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울고 내가 화를 낸다. 내가 화를 내고, 아이가 운다. 어느것이 맞을까. 누가 자초한 일 일까. 표정을 잃은 나와, 감정을 삼키는 너. 우린 제대로 공존할 수 있을까.
기억난다. 베란다. 그러니깐 육아 중인 엄마를 위해서도 베란다는 위험하다. 차디찬 바닥에 맨발을 내딛고 창밖을 보며 한숨을 내쉬는 그 공간은 아슬아슬한 우리의 민낯이다.
그때도 그랬지. 목동으로 넘어가는 그 얕은 고개에 빨간 브레이크등이 꼬리물기 하며 서 있는 모습. 귀가를 서두르는 빨간 신경질들 속에 아기띠 속 네 엉덩이를 두들기고 있었다. '어서 자라, 아가야. 왜 이렇게 안 자니.'
그리곤 생각했다. 퇴근길의 치열함에 나는 없구나. 빗나갔구나. 하염없이 이어지는 선홍빛 꼬리들을 내려다보며 슬픈 바운스를 튕기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또 베란다에 섰다. 주방 앞 베란다이긴 했지만. 냉장고 문을 열며 얼굴을 감추고 한숨을 훅- 내뱉었다. 세탁기 속 빨래를 꺼내며 또다시 한숨을 훅- 토로했다. 뒤엉킨 무거움을 들어 올리며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아 그 시간이다. 맨발의 베란다.' 아기띠의 슬픔이 다시 한번 스쳐 가며 이번엔 빨래 바구니를 명치까지 들어 올리던 팔에 힘이 툭, 도망갔다.
어스름하게 지친 퇴근길의 고단한 시간. 저녁 언저리의 피곤함이 몰려오는 이때가 되면, 육아 우울증이 최고치를 찍게 된다. 갑자기 하루치 쓸모와 쓰임을 생각한다. 구겨진 색종이와 반쯤 뒤집어진 양말, 널브러진 레고 조각 사이를 헤치고 툭툭, 빨래를 넌다.
탁탁 널며, 내려앉는 슬픔을 털어낸다. 뭣이 그리 우울한지 모르겠지만, 왠지 시간에 점령당한 무거운 솜처럼 어깨가 푹 꺼진다. 이에 표정도 쓸려 내려온다. 아래로 휘어진 활 같은 입매와 반쯤 초점을 잃은 눈 속에, 무의미한 손만 바지런히 움직여 본다. 표정 잃은 단순 노동자의 삶이 이러할까.
단순 노동자.
대체될 수 없는 단 한 명의 단순 노동자.
엄마에 다른 이름이 붙는다면, 또는 엄마의 부연 설명란이 생긴다면,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실상은 똑같은 하루가 없다지만, 멀리서 본다면 우리의 삶은 단순 그 자체다. 따라서 생각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그 의미를 자각할 수조차 없는 극한의 메마른 몸부림이다. 그들의 말라 가는 표정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마음이 느껴진다. 작은 바람의 소용돌이에도 공중으로 올라 먼지와 뒤엉킨 그 마음. 한때 촉촉한 생기를 자랑하던 싱그러움은 다 어디 갔을까. 누가 우리의 수분을 빼앗고, 변색시켰을까. 존재라도 안다면 대놓고 말하겠는데, 이 이유 모를 감정에 우린 그저 바스러져 갈 뿐이다.
무의미하게 빠른 손놀림으로 부품 공장 속 그녀들처럼 집안일을 해보지만, 아이는 부품이 아니다. 엄마가 생기를 잃어갈수록 아이는 엄마의 눈치를 살피게 되고, 그 모습에 엄마는 또 죄책감을 느낀다.
'대체 어쩌라고!!'
이 말은 아이를 향한 외침이 아니다. 마음속 자괴감에 홀로 소리치는 외로움이다. 이들에겐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각자 자신의 마음을 해소하고 만나, 적당한 예의를 차릴 거리 말이다. 부모와 자식 간에 무슨 거리 운운하냐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쩌면 그 거리가 가장 필요한 사이는 아이와 엄마이지 않을까. 말이 안 통하기론 남편도 못지않겠지만, 그래도 어른이다. 어른과 어른은 서로 감정적인 싸움이 가능하다. 적당한 소음에 자신을 방어할 줄도 안다. 하지만 아이는 다르다. 감정을 온전히 뒤집어쓴 채, 습자지처럼 빨아들인다. 내 잘못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엄마의 기분으로 색칠 당한 아이는 아직 우산을 펼칠 준비를 하지 못했다.
이 엄마에게 뒤엉킨 감정을 해소할 수 있는 분출구. 그것이 약이 되었든, 주변 사람이 되었든, 아니면 혼자만의 시간이 되었든. 그 모든 것이 적절히 어울려져 그녀가 제 색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흡사 이런 사람이 주변에 있거든, 한 번 더 주의를 기울여주길 바란다. 내가 힘든데, 어디 남의 기분 따위를 살피냐 할 수 있겠다. 물론, 각자의 힘듦이 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린 어른이다. 우리가 진흙탕 속 마음을 한번 들여봐 준다면, 아이가 뒤집어쓸 일이 적어진다. 한 아이의 우산이 되어주자.
결국, 육아를 개인의 짐으로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저 엄마의 불안한 인성으로 인한 아이의 불행한 성장 과정이라 여기지 말자. 그녀가 맨발로 베란다를 나가지 않도록, 아기띠의 슬픈 바운스와 함께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해소할 수 있는 창구를 만들어줘야 한다. 정부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닌지라 정책을 얘기하진 않겠다. 아니 못한다. 그저 같은 슬픔을 오늘도 겪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그녀들이 올곧은 걸음을 걸을 수 있도록 옆에서 얘기하고 싶다.
'절대, 엄마 탓 아니에요. 절대, 당신 탓 아니에요.'
남들 모두 해내는 과업이 왜 나만 힘든지, 그 어둠의 터널을 겪고 있을 때는 아슬함과 절망감만 느낀다. 저 멀리 빛이 새어 들어오는 출구는 눈이 부시고, 내가 지나온 입구는 까마득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 안에는 나 혼자가 아니다. 나와 비슷한 고난의 터널을 모두 겪고 있다. 단지 내 주변의 어둠에 잠식돼 보이지 않을 뿐. 결국 우리는 함께다. 홀로 생각했던 그곳에서 우린 동행한다. 손을 한 번 뻗어보자. 너와 내 손등이 서로의 온기를 느끼고,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우린, 또 다른 눈물을 흘리겠지. 그 시간을 거쳐 온 사람들이 입구에 서서 슬픈 미소를 짓고 있다. 어쩌면 자신을 돌아보는 감정일게다. 터널의 거친 벽을 짚어가며 위태로운 한발을 걷고 있는 그녀들에게 어둠 속 손길을 건네주자. 우리 이제 손 잡자.