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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다 May 12. 2024

남편이 유럽을 간대서,  콩나물을 다듬었다.

 출장을 하루 남긴 남편이 물었다.

"내가 뭐 해주는 게 낫겠어? 같이 있으면서 밥을 챙겨줄까? 아니면 애들 데리고 나갈까"

'어린이날이 속해 있는 달은 언제일까' 와 같은 질문을 하는 그에게 단호히 말했다.

"다 데리고 나가."



주말 오전의 놀이터 속 나른한 시소처럼 체온이 37도 대를 왔다 갔다 한다. 분명 목 안에서 울리는 목소린데 옆 동굴 소리로 들리고, 생각이 공중 부양해서 떠도는 기분이 요 며칠째 계속되고 있다. 초점이 맞지 않는 생활 속에 불현듯 찝찝한 기분이 들었고, 그것은 바로 2주간 해외 출장이 잡혀있는 그의 부재를 상기시켰다. 뭐, 아이들이 없을 때야 남편이 아이슬란드에 가서 뭣을 하고 온다고 한들 크게 개의치 않고, 인터넷 면세점만 들락날락했을 테다. 혼술, 혼영, 혼밥 등 동사 앞에 '혼자'라는 단어를 붙여 온갖 것들을 하며 결혼 전 생활을 달콤하게 탐닉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은 똥강아지 두 마리에 치여 있고, 그들의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해야 한다 생각하니 벌써부터 힘이 툭, 풀리며 단전에서부터 미세먼지가 소용돌이치는 느낌이다. 그의 부재로 인한 몸의 반응을 생각해 보니, 그는 썩 괜찮은 아빠의 표본인가 보다. 그의 몫까지 온전히 내가 감당해야 한다니, 그의 캐리어에 쏙 들어가 기내로 숨고 싶어진다.

©unsplash


"출장 가는데 혼자 아파서 어째."


아픈 아내가 퍽 걱정이 되는 듯 짐을 싸며 한 마디를 건넨다. 눈이 마주치면 한숨의 무게만큼 눈물방울이 떨어질 듯하여 입을 꽉 닫고,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빨래로 시선을 옮긴다.

본인이 가장 힘들 것이다. 새로운 거래처를 뚫기 위해 2주간 유럽 이곳저곳을 옮겨 다녀야 하는 일정이 내 피곤함보다 더 빽빽할 터인데, 와이프 눈치를 살피는 그를 보자니 섭섭함이 사그라들려 한다. 지금이야 세상 제일 힘든 사람이 바로 '나야, 나'라는 액션을 취하고 있지만, 그의 부재와 함께 돌변할 것이다. 몸 안에 비상으로 비축된 에너지에 부스터를 달고, 긴 망토 휘둘러 아이들을 감싸 안으며 두 눈을 부릅뜨겠지.

'가족은 내가 지킨다.'

슈퍼우먼 모드로 on 된 모습을 남편은 모를 것이다. 낮과 밤이 바뀐 생활 속에 간신히 연락이 닿는다면 세상 제일 딱한 목소리로 기어가듯 말할 테니깐. "... 그렇지 뭐." 그러나 아이들 앞에선 아빠의 부재로 인해 우리의 루틴이 달라지는 건 없다는 강경파의 메시지를 전하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저번 주를 복사해 붙여 넣기 한 삶을 살 것이다. 몽롱한 정신을 붙들어 매고 집안을 스캔한다. 그의 부재만큼 늘어난 일로 인해 에너지는 쉽게 고갈될 터이니, 괜한 먼지 한 톨이 심기를 건드리게 놔둬선 안 된다.

그러면 그가 떠나기 전, 해야 할 몇 가지 일들을 나열해 볼까.



첫 번째. 온라인 장보기를 통해 에너지와 시간을 아껴 냉장고를 가득 채워 놓는다.

이때 냉동고의 비상식량은 보물창고가 될 터이니, 아이들이 잘 먹는 갈비탕, 곰탕, LA갈비는 필수품이다. 슬슬 지쳐갈 때쯤, 딱 꺼내서 밥에 말아 알타리 하나 꺼내주면 속도 든든, 엄마 마음도 든든한 일등 공신 되겠다.


두 번째. 장보기 한 재료를 다듬어 나눠 놓는다.(일명 프렙하기)

놀이터와 학원 픽드랍 후 책가방 두 개를 어깨에 둘러메고 들어와 재료 손질부터 해야 한다면 배달 앱을 켜고 싶은 마음이 훅, 올라올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든 바로 칼질을 시작할 수 있도록 콩나물 대가리와 뿌리를 다듬고 당근, 양파는 껍질을 깐다. 금방 쓸 것이라면 감자도 깎아서 물에 담가 둔다. 이렇게만 해놔도 카레, 볶음밥, 감자채볶음 등 요리에 조수 한 명이 붙은 듯 속도가 난다.


세 번째. 물건 위치를 정리 정돈 한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지만, 일을 시작할 때 물건이 없어 찾게 된다면 시작부터 미간이 좁혀진다. "왜 제자리에 없지? 누가 어디에다 둔 거야. 엄마가 물건 쓰면 제자리에 두라고 했지!" 하면서 잔소리가 쉬지 않고 줄줄이 사탕처럼 이어질 가능성이 크므로 제자리에 딱딱 정리해 둔다. 특히 지우개와 연필, 빨간 색연필은 여유롭게 이곳저곳에 비치해서 엄마의 입을 틀어막을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함에 밑줄 쫙, 별표 5개 부탁한다.


네 번째. 잠자리 도서를 미리 준비한다.

보통 첫째는 아빠와 둘째는 엄마와 따로 분리해서 잠을 잤지만, 아빠가 없는 동안 우린 한 방에서 자게 된다. 퀸사이즈 침대에 셋이 옹기종기 누워 책을 읽다가 아빠를 그리워하며 눈물 지을 미래가 빤히 예상되므로 슬픔이 쏙 들어가도록 재밌게 읽어 줄 도서를 준비 한다. 그럼에도 아빠가 보고 싶어 훌쩍이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릴 첫째지만 어쩌겠나. 엄마가 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

©unsplash

결국 시스템을 만들어 생각하기 전에 몸이 움직이는 구조를 만들어 놓는다면 감정적 동요 없이 할 일을 할 수 있다. 일에 속도가 붙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 어쩌면 엄마와 함께하는 군대 육아가 될 수도 있겠다.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 것이고, 각자 해야 할 일을 주도적으로 해야 한다. 셋이 균형 맞춘 14일을 보내고, 군대에서 퇴소할 때쯤 아빠가 선물꾸러미를 들고 해맑게 도어락을 누를 것이다.

내일 헤어져야 함에 큰 아이는 벌써 베갯잇을 눈물로 적시고 있지만, 그럴수록 엄마는 더 단단해져야 한다.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감정을 읽어주고 토닥여 줄 때도 있지만, 대수롭지 않게 눈물을 모른척 해줘야 할 때도 있으므로. 연휴가 끼어있어 아빠의 부재가 더 크게 와 닿을 아이들이지만, 출장 가는 뒷모습을 보며 자신의 미래도 그려보기를 바란다. 우리의 거리는 지구 저 편으로 멀어지겠지만 그만큼 결속력이 다져지고 서로를 애타게 그리워하는 시간이 될 것임을, 엄마의 심지가 더 단단해지는 시간이 될 것임을 알고 있다. 몽롱했던 정신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다. 아마, 긴장 모드로 돌아가는 걸 테지. 흘렀던 콧물이 메말라가고 먹먹했던 소리가 점차 또렷해진다. 빨간 망토가 펄럭인다.

OKAY.

I'M REA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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