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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다 May 29. 2024

USB가 불러일으킨 사단

까마득하다. 어깨뼈가 부러질 것처럼 장바구니를 메고 다닌 기억이, 무릎이 닳도록 오르내린 기억이, 뒷 목이 뻐근할 정도로 집중하던 손가락이. 모두 기억 저편에서 마치 내 과거가 아닌 듯 희미하기만 하다.

'그런 일이 있긴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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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시작이다. 좀 생산적인 일을 할 때마다 온라인 속 나의 가치를 인증해야만 한다. 통장 하나를 개설하려 해도 급여 명세서나 재직증명서가 필요하다. 정부24에 들어가 간단한 종이 한 장 발급할 때조차 내 존재를 몇 겹으로 인증해야 한다. "이깟 종이 한 장 발급하는데 대체 몇십분이나 걸리는 거야! 오늘 중에 되긴 하는 거야?" 결국 이는 미리 준비하지 못한 나태함에 대한 발길질이었고, 그 발길질이 쇠기둥에 부딪히자, 억울함과 함께 짜증스러움이 솟구쳐 올라왔다.

'왜 늘 이 모양인데.'



업무용 메일이 가득했던 십여 년 전 주소가 맞는 걸까. 누가 바꿔치기라도 한 듯 광고성 메일만 그득한 메일함을 열어보다 '내 쓰임의 무쓸모'에 표정이 굳어간다. 의도치 않은 슬픔은 이런 것이다. 광고성 메일과 중요 메일을 주의 깊게 살펴 휴지통에 버리던 일이, 이젠 한 번의 클릭으로 끝이 난다. 모든 것이 필요 없다. 메일함이 휴지통에 버려져도 상관없다. 슬픔은, 내 존재 가치는, 때론 이렇게나 무방비 상태로 한 방을 먹인다.


오늘도 가차 없이 제대로 당했다.


© unsplash


내일은 또 어떤 자잘한 짜증스러움이 나를 기다릴까.

어느 예기치 못한 등장으로 하찮은 주먹을 날릴지 몹시 기대된다. 생각할 것도 없다. 그 주먹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으로 매울 것이므로. 아주 기분 나쁜 맵기로 또 나를 울릴 것이다.

 



지갑을 채우고 있는 빳빳한 종이들은 커피숍 쿠폰이다. 5G 시대지만, 역시 동네 장사는 특유의 빳빳함이 빠질 수 없다. 무심히 지갑을 정리하다 보면 무참히 자격지심이 상하곤 했는데, 같은 두께지만 명함 한 장 없다는 사실이 그렇게나 우울했다. "요즘 시대에 무슨 명함?"하고 콧방귀 낄 수 있지만, 그 자리를 각종 쿠폰이 차지하고 있는 꼴을 보노라면, 무엇보다 도장을 애지중지 모으는 자신을 보고 있자면, 늘어진 홈웨어만큼이나 처량하기 그지 없다. 정말 거지 같아, 더욱 그지없다.

© unsplash

남편 usb를 보며 우리 삶의 '다름'을 보았다. 너는 있고, 나는 없는. 아니, 나는 잃어버린 그 작은 장치가 우리를 이렇게 갈라놓다니. 그 안의 용량이 각자의 삶을 대변하는 것도 아니건만, 왜 이리 씁쓸한 입맛을 다시게 되는 걸까.

그의 출장이 끝을 향할수록, 내 인내심의 우물이 쩍쩍 갈라진 채 바닥을 보였다. 더 이상 어떤 물기도 퍼 올릴 수 없을 것 같은 메마름에서 눈물이 퍼 올려졌다. 네가 빛을 볼수록 내가 암흑으로 나가떨어지는 상황. 덕분이라는 구태의연한 문자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차마 할 수 없는 말이라 끝내 답장하지 못했다. 어떤 단어가 정확한지 알 수조차 없어, 답을 할 수 없었다.


© unsplash

나 역시 네 덕분에 이렇게 글을 쓴다.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은 바로 남편의 주머니에서 나왔으니깐. 그 덕분에 시간을 샀고, 그 덕분에 자격지심을 얻었다. 내 글감의 원천, '자격지심'. 남편한테 느끼는 점에서 아이러니하지만, 네가 캐리어로 돌길을 걷고 있을 때 나는 돌을 주워 삼킨 것 같은 체증과 함께, 꽉 막힌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서로 덕분이라지만, 우린 이렇게나 다르네. 어차피 전해질 리 없는 속마음이지만, 너의 배려에 난 몹시 지쳐가고 있다.


어쩌면 그래서 시작할 수 있었다. 글쓰기의 세계에 발을 내디딘 것도 결국 잃어버린 세계 속에서 자아 찾기였다. 나와 어울리지 않는, 외면했던 세계지만 이번엔 달랐다. 흰 여백에 마음의 소리를 묵묵히 적어 가도 될 것만 같았다. 어찌 보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누군가가 있지 않을까. 그 한 명을 위해서라도 키보드를 두드리다 보면 두 명이 세 명이 되고 함께 위로받을 수 있지 않을까.

사람은 자신이 살고자 행동한다. 돈을 버는 것도, 일을 하는 것도, 결국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함이며 가장 절실할 땐 초인적인 힘이 나온다. 70여 편의 끄적임을 지속할 힘도 내 안의 불편한 감정 때문임을 고백한다. 결핍이 있기에 할 수밖에 없다. 이마저 하지 않는다면 내가 살 수 없으므로.


부정적 감정이 남겨진다는 사실이 때론 부담으로 다가온다. 꾸며지고 정제된 모습만 남기고 싶은 해맑음을 지향하기도 하니깐. 하지만 밝음이 클수록 그 어둠의 깊이도 깊어진다. 자꾸만 생각한다. 이 상황에 대해, 나라는 사람에 대해.

과연 무엇을 얻고자 노트북을 열게만 되는지. 답답함을 끌어안고 왜 이 자리에 앉고 마는지. 때론 이 감정이 나쁘지만은 않다는 게 문제점이기도 하다. 살짝 미간이 찌푸려지고 입술이 앙다물어져 조금 삐져나온 모습. 어딘가 집중하고 있는 모습에, 그 집중의 대상이 나라는 점에서 만족한다. 화살이 나를 향하고, 나를 파헤친다는 점이 아프기도 하지만, 그 조용한 활시위가 때론 의미 있게 다가온다. 글을 쓸수록 이중적인 모습에 또 한 번 놀라지만 어쩌겠는가. 아직 정확한 답을 찾진 못했으므로 쓰기를 지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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