었어요.


아내와 함께 신는 990은

그렇게 익어갈 것이고


스스로에게 의미가 있는 998은

제 시간들을 기록해 주겠죠.

요즘 가장 좋아하는 그레이 슈즈입니다.


필요한 색들만 채워도 충분한데,

뭐 그리 욕심이 많았는지.

한껏 걷어낸 지금도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욕심이고, 많아 보일 수 있을 거예요.


그래도 이번에 이 욕심을 걷어낸 게

스스로의 마음가짐에는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덕분에 어떤 게 제게 어울리는지도 알게 되고,

필요한 게 뭔지 알게 됐어요.


물론,

앞으로의 10년을 기록할 신발 하나만 더 남겼어요.

키즈 사이즈까지 해서 패밀리슈로..!


결혼을 하고 나니 특히 더 그렇습니다.

집에 채우는 물건이 더 좋고,

몸에 걸치는 것보다 가족과 같이 쓰는 물건이

더 재밌기도 하고, 더 의미 있는 것 같아요.

(물론 훨씬 더 비싼 게 많습니다..)


지금 신는 신발들도

언젠가는 바스러지고, 언젠가는 터지겠죠.

그리고 새로운 신발을 또 꺼내 신을 겁니다.

그때도 매일 몸에 한 켤레씩 걸쳐질 거예요.


어차피 하루 하나.

오랜 시간 함께할 물건들을

신중하게 고르고, 시간을 써서 관리하는 게

눈으로만 풍족한 것보다 나은 것 같아요.


함께 기록에 남을 것들을 추리고,

욕심냈던 것들은 보내주는 일.

어쩌면 사람 사는 것과 닮은 것 같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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