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을 재우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시원한 맥주 한 캔을 소중히 집어 드디어 앉는다. 이 시간만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오늘은 참고 자려 했지만(솔직히 한두 번의 의식에 불과하지만) 역시나, 이기지 못하고 캔을 따고 만다. 노란 기포 속에 흰 거품이 넘치려 할 때 목구멍에 차디찬 목 넘김을 허락한다.
'하아- 오늘 숨을 쉬긴 했나. 이제야 살 것만 같다.'
독일이 이렇게 큰 나라였는지. 뮌헨에서 함부르크로 또 다른 소도시로 이동한다. 비행기를 갈아타고, 기차를 타고, 택시를 타며 엘리베이터도 없는 호텔에 캐리어를 이고 지고 옮기는 남편이다. "아빠 호텔 도착했어. 다락방이고 별로 좋지 않아." 흡사 빨간머리 앤이 창문을 박차고 얼굴을 내밀 것만 같은 목가적인 다락방의 풍경이다. 내 눈엔 고급 스위트룸만 같다.
'좋겠다, 넌. 혼자 있어서.'
참고 참았던 우울한 마음이 드디어 메신저로 전해졌다. 대체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나를 위한 일이 뭐가 있는지, 같은 레퍼토리를 시전하며 우울감을 무심히 전달하자, 이해인지 불응인지 모를 답변이 왔다. 그리곤 자기 역시 같다며, 푸념을 늘어놓는 남편을 등지고 노트북을 켜본다. 어디에도 하지 못한 내 깊은 마음을 읽어줄 리 없는 이곳에 털어놓으며 내일을 버텨낼 의지를 쥐어짜 본다.
식탁 의자에 앉아, 아이 문제집을 옆으로 치우고 작은 토로를 뱉어내는 이 시각. 나에게 허락된 자유의 시간을 잠에 양보할 수 없다. 뱉지 못한 말은 아이를 향한 꼬투리로 남게 되기에, 여기에 그 케케묵은 심정을 남겨야 한다. 아이를 키우는 일이 가장 보람되고, 부모(특히 엄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칭송하는 이유는 그 일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오지 않길 바라는 이기심 때문 아닐까. 부모를 가스라이팅 하는 이 시대의 이율배반적인 시선에 우린 또 자기 발목에 사슬을 채우고 힘겨운 발걸음을 이어간다. 내 선택으로 낳은 아이라지만, 좋은 부모 됨이 이렇게 고단한 일인지 차마 알지 못했다. 목표를 향해 걸어갈수록 멀어지는 결승점에 쉬이 지치고 만다.
"정상은 어디인가요? 얼마나 걸려요?"
'조금만 가면 된다, 거의 다 왔다, 코앞이다.'라는 뻔한 거짓말에 속아 오르고 또 오르는 등산처럼, 우리의 치열한 육아도 끝이 없다. 옛 말씀에 '내가 죽어야 끝이 난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이보다 적확한 말이 또 있을까.
초자아가 높은 부모일수록 이상향에 가까운 모성 신화를 설정하고 자신을 옭아맨다. 흡사 미국의 1950년대 전업주부 신화랄까. 곱게 차려입은 엄마가 갖은 구시대적 집안일에 치이기는커녕, 선홍빛 잇몸을 드러내며 말한다. "힘들다뇨? 너무 즐거운걸요. 이는 엄마만이 할 수 있는 성스러운 일입니다. 여러분, 가족과 함께하세요. 우리가 돌 본만큼 가정은 사랑이 넘쳐 난답니다! 오브 콜스!"
그 미소가 가증스럽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다들 성공 신화에 목을 맨다. 마치 엄마 손끝이 마에스트로의 지휘봉인 듯, 현실에 없는 요술을 불러낸다. 그럴싸해 보이는 옆집 모습에 휘영청 거리는 내 볏짚을 들고 흔들어 본다.
'뭐야, 왜 이래. 주문이 잘못됐나? 아, 앞치마를 두르고 건치를 드러내야지, 잠시만."
엄마가 집에 있을수록, 부엌에 있을수록, 우리 아이가 잘 자란다는 과학적 논증이라도 있는 건지. 시대가 발전할수록 가중된 모성애를 요구한다. "뭐야, 엄마라는 사람이 이러기야? 이게 엄마가 할 생각이야? 어디 성스러운 엄마 역할 앞에 자신의 존재를 덧붙이는 거야." 나라는 사람은 뒤로 물러난 채 아이를 위한 24시간을 보내고 나면, '나'는 과연 어디서 위로받아야 할까. 내가 숨 쉴 수 있는 곳은 과자 부스러기와 음료수 자국이 남은 푹 꺼진 쇼파일까. 노트북을 올려놓은 아직 끈적인 반찬 향 밴 식탁일까. 나를 찾을 공간이 필요하다. 내가 위로받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거미줄 쳐진 네트워크에 빗질하고 맥주 한 잔 같이 걸칠 내 편이 필요하다. 그저 고개 끄덕이며 작은 토닥임을 건네 줄 네가 필요하다. 내 인생에 빛이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